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그날 저녁, 아버지와 같이 미니스트로 피스타리니 국제공항으로 갔다.
“우리 아드으으으을!”
“내 동새애애애애앵!”
오늘은 어머니와 누나가 아르헨티나로 오는 날이었다.
게이트를 나온 두 사람은 나를 보더니 달려와 양쪽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아들! 왜 이렇게 말랐어? 누가 괴롭히기라도 해?”
“아빠가 밥 안 줘?”
“내가 얼마나 잘 챙겨주는데! 그리고 난 안 보여? 아들만 보이고 나는? 나는!”
반년 넘도록 전화만 하고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 더 애틋했다.
어머니랑 누나는 내 옆에 찰싹 붙어서 이것저것 물어봤고 우리 가족은 공항을 빠져나와 아버지의 차에 올라탔다.
“오~ 차도 있어?”
“당연하지! 오빠 차 뽑았다! 널 데리러 가~.”
“오빠는 개뿔.”
“…출발한다.”
“고고고고! 아르헨티나는 처음이라 되게 떨린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서 그런지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식당은 어때요? 손님 많아요?”
누나는 요리사답게 아버지에게 식당에 관해 물었고.
“아들! 경기 끝나면 여기 가볼까?”
어머니는 아르헨티나 관광지를 찾아보며 돌아다닐 루트를 골랐다.
내일 경기가 끝나면 나에게도 한 달 정도 휴식이 주어지니 온전히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아, 맞다. 너 14경기 출전해서 26골 5어시 했다며?”
“응.”
“이제 1군으로 올라가는 거야?”
“아직은 아닐걸?”
누나랑 얘기하는데 조수석에 있던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봤다.
“우리 아들 실력이라면 바로 1군으로 올려야지, 눈이 삔 거 아니야?”
어느새 다시 축구 얘기로 돌아왔다.
1군으로 올라가는 게 빠르면 좋겠지만, 조급하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아들! 보카도 좋지만, 언젠가 유럽도 갈 거지?”
“아직은 모르겠어요. 그래도 가게 되면 가겠죠?”
“만약 가게 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말했다.
“맨유로 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은 맨유의 광팬이다.
집 곳곳에 맨유 굿즈가 있으니 말 다 했지 뭐.
“퇴물인 맹구 따위! 가려면 프리미어 리그의 지배자 맨시티지!”
그리고 누나는 맨시티의 광팬.
“짭시티가 어딜 껴!”
“과거 영광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맹구보단 낫죠.”
“빅이어도 없는 것들이.”
“우, 우리도 생길 거거든요!”
“생기긴! 20-21, 24-25시즌에 결승 한 번 올라가고 그 뒤로는 챔스 4강딱 주제에!”
“흐아아아아앙! 지우야! 네가 맨시티 가서 빅이어 좀!”
“우리 아들은 맨유 재건하러 가야 해서 바빠!”
“이미 다 망가진 집을 뭘 재건해요! 사망 선고 떨어진 지 꽤 됐잖아요.”
“아직 안 죽었어! 우리 아들만 가면 심폐 소생 가능해!”
“지우야! 다 죽은 클럽 말고 재정 빵빵하고 리그 챔피언을 밥 먹듯이 하는 클럽이 좋지 않겠어?”
“아들~ 챔피언스 리그 우승도 못 해본 근본 없는 클럽보다는 우승 경험이 있는 클럽이 낫겠지?”
…전부터 생각했지만, 우리 집 진짜 혼란하구나.
* * *
아르헨티나 주니어컵(Argentina Junior Cup.).
유스컵 대회라 프로 경기만큼 관심이 크진 않았다.
그래도 축구를 사랑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축제였다.
“이번 경기는 엘 모누멘탈에서 하는 거지?”
“응, 보카 꼬맹이들한테는 아쉽게 됐어. 많고 많은 구장 중에 하필 리버 플레이트의 홈구장이 걸리다니.”
경기장은 아르헨티나 축구협회가 양 클럽 관계자들의 참관하에 뽑기로 정했고 리버 플레이트의 홈구장 ‘엘 모누멘탈(El Monumental)’이 뽑혔다. 그래서 전문가 중 열에 아홉은 리버 플레이트 U-20이 승리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참가하는 팀의 경기장은 빼야 하지 않냐?”
“이렇게 뽑힌 거 이번이 처음이잖아. 협회도 당황스러울걸?”
7만 명을 채울 수 있는 관중석.
엘 모누멘탈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경기장으로 쓸 정도로 아르헨티나에서 제일 큰 구장이었다.
필드 근처에는 아르헨티나 각지로 송출하기 위한 중계 카메라들도 빼곡하게 채워졌다.
“Argentina Junior Cup에서 두 클럽이 붙는 건 오랜만이지?”
“6년만.”
“어디가 이길까? 보니까 보카 주니어스 꼬맹이들도 장난 아니던데.”
양 클럽 팬들만이 아니라 다른 클럽의 팬들도 찾아올 만큼 규모가 컸다.
그도 그럴 게 크리스마스 더비 이후에 성사된 미니 엘 수페르클라시코라 더 그랬다.
“리버 꼬맹이들이 이기지 않을까?”
“하긴 홈 버프는 무시 못 하지. 오죽하면 전문가들이 보카 주니어스 U-20이 이길 확률을 3%라고 봤겠어?”
홈과 어웨이의 차이는 컸다.
더구나 경험이 적은 유소년들에게는 이런 환경이 크게 좌우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꼬맹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지.’
하얀 물결을 일으키는 리버 플레이트 팬들의 비중은 절반이 넘어갔다.
그와 반대로 보카 주니어스 팬들의 비중은 달걀의 노른자처럼 적었다.
그 시각.
보카 주니어스 U-20 라커룸 안.
워밍업을 마치고 들어온 선수들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후우.”
가뜩이나 내성적인 성격의 라우타로 오르반은 다리를 떨며 불안해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아?”
옆 라커함에서 축구화 끈을 묶으며 태연하게 있던 유지우는 말을 듣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응.”
“왜?”
“그야 아무렇지 않으니까?”
라커룸 안으로 로돌포 핀티가 들어오자 선수들은 조용해졌고 뒤이어 들어온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엔리케 보토다.’
1군 단장이 온 거였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하시면 됩니다.”
엔리케 보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로돌포 핀티가 말을 시작했다.
“표정을 보니 겁먹은 거 같군.”
- “아닙니다!”
“아니긴 표정에 다 드러난다. 이놈들아! 하하하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표정.
로돌포 핀티는 단번에 꿰뚫어 봤다.
“짧게 한마디 하마.”
로돌포 핀티는 선수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꺼냈다.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것을 잡는 것은 소수에게만 주어진다.”
선수들은 집중했다.
“그러면 기회를 잡는 것은 어떤 놈들이라고 보는가?”
자신을 보는 유소년들을 보며 검지를 폈다.
“준비된 놈.”
기회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눈앞에 온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기회를 잡는 것은 결국,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 준비가 된 자들뿐이었다.
“너희들은 그 환상적인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됐나?”
- 네!
“그렇다면 겁쟁이들처럼 굴지 말고! 보카의 유니폼을 입은 전사답게! 상대를 쳐부수고 당당하게 눈앞에 온 기회를 잡아라!”
- 네!
“1군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올라가고 싶다면!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너희들의 가치를 증명해라!”
그 말을 들은 선수들은 긴장은 사라졌고 눈에는 투지가 가득해졌다.
로돌포 핀티는 단숨에 분위기가 바뀐 선수들을 보곤 웃었다.
“단장님?”
“예.”
“한마디 하시죠.”
로돌포 핀티는 엔리케 보토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내가 할 말은 감독님이 다 해주신 거 같고.”
선수들에게 해줄 말은 크게 없었다. 이미 로돌포 핀티의 말에 눈앞의 선수들은 전사들로 변해 있었으니까.
“너희들이 그동안 흘린 땀에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보여줘라.”
입 밖으로 나온 건 짧고 담백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나면 엔리케 보토가 아니었다.
“그리고 저녁은 리버 플레이트라는 이름을 한 닭을 튀긴! 치킨 파티를 즐기자!”
- 예!
시간이 지나 선수들은 라커룸 밖으로 나갔고 통로에 서서 입장을 기다렸다.
“유.”
“응?”
“평소랑 분위기가 다르다.”
“그래 보여?”
“응, 평소에는 통로에서 가만히 있었는데 지금은 계속 발을 꼼지락거린다.”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거든.”
“그게 뭔데?”
“우리 어머니랑 누나가 와 있어.”
유한우 혼자 보러 온 경기는 많았지만, 가족들이 다 같이 첫 직관을 하는 건 오늘 경기가 처음이었다.
‘절대 지기 싫어.’
온 가족이 모여서 보는 첫 경기.
그렇기에 더 지기 싫었다.
* * *
- 영원하라, 리버!
- 승리하라, 리버!
- 아르헨티나 최강의 리버!
- 승리의 횃불로 보카를 불태워 버려라!
리버 플레이트의 공격적인 응원가와.
- 바다를 보며 꿈을 키우는 보카!
- 높은 파도처럼 몰아쳐 리버를 집어삼켜라!
보카 주니어스의 응원가가 합쳐지며 경기 시작 전부터 분위기는 고조됐다.
“와, 지금껏 이런 분위기를 당신 혼자 만끽하고 있었던 거야?”
보카 주니어스 서포터즈석에는 유지우의 어머니 서설희와 누나 유민하도 함께였다.
“그만하고 자리에 앉아.”
“왜왜왜! 나, 해외 직관은 오랜만이라 되게 설렌다고!”
서설희는 경기 시작 전부터 응원가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정열적인 남미의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그건 유민하도 마찬가지였다.
“우와…. 지우가 여기서 축구 하는 거야?”
축구 DNA를 가지고 태어나 어릴 때는 축구 선수가 꿈이었지만, 유한우가 요리하는 것을 보고 셰프를 꿈꿨다.
그러면서도 맨체스터 시티 공식 서포터즈 활동을 할 만큼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
두 모녀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이, 선수들이 입장하기 시작했고 유민하는 동생을 발견하며 손으로 가리켰다.
“엄마! 저기 지우 나온다!”
그러곤 곧장 휴대폰을 들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어디! 어어어어어! 우리 아드으으으으을! 엄마 왔다!”
“아들! 아빠도 있다!”
“누나도 있어! 여기 봐봐!”
세 가족이 연달아 아들을 부르자 옆에 있는 알리샤 가족은 슬며시 웃었다.
“알리샤.”
그때 옆에서 보던 사람들은 동양인 가족이 환호하는 것을 보고 알리샤 가족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야? 누구인데 우리 유를 저렇게 불러?”
“유의 부모님과 누나예요.”
“뭐? 우리 요정의 가족들이라고!”
출전했다 하면 골을 넣고 승리를 이끄는 요정 유지우는 보카 주니어스 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이봐, 모두들! 이 사람들이 유의 가족들이래!”
“진짜?”
“우리 요정을 낳은 부모라고? 신이시여!”
“오오오오오오!”
유지우의 가족이 방문했다는 소식은 근처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더니 한 노인이 다가와 뭐라고 얘기를 했고 유한우는 그걸 듣고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하시는 거야?”
에스파냐어를 할 줄 모르는 두 모녀는 멀뚱멀뚱 유한우만 바라봤고 유한우는 활짝 웃었다.
“유의 경기 덕분에 멀어진 가족들이 자주 모이는 계기가 됐다고 감사하다고 하셔.”
“옆에는 손주야?”
“응, 유의 팬이래. 집에 유의 경기 기사를 스크랩해서 모아놓기도 했고.”
“선물 하나 줘도 돼?”
“어떤 거?”
“저거.”
서설희가 가리킨 곳에는 한인회 가족들에게 주고 남은 유니폼이 있었다.
“물론이지.”
서설희는 웃으며 유니폼 하나를 손주에게 줬다.
“우리 아들 계속 사랑해 주세요.”
한국말로 해서 유한우가 통역을 해줬고 그 말을 들은 노인과 손주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다들 유의 부모를 위해서 응원가 한 번 부르자!”
“어떤 걸로 할까?!”
“Mi Buen Amigo!”
“오! 좋다! 새로운 친구들 왔으니까 환영해 주자고!”
- “Boca, mi buen amigo(보카! 나의 좋은 친구)!”
어깨동무하며 응원가를 같이 부르자 유지우의 가족들도 서서히 관중들과 동화되어 갔다.
삐------익!
응원가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며 아르헨티나 최고의 유망주를 가리는 ‘아르헨티나 주니어컵’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