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외계인-14화 (14/383)

제14화

삐익-! 삐이이이이익-!

리버 플레이트 U-20 선수들은 종료 휘슬이 울리자 거친 숨을 내뱉으며 필드에 드러누웠다.

에두아르도 구아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른팔로 얼굴을 가렸다.

“흐윽.”

울고 있었다.

내가 해줄 말은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면 그건 위로가 아닌 위선처럼 느껴질 테니까.

저벅.

저벅.

관중석으로 걸어가자 보카 주니어스의 금빛 물결은 리버 플레이트의 하얀 물결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지우!”

제자리에 서서 관중석을 보던 내게 디에고 로시가 달려와 어깨동무를 했고 기예르모 다린도 반대쪽으로 와 어깨동무를 했다.

“잘했다.”

무뚝뚝하긴.

“기예르모! 이럴 때는 더 칭찬해줘! 주장 완장 찬 손으로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유는 그런 걸 싫어한다.”

“나는 좋아하는데?”

“…네가 이상한 거다. 보통은 싫어하는 게 정상이다.”

디에고 로시가 유쾌하고 장난기가 많은 성격이라면 기예르모 다린은 무뚝뚝하고 다정한 성격이었다.

“고마워.”

“…….”

“……?”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두 사람은 떠들다 말고 두 눈이 커진 채 멍하니 쳐다봤다.

“……!”

나도 깜짝 놀랐다. 내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방금 뭐라고 했어?”

“아, 아무것도!”

“고마워라고 했다. 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내 귀가 이상하게 된 게 틀림없다.”

“이거 녹음해서 알림 소리로 해야 하니까 다시 한번만 해봐!”

“좀 꺼져!”

“아아아! 그러지 말고 한 번 더!”

두 사람을 피해 도망치려고 할 때, 로돌포 핀티 감독님이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레슬링 선수처럼 커다란 덩치라 숨이 막혔지만, 기뻐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밀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5년이 걸렸다.”

“…….”

“고맙다.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줘서.”

“기회 주셨으니 보답해드린 거뿐인데요. 뭘.”

태연하게 대답하자 감독님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보답이 해트트릭이냐?”

“그렇죠.”

“그러면 조금 더 기뻐해! 크리스마스 더비에서 해트트릭했으니까 좋든 싫든 팬들 뇌리에 네 이름을 새겨 넣은 거라고, 인마!”

해트트릭한 나보다 감독님이 더 흥분했다.

“아까 잘 웃더라?”

“그냥 좋아서요.”

“하긴 해트트릭 하고도 안 웃으면 그게 사람이냐? 로봇이지. 안 그래? 기예르모!”

“맞아요. 유는 감정 표현이 서툴러요.”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U-20에 처음 들어오고 석상이라고 불렸던 녀석은 다른 팀으로 갔나 보네?”

“크흠.”

“그건 그렇고, 어때? 큰 닭장은 아니지만, 작은 닭장을 불태운 기분은?”

디에고 로시는 험악한 표정으로 관중석을 빠져나가는 리버 플레이트 팬들을 보며 말했다.

그들은 힘들게 뛴 선수들에게 격려보다는 비난을 했다.

이게 더비 매치의 숙명이다.

패배하면 그 순간 역적이 되는 숙명.

반대로 승자는 영웅이 된다.

“최고지.”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

이 두 클럽은 연고지도 같을뿐더러 계층 간의 갈등도 품고 있었다.

노동자 계층의 보카 주니어스.

부유층의 리버 플레이트.

그렇기에 오늘 승리에 보카 주니어스 팬들이 미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프로가 아닌 유스 간의 대결이라도 엘 수페르클라시코를 이긴 거니까.

“이봐! 등번호 30번 꼬맹이! 너는 내가 딱 봐뒀다!”

“넌 무조건 보카랑 종신 맺어야 해! 당장 1군으로 올라와!”

관중들에게 인사를 다닐 때마다 관중들은 보카 주니어스와 종신 계약을 맺으라며 소리쳤다.

짝짝짝짝짝!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가던 중에 어느새 관중석 제일 앞까지 달려온 아버지가 보였다.

“아들!”

감독님이 갔다가 와도 된다고 해서 관중석 가까이 걸어갔다. 그러자 주위로 보카 주니어스 팬들이 몰려들었다.

“그 유니폼은 또 뭐예요.”

“장차 보카 주니어스 에이스가 될 우리 아들 유니폼이지!”

아버지는 뒤로 돌며 마킹된 내 이름까지 보여줬다.

“직접 사신 거예요?”

“그럼! 나중에 너 프로 데뷔전 할 때는 알리샤 가족들이랑 다 맞춰 입고 갈 거다.”

옆에는 알리샤 가족들도 있었다.

“재미있게 보셨어요?”

“아드님이 축구를 잘한다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요.”

“지난 5년… 진짜 힘들었거든요. 톱 팀도 계속해서 패배하고 U-20도 패배하니 팬들 불만도 점점 커지고.”

마르시오 아저씨는 지난 세월이 떠올랐는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조롱도 심했어요.”

“맞아요! 그놈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아저씨의 아들과 딸이 덩달아 이야기했다.

서서히 사람들이 몰리자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아까부터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던 손녀 마리아 페론이 손을 내밀었다.

“유니폼 주면 안 돼요?”

“응? 내 유니폼 달라고?”

끄덕.

“땀 묻어서 더러운데 내가 물어보고 새 유니폼으로 가져다줄게.”

절레절레.

“싫어?”

“새것은 싫어요, 오늘 경기에서 이긴 유니폼 받고 싶어요.”

6세 손녀의 말에 주변에서도 웃으며 바라봤다.

난 유니폼을 벗어서 건네줬다.

“처음이네.”

“뭐가요?”

“누가 내 유니폼 달라고 한 거.”

“저도 처음이에요. 누구한테 유니폼 달라고 한 거.”

“왜? 팔려고?”

“어떻게 알았어요? 나중에 오빠가 성공하면 첫 경기 유니폼이라면서 비싸게 팔아먹어야죠.”

마리아 페론의 말에 웃음이 났다.

아버지는 그런 내 웃음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 우리 아들이… 웃었어….”

“아버지, 저 가족들이랑 있을 때는 잘 웃잖아요.”

“그래도…. 경기장에서 웃은 건 1년도 넘었잖아.”

아버지는 축구를 하면서 웃는 나를 보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거다.

협회가 내린 징계가 부당하다며 재기한 재판에서도 패소하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으니 아버지의 속은 나보다 더 문드러졌겠지.

“아버지.”

“응?”

“아르헨티나에 같이 와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잘해주니 내가 더 고맙다. 사랑한다! 아들!”

이제 더는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즐겁게 축구 하자.

* * *

리버 플레이트 회장과 감독은 종료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얼굴을 찌푸리며 빠져나갔지만, 보카 주니어스 관계자들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재능은 진짜네요. 평균 나이 20세가 넘는 선수단을 상대로 해트트릭이라니.”

1군 감독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관중들과 인사를 하는 유지우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감독님은 유가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아직 한 경기이긴 하지만 꾸준히 저런 경기력만 유지된다면 기대할 만하죠.”

첫 경기에 이 정도 퍼포먼스라면 다음 경기도 기대가 됐다.

만약 이대로 잘만 자란다면 1군을 대표할 선수가 될 자질이 충분해 보였다.

“저 아이가 1군으로 올라올 날이 기대되는군요.”

“지킬 수 있다면요.”

“…아.”

엔리케 보토가 귓속말로 한 말에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보카 주니어스의 공격진은 노쇠화가 되어갔다.

재능 있는 젊은 선수들이 대거 유럽행을 결정하며 전력 유출이 심한 게 그 이유였다.

‘쳇.’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엔리케 보토 옆에서 무슨 보물을 발견한 눈빛의 라몬 카세레스 회장을 탐탁지 않게 봤다.

‘돈만 밝히는 귀신.’

보카 주니어스의 유능한 선수들을 팔며 곳간을 채운 건 모든 게 라몬 카세레스 회장의 결정이었다.

그 돈을 제대로 쓰면 좋은데, 정작 선수 보강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아 문제가 심각했다.

‘적어도 저 아이만큼은 지켜야 한다. 클럽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 * *

매년 크리스마스에 열리던 미니 엘 수페르클라시코는 5년 만에 보카 주니어스가 이기며 지역신문에 기사가 쏟아졌다.

【 보카 주니어스 U-20! 마침내 설욕에 성공하다! 】

【 3 - 1로 승리를 거둔 보카 주니어스, MVP는 한국에서 온 열여섯의 어린 선수! 】

【 로돌포 핀티, “뛰어난 재능의 선수, 훗날 보카 주니어스를 대표할 재목이다.” 】

이 소식은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보도됐다.

그리고 보카 주니어스 팬튜브 ‘We Are Boca!’에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이 올라오며 조회 수가 늘어갔다.

《 닭장을 불태우는 꼬마 》

이 제목이 달린 동영상을 본 사람들은 유지우에 대한 댓글을 달았다.

[쟤는 누구야? 제일 작은 녀석이 진짜 영상 제목처럼 닭장을 불태워 버리네.]

[아시아에서 데려온 녀석이라던데? 재능이 그냥 미쳤어.]

[직관한 사람들이 부럽다.]

[10분 52초에 나온 리버 플레이트 팬들 표정 봐라.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다음 시즌에는 반드시 닭대가리 놈들보다 높은 성적을 거둬야 해!]

더비전이 끝나고 다음 날.

거친 경기 뒤라 회복 훈련 일정이 잡혀 있는데 감독의 호출로 선수들이 모였다.

“어제 경기는 다들 수고했다. 고쳐야 할 점도 많았지만, 그만큼 나아진 점도 많은 경기였다.”

활약한 공격진들은 밝은 표정을.

실수한 수비진들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보다 너희들이 뭘 잘못했는지 더 잘 알 거다. 만약 모른다면 그냥 멍청이들이겠지.”

감독은 어제 경기에 관한 이야기를 아끼지 않았다.

선수들이 어제의 경험으로 조금 더 보는 눈이 넓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쓴소리였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건 중요한 결정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중요한 결정이라면 단 하나였다.

“1월 5일부로 2군으로 올라갈 선수들은 전에 말했듯이 니자레노와 디에고 로시, 두 사람이다.”

2군행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

“네!”

모든 선수가 이미 예상한 부분이라 두 선수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언젠가 1군에서 다시 만나자면서.

“유, 실망했나?”

감독님은 따로 떨어져 있던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니요.”

“크리스마스 더비를 보고서 내부적으로 너를 2군으로 올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긴 했는데 아직 보여준 게 많이 없어서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다.”

당연한 거였다.

클럽에 합류한 지 이제 한 달 조금 넘은 선수니까.

“그래서 네가 쿨라우수라 기간에 좋은 성과만 보여준다면 7월에 2군으로 합류시킨다는 조건이 붙었다.”

“…….”

“그러니 잘해. 잘만 하면 17세에 이 세상에서 제일 뜨거운 라 봄보네라의 열기를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보카 주니어스의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알베르토 J. 아르만도(Estadio Alberto J. Armando), 애칭인 라 봄보네라(La Bombonera) 라고 불리며 아르헨티나 축구의 성지와도 같은 곳.

어제 그 열기를 현장에서 만끽하고 싶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일은 뭐 하나? 연말인데 가족들이랑 보내나?”

“네, 앞집 알리샤 아주머니의 가족들과 바비큐 파티하기로 했어요.”

“그거 좋군!”

“오실래요?”

“응? 내가 가도 되나?”

“몇 명 늘어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저희 아버지 셰프라 요리도 잘하시거든요.”

“그거 기대되네. 가족들이랑 같이 가도 될까?”

“물론이죠.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예요.”

감독님과 하는 말소리가 컸는지 디에고 로시와 기예르모 다린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 나도!”

“나도 가도 될까?”

…갑자기 손님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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