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축구협회 직원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유지우 선수!”
집이 아닌 훈련장까지 와서 계속 국가대표 차출에 응해달라며 설득을 했다.
“제발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말씀드렸잖아요. 눈이 뻐근해서 팀에 피해만 준다니까요.”
하지만 축구협회 직원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이렇게 찾아오기 전에 U-20이 뛰는 경기를 직관하며 유지우의 수준이 어떤 수준인지 파악한 후였다.
‘…거짓말이다. 그냥 협회가 싫은 거겠지.’
유지우가 합류하지 않는 이상은 이대로 부협회장에게 죽어날 거라는 걸 알기에 직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차명훈이 막아줬지만, 오늘따라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지우 선수,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
차명훈은 지금껏 나에게 보여준 부드러운 분위기가 아닌 정말 열 받은 사람의 표정으로 변했다.
하긴 처음 만나고 난 뒤로 거의 사흘 연속으로 찾아오는 건 심했지.
차명훈은 한 발짝 나서더니, 직원들을 향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자, 협회분들. 여기 핸드폰 번호들 보이시죠?”
“그게… 무슨 번호입니까?”
“위쪽은 변호사, 아래쪽은 기자들 번호입니다. 여기까지 찾아와주셨으니, 선택권은 드리려고요. 사생활 침해로 고소를 당하시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공론화해서 인터넷이 뜨거워지면 좋겠습니까?”
“…….”
“이것들도 아니면 그냥 조용히 가시던 길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며칠 후.
축구협회 직원들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지우 선수, 오늘은 어쩐 일로 식당에 가세요?”
오늘 훈련이 끝나고 차명훈의 차를 타고 가는 곳은 집이 아닌 아버지 식당이었다.
“알리샤 아주머니가 가족들이랑 급한 일이 생겨서 저녁은 아버지 식당에서 해결하려고요.”
“그렇군요.”
“에이전트님도 드시고 가세요.”
“진짜입니까?”
“아버지가 준비해 놨다고 같이 오라고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차를 타고 도착한 아버지의 식당.
안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들어가자 홀에서 서빙을 하던 사람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유!”
처음 아버지 식당에 왔을 때 봤던 아르바이트생 줄리아 누나였다.
“아버지는요?”
“으~~ 딱딱해. 그러지 말고 누나처럼 대하라니까?”
“…나중에요.”
“그러지 말고!”
줄리아는 자리를 안내해 주면서도 재잘재잘 떠들었다.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금방 사장님 모시고 나올게.”
금발의 활기찬 미녀, 딱 이 단어가 알맞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가게를 찾는 사람 중에는 줄리아의 미소를 보려고 오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 아버지한테 들었었다.
“우리 아들 왔어? 에이전트님도 어서 오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
차명훈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편하게 앉아 계세요. 제가 삼겹살이랑 김치를 볶았거든요.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오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조합이네요!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말렸지만, 차명훈은 겉옷을 벗고 서빙을 도와줬다. 그리고 나도 일어나려고 하자.
“지우 선수는 앉아 계세요! 지우 선수 몫까지 제가 다 할 테니까요! 하하하하하하.”
그 말에 난 가만히 앉아서 느긋하게 식당 안을 둘러봤다.
‘장사가 잘되네.’
몇몇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한인분들인가?’
생김새는 아르헨티나인이 아닌 한국인처럼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가족들과 앉아 있던 남자가 내가 앉은 테이블로 걸어왔다.
“유지우 선수 맞죠?”
“아…. 네.”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초면인 사람을 만나면 몸이 굳어졌다.
“이거 반갑습니다! 확실히 사장님 닮으셔서 인물이 훤하시네!”
“…감사합니다.”
“저는 한인회 회장 만두식입니다. 유지우 선수 아버님이랑은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한인 사회가 잘 구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국 출신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돕고 살았고 아버지 가게에도 한인분들이 많이 찾아왔다.
저렴한 가격에 고급스러운 맛.
입소문을 타면서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
“아버지, 한인회셨어요?”
주방에서 음식을 가지고 나오던 아버지에게 묻자 아버지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나? 한인회 총무 맡았다!”
…언제 또 그런 걸 맡으셨데.
“아, 그리고 조만간 한인회 가족들 다 모여서 너 경기 보러 갈 거야. 이미 티까지 다 맞췄다!”
티를 맞췄다고 하자 한인회장님이 밝은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거죠?”
“네! 단체 주문해서 다음 주 금요일에 도착한다고 하니까 제가 금요일 저녁때, 한인회로 가져갈게요.”
“그러면 회비 걷은 걸로 아이들 유니폼을 더 준비할까요? 그걸로 기념품도 사주고요.”
“좋습니다! 그리고 플래카드 디자인으로 이건 어떠세요?”
“디자인이 예쁘네요. 그런데 다다음 주에 있는 경기에 맞춰서 가져가려면 좀 빠듯하겠네요.”
“내일 바로 주문을 넣으려고요.”
두 분이 태블릿 PC를 보며 떠들고 있을 때, 음식을 서빙하던 줄리아가 다가왔다.
“뭐 하세요?”
“다다음 주에 있을 지우 경기에 가져갈 유니폼이랑 이것저것 맞추는 중이다.”
“U-20 다다음 주면 산 로렌소 유스랑 붙는 거죠?”
“어!”
“어어어어! 저도 데리고 가주시면 안 돼요? 그 경기만 이기면 쿨라우수라 우승 확정이잖아요! 자그마치 6년 만에!”
줄리아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말하자 다른 직원들도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자 아버지가 중대 발표를 했다.
“좋아! 다다음 주 목요일은 전체 휴무! 다 같이 경기 보러 가는 거다! 비용은 전액 사장 부담!”
- 와아아아아아아아!
“싸장님! 사랭해유!”
“우리 사장님이 최고시다! 그냥 하늘에서 내려온 귀인이셔!”
“뭣들 하고 있어! 사장님 헹가래 안 쳐주고!”
홀에서 서빙과 카운터를 보던 네 명의 직원 말고도 주방에서 요리 보조를 하던 여섯 명의 직원도 무슨 로또를 맞은 것처럼 기뻐했다.
아직 프로 데뷔도 안 해서 오버라고 느끼긴 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활짝.
아버지가 밝게 웃는 걸 보는 건 썩 나쁘지 않았으니까.
* * *
보카 주니어스는 33전 17승 7무 9패로 리그 4위에 올라 있었다.
< 전반기 1위의 보카 주니어스, 충격의 4위! >
< 보카 주니어스의 부진, 그 원인은? >
아르헨티나 유력 스포츠 일간지 ‘사커 매거진(Soccer Magazine)’에서는 이 부분을 다뤄 기사를 냈다.
[ 작년 보카 주니어스의 부진의 이유로 전문가들은 여러 문제 가운데 ‘주전 선수들의 노쇠화’를 꼽았다. 후보 선수 중, 주전 선수들을 대체할 자원이 부족해 보카 주니어스는 전반기 1위를 달리고 있다가 주전 선수들의 부진으로 인해 후반기에 4위로 곤두박질을 쳤다. 이 사태를 분석한 전문가들은 해결 방안으로 한 가지를 뽑았다.
‘전력 보강.’
주전 선수들을 받쳐줄 젊은 자원들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입 모아 말했다. 이에 유력 보카 주니어스 담당자는….]
이런 부진 속에서 유망주들의 활약이 나날이 이어지자 구단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디에고는 바로 1군에 올리는 게 나아.”
잠시 1부 리그 스케줄의 여유가 생기자 대회의실에선 수뇌부들이 모여 주목받는 유망주들을 분석했다.
“디에고는 이미 3부 레벨을 넘어섰으니까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다만 체력이 약해.”
“그래도 스피드랑 바디 밸런스는 좋아서 몸싸움에서 쉽게 밀리진 않아. 개인기도 좋고.”
현재 부진을 겪는 1군에 필요한 것은 분위기를 바꿔줄 새로운 전력이었다. 그래서 디에고 로시를 1군으로 올릴까 말까 회의를 이어갔다.
“기예르모는? 32골로 유스 리그 득점 1위야.”
“이 정도 득점력이면 2군에서 잠깐 상황을 보고 바로 1군으로 올려도 될 거 같은데?”
“제공권이랑 골 결정력이 좋아서 1군으로 올라가면 골잡이 역할을 맡아줄 수 있는 선수긴 하네요.”
그리고 이어지는 선수의 프로필은 유지우였다.
“유는 어때?”
현 보카 주니어스 팬들이 기대하는 유망주 5인 가운데 5위로 뽑혀 많은 주목을 받는 유지우의 경기 영상이 나오자 감탄 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화려한 드리블에 득점력까지, 영상만 봐도 이미 유스 레벨을 넘어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그렇다고 당장 1군으로 올리기에는 패스나 몸싸움이 부족해.”
“그리고 나이, 나이가 너무 어려.”
열여섯의 나이.
프로 무대에서 뛰기엔 너무 어렸다.
아직 안전하게 키워야 한다는 말이 많이 나올 때,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내내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나?”
세바스티안 란첼라, 1군 감독이 침묵에 빠져 있다가 말하자 회의장은 일순간 침묵에 휩싸였다.
“우리가 연령대별 팀을 운영하는 이유는 결국 1군에 써먹을 선수를 키우기 위해서잖아? 열여섯이든 열 살이든 능력만 된다면 1군에서 쓰면 돼.”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능력 중심주의 사상을 가진 감독이었다.
‘축구 선수는 축구만 잘하면 된다.’
평소에도 이 말을 달고 사는 감독이라 선수가 어떤 국적이든 어떤 나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유소년 총괄 단장 후안 몬테로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긴 하지만 어린 선수의 안정적인 성장은 필수적입니다. 유는 아직 작은 체구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성장할 겁니다.”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기회를 주고 싶어 했고 후안 몬테로는 시기상조라며 대치했다.
“감독님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적어도 내년까지는 성장을 지켜봐야 한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후안 몬테로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어린 선수를 급하게 1군으로 올렸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망가질 우려가 있으니 1부 리그의 풍파를 더 견딜 수 있도록 성장시키는 게 먼저라고 여겼다.
“열여섯의 나이.”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들었다.
거기엔 유지우의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그 나이에 디에고 마라도나와 리오넬 메시는 프로 데뷔를 했습니다.”
세바스티안 란첼라의 말에 수뇌부들은 깜짝 놀랐다.
그중에서 30대 스태프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한국 선수를 디에고, 리오넬과 비교하는 겁니까?”
“적어도 디에고와 비슷한 스타일이라고는 할 수 있지.”
“디에고는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상징을 아시아 선수와 비교하는 건!”
디에고 마라도나라는 이름은 아르헨티나인에겐 곧 축구였다.
그런 그들을 아직 무명에 가까운 아시아 선수와 비교한다는 건 기분이 상하는 게 당연했다.
“국적이 문제가 됩니까?”
하지만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물러서지 않고 수뇌부들을 바라봤다.
“축구를 발이 아닌 국적으로 하는 곳도 있나요?”
그 말에.
“…….”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자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여겨도 되나요?”
침묵에 휩싸인 이들을 보며 수석코치인 알베르토 바렐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역시 우리 감독님은 말로는 못 당한다니까.”
그러나 후안 몬테로는 침묵 속에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쾅.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후안 몬테로의 행동에 차가운 냉기가 회의장을 감돌았다.
금방이라도 충돌할 것 같은 분위기.
당사자인 세바스티안 란첼라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7월에 2군.”
“…….”
“그리고 성과가 좋으면 내년에 1군.”
“…….”
“어떻습니까?”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유지우의 ‘국적’이 아닌 ‘실력’만 봤다.
그 결과, 1군에 어울리는 선수라고 결론을 내렸고 상석에서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
모든 결정 권한을 가진 엔리케 보토였다.
“두 분의 말씀 모두 맞습니다. 후안 단장의 말대로 안정적으로 키우는 것도 방법이고 세바스티안 감독의 말처럼 기회를 주는 것도 맞는 방법이죠.”
엔리케 보토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입을 열자 회의실에 있던 수뇌부들이 일제히 엔리케 보토를 봤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제안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제안이죠?”
엔리케 보토는 하얀 잔에 든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말했다.
“디에고를 1군으로 올리는 건 잠시 보류하죠.”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어째서죠?”
“2군에서 디에고 로시, 기예르모 다린, 그리고 지우 유까지…. 이 세 선수의 합을 보고 결정하고 싶습니다.”
세 선수가 합을 맞춘 거라곤 미니 엘 수페르클라시코 단 한 경기뿐이었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미래에 보카 주니어스를 이끌어갈 3인방의 호흡이 프로 무대에서도 통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