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외계인-36화 (36/383)

제36화

보카 주니어스 구단을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꽤 세게 나갔네요?”

“계약할 때, 이런 건 필요합니다. 사람 좋게 다 넘어가려고 하면 약점 잡히는 건 한순간이에요.”

차명훈은 신인 선수들이 구단과 계약 협상을 잘못해서 상처받는 걸 자주 봐왔다.

“5년 계약에 매년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될 거라고 한 말을 믿으세요?”

“제가 사람은 잘 안 믿어서요.”

“좋은 태도입니다. 매년 계약 갱신은 구두로 되어 있는 거지, 계약서에 명시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냥 자기들 편한 쪽으로 몰고 가려고 하는 거죠.”

그 후로도 여러 대화를 나눴고 차명훈은 운전을 해 유지우를 집에 데려다줬다.

“내일 구단으로 갈 때, 집 앞으로 가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네! 푹 쉬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다음 날.

차명훈이 요청한대로 계약서에는 계약 기간이 3년으로 줄어들었고 이적 조건도 삽입되어 있었다.

“지우 선수 여기 보시면….”

차명훈은 유지우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줬다.

이미 차명훈이 계약 관련해서 마무리를 지어놓은 덕분에 굳이 다 읽어볼 필요는 없었다.

나쁘지 않은 연봉.

선발 출전 수 보장 조항.

벤치에 있을 때 주는 벤치 수당도 있었다.

그리고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이적을 허용해준다는 조항까지.

이 정도면 구단을 위한 계약이 아닌 선수를 위한 계약이었다.

스스스슥.

충분한 설명을 들은 유지우는 계약서 서명란에 볼펜을 들고 사인했다.

씩.

사인하는 걸 본 엔리케 보토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은 에이전트를 곁에 두셨습니다.”

“칭찬이죠?”

“물론이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엔리케 보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보카의 역사를 함께 써봅시다.”

유지우는 공식적으로 프로 계약을 맺으며 1군 엔트리에 포함됐다.

【 보카의 어린 왕자 1군 계약! 정식으로 엔트리에 포함되다! 】

【 계약 기간 3년에 연봉 3억! 】

【 보카 주니어스 측, “우리는 유가 클럽을 대표할 선수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본다.” 】

【 보카 주니어스의 비어 있는 등번호 10번, 유가 새로운 주인이 될 확률은? 】

* * *

“찌우! 계약했다며! 축하한다!”

내가 1군 계약을 한 사실은 금세 퍼져나갔다.

시장에 살 게 있어서 나오자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감사합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신 분은 아버지 식당과 식재료 계약을 맺은 해산물 가게 사장님인 롤라 여사님이다.

“자! 이건 1군 계약 선물! 오늘 들어온 싱싱한 놈이니까 집에 가져가서 유 사장님이랑 같이 먹어!”

봉투에 해산물을 가득 담아주셨다.

“아니에요. 올 때마다 챙겨주시는데….”

“우리 구단의 미래에 투자하는 거야! 투자!”

항구도시라 해산물의 싱싱함은 최상급이었다.

아버지가 한국보다 이곳에서 해산물 요리하는 걸 왜 즐거워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맛도 훌륭하고.

“가격은 다음 경기에서 골 하나! 그거면 충분해!”

지나갈 때마다 근처 상인분들은 뭐라도 하나 챙겨 주시려고 했다. 다른 분들에게 걸리기 전에 얼른 물건을 사서 가려고 했는데.

“어어어어! 롤라! 당신만 챙겨주기야?”

다른 분들에게 걸려버렸다.

“우리는 이거!”

해산물 가게 사장님만이 아니라 채소 가게 사장님도.

“어허! 금방 먹기에는 이놈만 한 게 없지!”

과일 가게 사장님.

어느덧 내 주위에는 여러 가게 사장님들이 모여들었다.

“다음 경기는 어디랑 하지?”

“고도이크루스!”

“아~ 그놈들 수비만 더럽게 많은 놈들이잖아.”

“괜찮아! 유의 돌파력이라면 충분히 뚫어낼 수 있으니까!”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고기 썰어줄 테니까 가서 먹고 힘내라!”

항구도시의 사람들이라 다소 거친 면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진심으로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 * *

리그 6라운드 CD 고도이크루스전.

상대는 파이브백으로 수비에 무게를 둔 전형적인 수비팀이었다.

우리가 볼을 잡으면 순식간에 텐 백으로 라인을 전부 내리며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구사했다.

[고도이크루스는 저번 시즌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으로 수비를 하네요.]

[그에 맞서는 보카 주니어스는 양 사이드로 볼을 보내며 고도이크루스의 밀집 수비를 측면으로 분산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들어갈 틈을 찾으려고 해도 좀처럼 기회가 나오지 않았다.

‘어.’

그때였다.

내가 측면에서 중앙으로 이동하자 앙헬 몰리야가 움직이는 게 느린 동작으로 보였다.

“유!”

하비에르가 준 패스를 원터치로 앙헬 몰리야가 달려가는 앞으로 절묘하게 밀어줬다.

[유의 패스가 앙헬 몰리야에게!]

[앙헬 몰리야가 화려한 턴으로 두 명을 제쳐냅니다! 이게 레알 마드리드를 지탱하고 유럽 축구를 놀라게 한 스킬입니다!]

돌아온 천재 앙헬 몰리야는 능숙하게 경기 운영을 했다.

필드 밖에서는 약간 가벼워 보이는 행동을 많이 하는 선수지만, 필드 안에서는 믿음직했다.

[앙헬 몰리야로 몰리는 수비! 그 반대로 유가 달려갑니다!]

앙헬 몰리야가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수비가 몰리는 거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른 쪽에서 공간이 나올 테니까.

뻐---엉!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찌른 앙헬 몰리야의 패스.

근처에 있던 수비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몸을 날렸지만.

툭.

촘촘하던 수비진을 뚫어버린 원터치 패스.

리카르도 메사가 최종 수비수를 따돌리며 절묘하게 오프사이드 라인을 뚫어버렸다.

[유의 감각적인 원터치! 리카르도! 리카르도 메사아아아아아!]

철렁-!

필사적으로 쫓아가며 오른쪽으로 툭 밀어 넣으며 득점을 만들어 냈다.

“아이고, 이 꼬맹이하고 발맞추다가 숨차서 죽겠다.”

“엄살은요.”

“어쭈! 이제는 농담까지! 너도 하비에르처럼 나 놀릴 거냐!”

리카르도 메사와는 훈련할 때마다 붙어 다녀서 이런 농담을 할 만큼 금방 친해졌다.

“아! 우리 아내가 너 한 번 데리고 오래, 맛있는 거 해준다고!”

“주말에 시간 돼요.”

“오! 좋아, 좋아! 그러면 일요일 점심 먹자.”

극단적으로 수비하는 클럽에겐 한 골이면 충분했다.

그들은 역습 전술로 보카 주니어스의 골문을 노렸지만, 뒷공간이 쉽게 노출되며 연달아 세 골을 더 먹히며 패배했다.

[ 보카 주니어스 4 – 0 CD 고도이크루스 ]

경기에서 승리하고 관중들에게 인사를 한 뒤에 필드에서 나가려고 할 때, 낯익은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찌우우우우우우!”

“여기! 여기! 여기!”

늘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가게 사장님들이었다.

씩.

난 웃으며 유니폼 상의를 벗어서 사장님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펜스를 넘어 가장 앞에서 보카 주니어스 엠블럼이 새겨진 깃발을 흔드는 상인회장님인 롤라 여사님에게 유니폼을 건넸다.

“그동안 무료로 먹은 값은 앞으로도 차근차근 갚아 나갈게요.”

* * *

【 보카 주니어스 6전 6승의 상승세! 】

【 돌아온 천재 앙헬 몰리야, “보카에서 다시 뛸 수 있어 행복하다. 남은 선수 생활은 보카를 위해 바칠 것.” 】

【 앙헬 몰리야의 대활약! 보카, 이번 시즌에는 우승할 수 있을까? 】

이틀 후, 다음 경기를 대비한 전술 훈련이 끝나자 선수들은 각자 짐을 챙겼다.

라커에서 짐을 챙기는 내 옆으로 리카르도 메사가 다가왔다.

“패스, 나날이 좋아진다?”

“다 리카르도가 가르쳐준 덕분이죠.”

훈련 때마다 리카르도 메사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타이밍에 패스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요점을 딱 짚어 말해줘서 패스하는 게 예전보다 편해졌다.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도 아직 스텝이 어색해.”

“스텝 훈련 열심히 해야죠.”

“너는 시야도 좋고 볼 다루는 센스도 좋으니까 스텝만 좋아지면 너 잡을 녀석은 이 리그에 없을 거다.”

리카르도 메사는 선수단에서 아버지처럼 날 잘 챙겨줬다.

“유! 벌써 가?”

하비에르 카세로는 샤워를 마치고 뒤늦게 라커로 들어왔고 짐을 다 챙긴 날 보고 놀란 눈빛을 보냈다.

“오늘은 꽤 일찍 간다? 늘 조명 끄고 갔잖아.”

앙헬 몰리야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에이전트랑 같이 아버지 식당에 들르기로 해서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내일 보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리카르도랑 앙헬도 내일 봬요.”

선수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자 입구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이 있어서 짧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오가는 질문에 형식적으로 답을 해주다가 마지막에 예민한 질문이 나왔다.

“U-17 월드컵 당시, 한국의 국가대표 차출을 거부하셨는데요! 혹시 아르헨티나 귀화를 준비하시는 건가요?”

기자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나만 놀란 게 아니었다. 주변 기자들이 모두 놀랐다.

“…갑자기 주제가 확 바뀌니 당황스럽네요.”

“아, 당황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질문에 답변을 드리자면.”

아르헨티나 귀화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나의 꿈은 태극전사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필드를 누비는 거였으니까.

‘언제부터였더라.’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경기장을 자주 찾았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 남매를 경기장으로 자주 이끄셨고, 자연히 축구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국가대표 경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선전이 열리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아침부터 김밥을 싸서 준비했고, 응원석에 가서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참 많이도 갔지, 그때.’

처음에는 그저 프로팀과 같은 경기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국가대표 경기에는, 보면 볼수록 어린 내 마음을 뜨겁게 울리는 게 있었다.

‘하나가 된다는 감각.’

모든 이가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선수들은 그 마음을 받아, 모두를 대표하며 뛴다.

애국심, 자긍심…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마음은 내 마음을 어지럽혔고,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만들었다.

한국 국가대표를 응원하며 한마음이 되었던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나 역시, 언젠가 이들을 대표하여 뛰고 싶다고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기자의 질문에 내가 할 말은 하나였다.

“저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유니폼 말고 다른 나라의 유니폼을 입을 생각이 없습니다.”

차성인과 그 세력 때문에 내 어린 시절의 꿈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왜 차출을 거부하신 겁니까?”

“제 꿈을 빼앗으려고 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뛰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더 이상 속내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이제는 유스 신분이 아닌 프로 신분이 됐으니까.

“꿈을 빼앗으려고 했던 사람들이라면 감독 폭행이라는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인가요?”

“예.”

“구단에서 발표했던 진짜 진실은 따로 있다는 내용이 정말입니까?”

“감독을 때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건 어차피 언론에 보도된 거니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숨겨진 진실이 있습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거였다.

“그래서 전, 그 사람들이 계속 거짓을 진실이라고 포장하며 협회에 남아 있는 한, 대한민국의 차출 요청을 꾸준하게 거부할 생각입니다.”

“…그, 그렇게 되면 국가대표 경력에 차질이 생길 텐데도요?!”

프로 선수에게 국가대표는 명예였다.

그것을 뛰지 않겠다는 건 어떤 비난도 감수하겠다는 뜻이라는 걸 아는 기자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에게 난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저는 제 커리어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사람들의 요구는 단 하나도 들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잔잔한 연못에 돌 하나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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