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그 애가 아르헨티나로 갔다고?”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실에선 박우근이 업무를 보다가 유지우의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네, 지난 10월 말에 아르헨티나로 떠났다고 합니다.”
“보카 주니어스가 이렇게 빠르게 계약을 진행할 줄이야.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군.”
“재능을 알아본 거죠.”
“하아…. 좋게 보면 그 애한테는 나은 선택일 수도 있겠어.”
비서는 박우근에게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지?”
“보카 주니어스에 있는 한국 직원이 보내준 영상입니다.”
대한축구협회는 보카 주니어스와 협약을 맺고 교류하는 사이라 현지에 축구협회 직원이 파견 나가 있었다.
스윽.
박우근은 태블릿 PC를 받아서 영상을 틀었다.
‘미니 엘 수페르클라시코.’
유지우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날아오르는 영상이었다.
“진짜 재능이군… 아르헨티나가 눈독을 들이지 않으면 좋을 텐데.”
“예? 그게 무슨….”
“귀화.”
비서는 박우근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진짜 재능을 알아주는 국가에 마음이 갈 수도 있는 일이겠지.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하는데….”
유지우.
너무나 어린 선수다.
그렇기에 이 선수를 평가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일 터다.
하나 레전드인 박우근에게는 선수를 보는 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감은, 박우근에게 강렬히 말하고 있었다.
이 선수는, 앞으로 대성할 게 분명하다고.
“안 되겠다.”
“네?”
“부협회장님은 어디 있지?”
.
.
.
“그래서요?”
박우근은 부협회장 차성인을 찾아서 유지우의 영상을 보여줬다.
축구인이 아니더라도 한눈에 보면 엄청난 재능인 걸 알 텐데 차성인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어릴 때 반짝이는 재능은 많습니다. 김우수와 최인호, 두 선수도 그 나이에 그만큼 했습니다.”
앞서 말한 두 선수는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로 유스 때는 다들 한가락 했었다.
“대체 왜 이렇게 야박하신 겁니까? 아직 어린 선수지 않습니까.”
유독 유지우에게만 엄격하게 대했다.
“어린 선수들의 실수는 충분히 눈을 감아줄 수 있습니다.”
“…….”
“하지만 감독 폭행은 다르죠.”
“…….”
“그건 엄연히 협회의 얼굴에 먹칠한 행동입니다.”
박우근이 말을 하기 전에 차성인은 손을 뻗어 말을 막았다.
“이사님의 말씀이 어떤 건지는 잘 압니다. 그래서 내년에 있을 U-17 월드컵 엔트리에 뽑을 생각이에요.”
“…언제 하신 생각입니까?”
“지금입니다.”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열리는 대회에서만 우승컵이 있지, 세계 무대에선 우승컵이 단 하나도 없었다.
많은 투자를 하며 국제 대회 우승컵을 가져오기 위해 필사적이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연도에 있을 U-17 북중미 월드컵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하아.’
박우근은 차성인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실력은 있지만,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하고만 관계를 맺는 사람.
‘달라지던 협회도 이 사람이 오고 나선 옛날로 다시 돌아갔군.’
* * *
2028년 12월 31일.
아르헨티나에서 보내는 첫 연말은 한국에서 보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여러 사람이 모여 같이 식사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오후부터 우리 집 마당에서는 파티 준비로 바빴다.
“마르코스! 이거 테이블에 가져다 놔.”
“엠파나다네요. 어머니가 만드셨어요?”
“알리샤의 엠파나다는 최고지. 마르코! 집에 가서 접시 좀 더 가져오렴.”
아버지가 요리하고 알리샤 아주머니가 보조, 그리고 마르시오 아저씨가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며 파티를 준비했다.
“오빠!”
“응?”
“이거 먹어봐요!”
그리고 내 역할은 어린 마리아를 돌보는 거였다.
“돌아다니지 말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어.”
“힝.”
“애교 부려도 소용없어.”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자주 보니 서서히 대화도 늘어갔고 지금은 그저 귀여운 여동생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어른들보단 순수한 애들과 있는 게 마음이 더 편하기도 했고.
“내가 준 유니폼은 어떻게 했어?”
“아빠한테 액자 만들어 달라고 해서 거기에 넣어놨어요!”
“잘 보관해, 나중에 엄청나게 비싸질 거니까.”
마리아와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스무 명은 앉아도 거뜬한 긴 테이블에 음식이 쌓여갔다.
마리아가 슬쩍 손을 뻗어 엠파나다를 먹으려는 걸 말렸다.
“아직.”
“…네.”
입술을 쭉 내민 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얌전히 기다리면 이따가 초콜릿 줄게.”
“진짜죠?”
그때 벨이 울리며 손님이 도착했다.
대문을 열자 로돌포 핀티 감독님이 커다란 선물을 들고 서 있었다.
“오셨어요?”
“오! 집이 깔끔하군!”
“들어오세요.”
집을 보는 것도 잠시, 음식을 가지고 나오는 아버지를 본 감독님은 성큼성큼 그쪽으로 갔다.
“이제야 유의 아버님을 뵙는군요. 보카 주니어스 U-20 감독 로돌포 핀티입니다.”
감독님은 사 온 선물을 내밀며 아버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한우 유입니다. 아르헨티나 이름은 페드로 유! 페드로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셰프라고 들었는데 식당은 어디서 하시나요?”
“리아추엘라 강 인근에 있습니다. 가게 이름은 ‘Joy of taste’인데 가족분들이랑 한번 놀러 오세요.”
“다음 주에 아내하고 꼭 가겠습니다!”
그리고 10분 뒤, 대문이 열리며 품에 선물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는 두 녀석, 디에고 로시와 기예르모 다린이었다.
“왔냐?”
“오오오오! 유의 집 엄청나잖아!”
“그러게, 새로 지은 건가?”
“우리 집은 다 쓰러져 가는데!”
“이번에 이사 갔다고 하지 않았어?”
“빚쟁이들 때문에 도망치듯이 이사한 거야.”
“아, 미안.”
“옛날에는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다 갚을 거니까.”
디에고의 부모님은 공장직 근로자였고 디에고는 1남 4녀 중 막내였다.
집에 빚도 많아서 누나들도 이른 나이에 돈을 벌려고 취업하는 상황이라 유복한 집은 아니었다.
집안을 일으키려면 프로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는 녀석이라 그런지 더 정이 갔다.
“이 아이는 누구? 너 동생?”
디에고 로시는 무릎을 굽혀 마리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앞집 동생.”
“안녕? 이쁘게 생겼네.”
“디에고 선수 맞죠! 이번에 2군으로 올라갈 예정인!”
“오! 날 알아?”
“그럼요. 저도 보카 주니어스 팬인걸요.”
“이거 영광인데?”
마리아와 하이파이브까지 하며 노는 디에고와 달리 기예르모는 거리를 뒀다.
흠칫.
아이를 대하는 게 어색해서 그런 거 같다.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앉아서 먹자. 우리 아버지 요리 솜씨 좋아.”
이렇게 올 손님들이 다 왔다.
우리 가족 두 명.
앞집 알리샤 아주머니댁 열두 명.
감독님과 기예르모, 디에고까지 총 열일곱 명이 우리 집 마당에 모였다.
여러 종류의 음식과 술이 놓인 테이블에 쭉 둘러앉으니 연말 파티 분위기가 났다.
“먹기 전에!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초대해주신 사장님께서 한마디 해주시죠.”
마르시오 아저씨의 말에 아버지는 샴페인 잔을 들고 일어났다.
“하하, 이거 쑥스럽네요! 아르헨티나에서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된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인 거 같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리고, 다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보카 주니어스의 우승을 위하여!”
그 말을 시작으로 파티가 시작됐다.
디에고는 아버지가 만든 감바스를 한 입 먹더니 눈이 커졌다.
“뭐지? 빵이 새우와 어우러지며 녹아서 사라졌어.”
“우리 엄마가 해주신 것보다 더 맛있다.”
“…그동안 내가 먹은 건 감바스가 아니라 새우빵이었나.”
두 녀석이 오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알리샤 아주머니의 가족들도 다들 놀란 눈빛으로 아버지를 봤다.
다 같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중에 디에고 로시는 허겁지겁 먹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님! 이거 포장 가능합니까! 저희 부모님도 드시게 하고 싶습니다!”
“당연하지! 이따가 갈 때, 따뜻하게 포장해주마.”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리고 나중에 부모님 모시고 여기로 와라. 너도!”
아버지는 디에고 로시와 기예르모 다린에게 식당 명함을 줬다.
“우리 아들 친구들은 특별히 무료다.”
“에이! 어떻게 무료로 먹겠습니까!”
그래도 정도는 아는 녀석이었다.
“음, 그러면 이렇게 하자.”
“예?”
“너희들이 우리 아들 골 넣는 데 어시스트 하나 해줄 때마다 식당 이용 쿠폰 한 장씩 줄게.”
“…….”
“가족 동반으로.”
곰곰이 생각하던 디에고는 아버지가 내민 주먹에 자기 주먹을 맞댔다.
“좋은 딜이네요.”
“그렇지?”
“그러면 제가 먼저 받겠군요.”
“응?”
“저는 2군으로 안 올라가고 유랑 같이 U-20에 남으니까요.”
“으아아아아! 기예르모만 치사해! 감독님! 얼른 유를 2군으로 올려요!”
디에고가 감독님의 팔을 잡고 흔들자 감독님은 포크를 잡는 손을 바꿔 잡곤 음식을 먹었다.
“내 권한 밖의 일이야.”
“아아아! 나만! 왜 나만 올라가는 건데요!”
즐거운 분위기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한 사람이 없다는 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지우 선수, 한국에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일주일 정도 다녀올게요! 제가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으세요!’
매일 근처에 있던 사람이 없어지니 빈자리가 느껴졌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사람들이 하는 대화를 엿들었는데 묘한 재미가 있었다.
“유는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그러던 중에 술을 조금 마신 로돌포 핀티 감독이 물었다.
“그건 저도 궁금하긴 했어요.”
알리샤 아주머니도.
“물어보진 못했지만.”
마르시오 아저씨도.
“한국 기사로는 감독 폭행이라고만 나와서 내막을 몰라요.”
디에고 로시와 기예르모도 모두가 궁금한 내 이야기와 관련된 질문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봤다.
“말해도 돼?”
여기 모인 사람들은 조금이지만 마음을 연 사람들이라 굳이 숨기고 싶진 않았다.
끄덕.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었다.
“저는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래라.”
굳이 들을 필요는 없었다.
들어봤자 기분만 나쁠 이야기들이니까.
* * *
“돈이 없으면 출전을 하지 못하는 곳, 학교도 이름이 알려진 명문이 아니라 모든 게 폐쇄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도?”
“아니요. 경기에서 이기려면 아들이 나가는 편이 도움이 되니까 금품을 요구하진 않았습니다.”
어느덧 사람들은 음식을 먹던 손을 멈출 정도로 이야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돈이 없고 가난한 아들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주 집에 와서 밥을 먹을 만큼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죠.”
“…….”
“그 아이는 출전하고 싶어도 줄 돈이 없었고 감독이 상담을 명목으로 그 친구의 엄마를 불러 손을 댄 겁니다. 성희롱을 한 거죠.”
다들 말을 잃었다.
“그때 제 아들이 그걸 보고 바닥에 있던 소화기를 들고서 감독을 폭행한 겁니다. 친구 엄마를 구하기 위해서요.”
“아니, 그런 사실이 안 밝혀졌습니까?”
유한우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향과 달콤한 향이 동시에 느껴졌다.
“관계자들은 제대로 된 진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제 아들에게만 징계를 내렸죠.”
“아,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증거인 CCTV는 하필 그날 수리 중이라 영상이 없다고 했고 유일한 증인인 그 친한 친구와 부모가 감독의 편을 들어 줬거든요.”
“감독이 저지른 비리는요?”
“축구부 전원이 그런 일이 없었다는 탄원서를 내면서 조사가 되지도 않았어요.”
쾅!
로돌포 핀티는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이 더 분해했다.
“재판에서 부당함을 얘기했지만, 그 감독이 가진 인맥이 워낙 강해서 결국 패소하고 출전 정지 처분을 받게 된 거예요.”
“…….”
“분했습니다. 어떻게든 아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어서 주변에 도움을 구해도 다 외면만 했죠. 한국에서는 진실보다 진실을 감추는 힘이 더 위력이 있거든요.”
축구의 나라에선 꿈도 꾸지 못할 부조리.
실력만 있으면 인정받는 이곳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
“지우가 감정 표현도 서투른 겁니다.”
왜 유지우가 그동안 웃지도 않고 차가웠는지 깨달은 사람들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잘 웃고 사람들에게 친절한 아이였는데 그 사건으로 모든 게 달라졌죠.”
사건이 일어나기 전 아들의 밝은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유한우는 애꿎은 와인만 계속해서 들이켰고 사람들에게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러니 지우가 갑자기 차가운 행동을 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사람을 믿는 게 아직은 어려운 아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