제12화
“하아.”
극성인 서포터즈에게 닭장을 불태우겠다는 핵폭탄급 발언을 투하한 디에고 로시 때문에 유지우는 라커룸으로 들어오자마자 이마를 짚었다.
“휘휘휘~.”
태연하게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피하는 걸 보자 유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그런 말을 왜 해?”
“짜릿하잖아.”
“두 번 짜릿했다간 사람 죽겠다.”
닭장을 불태우겠다는 말을 한 뒤의 반응이 엄청났다.
지면 죽을 것 같다는 게 어떤 건지 살짝 알게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왜 웃어? 기분 나쁘게.”
디에고 로시는 아까부터 입꼬리가 귀에 걸려서 내려오질 않았다.
“유.”
“뭐.”
“너 평소보다 말 많이 하는 거 알아?”
유지우는 흠칫 놀랐다.
“내 목표 중 하나는 이뤘다.”
“목표가 뭔데?”
“너 말 많이 하는 거.”
“그리고?”
“너 웃는 얼굴 한 번이라도 보는 거. 그거 내기 중인데 몰랐지?”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구단 사람들도 매일 힐끔거리면서 언제 웃는 얼굴을 보여줄지 기대하던 눈치였으니까.
“웃을 때 되면 웃겠지.”
“쳇, 한 번만 웃어주면 안 돼?”
아무 말 안 하고 주변을 보자 동료들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봤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려다가 자신에게 밀려 선발에 들지 못한 파울로 가르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
파울로 가르시아는 니자레노와 U-15 클래스부터 함께 코스를 밟아온 사이라 단짝이었다.
“뭘 봐?”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녀석들한테 좋은 말이 나갈 리는 없었다.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처음 보는 선수들과도 친해지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그 일이 벌어진 뒤에는 생각하는 신념이 아예 달라졌다.
‘날 싫어하는 녀석들이라면 노력해서 친해질 필요가 없다는 것.’
그래서 유지우는 니자레노 일행들과 굳이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재수 없는 놈.”
“내 속마음을 대신 얘기해주는 거야?”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대신 나가는 주제에 말이 많다?”
“나한테 밀려서 벤치나 데울 처지인 놈이 입만 살았네.”
“네가 선발로 나가는 게 네가 잘해서 그런 줄 알지? 넌 내 아래야.”
“네가 벤치를 달구는 건 못 해서 그런 거라는 건 잘 알아.”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파울로 가르시아는 유지우를 더 노려봤고 디에고 로시가 축구화 끈을 묶으며 말했다.
“파울로.”
“왜?”
“네가 올해 어떤 경기력을 보여줬는지 잘 알지 않아?”
“…….”
“자기가 노력도 안 하고 자리만 챙기려고 하면 안 되지. 여기 있는 애들이 멍청이도 아니고 말이야.”
디에고 로시의 말에 파울로 가르시아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숙였다.
“쳇.”
때마침 로돌포 핀티가 라커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파울로 가르시아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긴장했나?”
로돌포 핀티의 물음에 동시에 대답했다.
- “아닙니다!”
“카를로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거면 떨리는 다리 좀 숨겨라.”
“아, 아니거든요!”
“마르틴, 옆에 다리 좀 잡아줘라. 저러다가 땅에 구멍 뚫리겠다.”
미니 엘 수페르클라시코.
이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여타 다른 경기들과 차원이 달랐다.
선수들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긴장한 티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났다.
그런 걸 숨기기엔 아직 경험도 부족하고 너무 어린 나이니까.
‘다들 이런데도… 저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로돌포 핀티는 슬쩍 유지우를 봤다.
아르헨티나에 오고 첫 선발이기도 하고, 여기 있는 선수 중에 가장 경험이 부족한 선수인데 긴장한 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난놈이라는 건가.’
간혹 그런 선수가 있다.
경기를 앞두고 긴장보다는 설렘을 가지는 특이한 선수가.
‘그렇다면 더 지켜봐야지, 저놈이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재능이 있는지.’
로돌포 핀티는 라커룸 가운데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선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긴말은 하지 않는다! 이제 지는 건 지겹다! 지난 5년의 설움을 오늘 경기에서 갚아주고 와라!”
- “가자!”
* * *
삐----익!
주심의 휘슬이 울리며 미니 엘 수페르클라시코가 시작됐다.
리버 플레이트 U-20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심지어 철천지원수인 보카 주니어스 유스에 있던 유능한 선수들을 막대한 돈을 제시하며 데려가는 경우가 있어 보카 주니어스 팬들은 리버 플레이트를 증오했다.
“빌어먹을 놈들 다 죽여버려!”
“저 배신자! 델핀! 도밍고! 먹이만 보고 따라간 닭장은 살 만하냐!”
유소년 간의 대결이긴 해도 언젠가는 1군으로 올라가 팀을 지탱할 미래들이었다.
향후 아르헨티나 리그의 패권을 가져가는 게 어느 클럽인지 대략적인 지표를 알 수 있는 친선경기라 팬들의 응원도 고조됐다.
리버 플레이트는 [4-2-3-1] 포메이션으로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배치해 수비적인 부분을 신경 써 보카 주니어스의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플레이를 했다.
퍼---억!
보카 주니어스에서 가장 많은 압박을 받는 건 왼쪽 윙포워드 디에고 로시였다.
“크윽!”
리버 플레이트는 볼이 가기도 전에 몸싸움으로 디에고 로시를 괴롭혔다.
어떻게든 압박을 빠져나오면 다른 선수가 마크하며 아예 디에고 로시 쪽으로 볼이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디에고 로시의 측면이 막히자 두 명의 공격 미드필더를 이용해 공격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무리한 돌파로 허무하게 볼을 빼앗겼다.
“아아아아아아!”
“패스하라고, 멍청이들아! 오른쪽에 꼬맹이가 빈 곳에 있는데 왜 패스를 안 해!”
“눈에 똥이라도 발랐냐! 왜 그걸 못 봐!”
관중석에서 탄식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리버 플레이트의 역습.
그들은 보카 주니어스 수비 에이스 니자레노가 지키는 중앙이 아닌 비교적 취약한 측면으로 공격을 풀어나갔다.
5분.
10분.
15분.
시간이 흘러가면서 리버 플레이트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뻐-엉!
날카로운 크로스와.
뻐-----엉!
슈팅으로 집요하게 보카 주니어스의 골문을 노렸지만, 골포스트를 맞거나 빗나가며 득점이 나오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 오른쪽 측면에 있던 유지우는 볼이 오지 않아 차분하게 경기 흐름을 살폈다.
‘풀백들의 반응이 너무 늦어. 소통도 되질 않아서 패스 정확도도 떨어지고.’
부족한 소통과 급한 볼 처리.
2차 기회도 리버 플레이트에게 주어지며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후방 빌드업을 이끄는 녀석이 멍청하게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저럴 땐 포백을 보호해 주면서 볼 배급을 해줘야 하는데…. 쯧’
수비형 미드필더의 역할은 포백을 보호하면서 적극적으로 볼을 차단해줘야 하는데 세바스티안 레온은 역할 수행을 전혀 하지 못했다.
‘어라?’
그때였다.
유지우의 시야에 리버 플레이트의 반복적인 패스 경로가 보였다.
다양한 방향으로 공격 전개를 했지만,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패스의 시작점.’
그곳으로 볼이 모이고 있자 유지우는 측면에 머물지 않고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세바스티안! 볼을 쫓지 말고 길을 봐! 그리고 후안! 다리에 구멍이라도 뚫렸어? 볼을 왜 그렇게 흘려! 네가 뚫리면 실점한다는 생각으로 몸을 날려서라도 뒷공간으로 볼이 가지 못하게 해!”
리버 플레이트에 밀리며 답답한 경기 운영을 보여주자 로돌포 핀티는 선수들에게 괴성을 질렀다.
골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언제든 실점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때.
로돌포 핀티의 시야에 오른쪽 측면에서 중앙으로 움직이는 한 선수가 보였다.
“뒤로 주지 마!”
마찬가지로 그것을 본 리버 플레이트 U-20의 주장 에두아르도 구아린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촤----악!
유지우가 순식간에 중앙으로 올라오며 슬라이딩 태클로 에두아르도 구아린에게 가는 패스를 끊어냈다.
- 오오오오오!
다양한 패스 가운데 반복되는 패스는 리버 플레이트 선수들이 압박에 막히면 에두아르도 구아린에게 가는 백패스였다.
필드 밖에서도 찾기 힘든 걸 유지우는 단번에 찾아내며 볼의 소유권을 가져왔다.
“전원 뒤로! 역습에 대비한다!”
아까부터 리버 플레이트가 신경 쓰는 라인은 디에고 로시가 있는 왼쪽이었다.
오늘 처음 출전하며 데이터가 전혀 없는 유지우는 그들의 경계 대상이 아니었다.
“디에고 마크!”
단 한 번의 플레이로 언제든 분위기를 바꾸는 재능.
디에고 로시는 청소년 국가대표에 단골로 발탁되며 아르헨티나 성인 국가대표의 관심도 받는 뛰어난 선수기에 리버 플레이트 U-20 감독도 디에고 로시를 최우선 위험인물로 판단하며 수비 전술을 구성했다.
‘백업이 빠르네.’
이 순간이라면 패스를 하면서 전진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유지우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돌파.’
이 사람들에게 가장 자신 있는 플레이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어딜!”
발바닥으로 볼을 끌며 발을 뻗는 선수의 다리를 절묘하게 피했다.
한 명을 제치고 나아가자 에두아르도 구아린이 막아섰다.
체격이 큰 그를 보며 유지우는 드리블을 하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휙.
디에고 로시 쪽이었다.
“디, 디에…!”
에두아르도 구아린이 디에고 로시에게 패스 갈 것을 염두에 두고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 유지우는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며 오른쪽으로 돌파했다.
‘아이 페인트.’
눈짓만으로 상대를 속이는 고난도 페인트 모션이었다.
“반칙으로 끊어!”
에두아르도 구아린마저 뚫리자 리버 플레이트 U-20 감독의 외침이 필드 전체를 울렸다.
수비수들은 반칙해서라도 거칠게 끊어내려고 했고 유지우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아르헨티나에 오기 전.
그토록 연마했던 ‘개인 기량’.
아르헨티나에 온 후.
업그레이드가 된 ‘개인 기량’.
땀을 흘린 노력이 필드 위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귓가에 들리는 수많은 함성과 몸을 짓누르는 중압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골대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촤-----악!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태클과 왼쪽에서 들어오는 태클, 발이 다소 높게 들린 걸로 봐선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겠다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거기서 유지우는 모두를 놀라게 할 플레이를 선보였다.
툭.
한 번의 터치에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선수를.
툭.
두 번째 터치에는 왼쪽에서 들어오는 선수를 제쳤다.
라 크로케타(La Croqueta), 일명 팬텀 드리블로 유명한 개인기로 두 명의 선수를 제쳐내자 관중석에서 사람들이 한두 명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설마…?
기대감이 그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라 크로케타에 이어서 최종 수비수를 마르세유턴으로 제치자 골대를 지키던 골키퍼가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툭.
유지우는 그 움직임을 보곤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 골키퍼의 키를 넘기는 로빙슛을 했다.
손을 쭉 뻗지만, 닿지 못해 경악으로 물드는 골키퍼의 표정.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듯 날아가는 볼의 궤적.
그것들만 봐도 골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유지우는 굳이 볼이 들어가는 걸 보지 않고 뒤로 돌았다.
철렁.
16세의 어린 선수가 보여준 폭발적인 플레이에 사람들은 말을 잃었고 몇 초의 정적 후.
-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푸른 바다에 금빛 파도가 몰아치듯 보카 주니어스 팬들의 함성이 경기장 전체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