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보카 주니어스 0 – 0 산투스 FC]
전반전이 끝나자 양 클럽은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산투스 FC 라커룸에선 스테파노 감독이 신경질적으로 벽을 강하게 치며 선수들에게 열변을 토했다.
“대체 이기겠다는 의지는 있는 거야? 어? 너희보다 유소년 애들이 더 잘 뛰겠다! 프로라면 매 경기! 증명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가져!”
전반전에 답답한 경기력을 놓고 한 소리 퍼부었다.
비록 서로 득점이 나오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이 예측한 승률이 산투스 FC가 조금 더 높았기에 선수들은 전반전에 한 골도 넣지 못한 것에 대해 분해했다.
“헤나투.”
물을 마시며 수분 보충을 하던 헤나투 얀은 땀범벅이 된 상태로 대답했다.
“네.”
“보카의 꼬맹이는 어때?”
감독의 물음에 헤나투 얀은 자신이 느낀 그대로 말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놓칠 정도로 다리가 빠르고 체력이 좋아요. 실제로 몇 번 당해서 위험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했고요.”
헤나투 얀은 브라질 리그 베스트 11에서 왼쪽 풀백 위치에서 한 번도 이름이 빠지지 않는 선수였다.
그런 선수가 놓쳤다는 건 그만큼 유지우가 뛰어난 선수라는 의미기도 했다.
“정말 열일곱이 맞아요? 나이 속인 게 아니라?”
전반전에 유지우에게 돌파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빈 물통을 꽉 쥐었다.
“막을 가능성은?”
“제 모든 걸 걸고서라도 막겠습니다.”
투지를 내뿜는 헤나투 얀의 눈빛을 본 스테파노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후반전에도 보카의 꼬맹이는 너한테 맡긴다. 그리고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라면 주변에서 협력 가주고! 서로 끊임없이 소통해라.”
“네!”
“다음! 히카르지뉴! 볼을 빼앗긴 횟수가 너무 많아! 후반전에는 빼앗기는 횟수를 줄이고 패스 횟수를 늘려! 알았어?”
“네!”
“네가 살아야 산투스가 산다. 리버풀 이적 확정 지었다고 안심하지 마! 축구 선수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직업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후반전에는! 반드시 골을 넣어 산투스에 트로피를 안겨 드리겠습니다!”
이 경기는 히카르지뉴의 산투스 FC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2030년 1월부로 리버풀에 합류하기에 그는 떠나기 전, 자신을 프로 선수로 키워준 클럽에 우승 트로피를 선물해 주고자 의욕을 불태웠다.
“축구는 언제나 승자만 역사에 기록된다. 패자는 승자의 이름에 가려져 역사에서 사라지지.”
스테파노 감독은 선수들을 쳐다봤다.
“역사에 이름을 새길 클럽이 어딘가?”
- “산투스!”
“브라질에 영광을 가져갈 클럽은?!”
- “산투스!”
“이곳까지 응원하러 온 관중들을 위해서라도 보카 녀석들에게 브라질 축구의 우월함을 보여줘라!”
- “네!”
* * *
삐---익!
선수들이 다시 필드로 나오면서 코파 수다메리카나 결승 후반전이 시작됐다.
산투스 FC는 전반전과 마찬가지로 4-4-2 전술.
중원은 다이아몬드 형태로 히카르지뉴가 다이아몬드의 제일 위에서 공격을 이끌었다.
“사이드로!”
넓은 시야로 경기 전체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다.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자신의 입맛대로 경기를 만들어갔고, 그러던 중에 측면에서 오는 패스를 받으려다가.
퍼—억!
강하게 부딪치는 훌리안 마르티네즈와 몸싸움을 했다.
체격은 히카르지뉴가 더 작아 몸싸움에서 서서히 밀렸지만,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며 몸을 움직였다.
스르르르륵.
오는 볼을 잡지 않고 그대로 흘려 훌리안 마르티네즈의 뒤로 돌아 들어갔다.
- 오오오오오오!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동작.
그 후에 뒤로 흐른 볼을 잡아 과감한 중거리 슈팅으로 보카 주니어스의 골문을 위협했다.
[골키퍼 정면으로 가는 슈팅! 흘러나온 볼은 에르네스토 게레라가 클리어링 하며 위험지역 밖으로!]
[히카르지뉴의 무서움이 바로 저런 겁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슈팅 기회를 창출하고 마무리까지! 저 모습이 산투스의 작은 마법사 히카르지뉴의 본모습입니다!]
산투스의 작은 마법사.
172cm의 작은 키.
작은 키에 바디 밸런스가 완벽했고 양발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게 특기였다.
리버풀이 반한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50분.
60분.
산투스 FC가 전반전보다 더 공격적으로 보카 주니어스 진영을 괴롭혔고 히카르지뉴는 그 중심에 서서 공격을 적극적으로 리드했다.
투-욱.
패스는 절묘하게 오프사이드 라인을 뚫어냈고.
휘릭.
압박하는 선수는 부드럽게 제쳐내며 공간을 창출해냈다.
히카르지뉴가 보카 주니어스의 숨통을 조금씩 조였으나 결승까지 올라온 보카 주니어스의 수비진도 쉽게 밀리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기합을 내지르며 산투스 FC의 공세를 끊어 볼의 소유권을 빼앗았다.
트로피가 눈앞에 보이는 지금.
대충 하는 선수는 필드 위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우승을 향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뻐---엉!
[보카의 역습 기회! 라인을 내려와 있던 앙헬 몰리야에게 향하는 에르네스토 게레라의 패스!]
툭.
[뒤에서 압박하는 선수를 따돌리며! 원터치 패스로 돌아서서 나갑니다! 하비에르 카세로가 리턴 패스! 보카의 콤비가 산투스 진영으로! 산투스는 빠르게 백업해서 막아보려고 하지만 사람보다 볼이 훨씬 빠릅니다!]
앙헬 몰리야는 길게 드리블하지 않았다.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 최전방에 있는 리카르도 메사에게 패스를 보냈다.
산투스 FC 최종 라인에 남은 건 최종 수비수인 비토르 고메스였다.
‘여기서 막아야 한다.’
리카르도 메사에게 속도는 없었다.
나이가 있어 돌파보다는 감각적인 터치로 이타적인 플레이를 하는 것을 즐겼기에 비토르 고메스가 경계할 것도 그거였다.
“아이고, 늙은이한테 너무 세게 오네. 그러다가 뼈 상하겠어. 가뜩이나 늙어서 연약해졌는데 말이야.”
“…….”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균형을 흔들려고 계속해서 밀었지만, 리카르도 메사는 미동도 없었다.
수많은 세월을 거치며 단단해진 밸런스와 경기 전체를 보는 눈.
경험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노장과의 수준은 이미 아득히 차이가 났다.
“다른 쪽은 안 보나?”
그 말을 듣고 뭔지 모를 위화감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키우는 귀여운 괴물 한 마리가 너희 골대를 노리면서 들어오고 있거든.”
오프더 볼 상황에서 빈 곳으로 달려드는 건 유지우였다.
볼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선 헤나투 얀도 쫓아가지 못할 폭발력을 보여줬다.
리카르도 메사는 앙헬 몰리야가 준 패스를 발로 살짝 건드려 다리 사이로 통과시켰고 궤적이 바뀐 볼은 비토르 고메스의 다리 사이도 지나 허허벌판인 뒷공간으로 흘렀다.
“제길!!!”
타다다다닷-!
점점 멀어지는 거리에 헤나투 얀은 경악했다.
‘어째서.’
주력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유소년 때부터 제일 먼저 칭찬받았던 게 주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게 뭐란 말인가.
눈앞에 있는 30이라는 숫자가 점점 멀어졌고 마침내 잡아내기 어려운 곳까지 나아갔다.
[유!!! 산투스의 수비진을 녹여버리는 환상적인 브레이킹! 오프사이드도 아닙니다! 완벽한 오픈 찬스!]
[산투스 수비수들이 쫓아가질 못합니다! 이때 골대를 비우고 각도를 좁히며 나오는 마르콩!]
195cm의 큰 키.
조금만 나와도 워낙 커다란 덩치 탓에 순식간에 슈팅 각도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유지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흐른 볼을 잡지 않고 곧바로 유일하게 보이는 득점 경로로 슈팅을 시도했다.
투---웅!
골키퍼의 키를 넘기는 로빙슛.
휙.
페널티 에어리어 밖이라 손이 닿는다면 핸들링이 되는 상황에서도 마르콩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안 돼.’
거리가 있어 강한 강도로 시도한 로빙슛은 마르콩이 뻗은 손보다도 높게 올라갔다.
그리고 별똥별이 떨어지듯.
볼은 골대 안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철렁.
시간이 멈춘 착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로빙슛이었다.
브라질에서 온 산투스 팬들은 침묵했고 스타디움에는 보카 주니어스의 금빛 물결이 일렁였다.
-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70분! 선제골을 넣은 것은 아르헨티나의 명문! 보카 주니어스입니다아아아아아! 유의 환상적인 로빙슛! 기나긴 균형을 깨고 1 – 0으로 보카 주니어스가 앞서 나갑니다!]
[놀랍습니다! 정말 놀라운 움직임입니다! 볼을 받기 전에 헤나투 얀을 제칠 때 보셨습니까?]
해설위원의 말대로 리플레이가 재생됐다.
리카르도 메사가 볼을 흘리기 전의 영상이었고 유지우가 헤나투 얀을 순간적으로 제치는 장면이 찍혔다.
[바디 페인팅으로 제치고 달리는 가속도를 보십시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유의 허벅지는 무슨 강철로 되어 있기라도 한 걸까요?]
광고판에 올라가 클럽 엠블럼을 치며 포효하는 유지우를 보며 리카르도 메사는 허탈함에 주저앉은 비토르 고메스에게 말했다.
“어때? 우리가 키우는 괴물 귀엽지?”
* * *
1 – 0.
남은 시간은 25분.
[보카 주니어스의 선제골로 조급해지는 산투스! 볼을 전방으로 빠르게 전개합니다! 깊숙한 위치에서 볼을 받은 히카르지뉴가 오른쪽으로 길게 넘겨준 패스! 그곳에는 더글라스 멜루가 있습니다!]
[더글라스 멜루! 가슴 트래핑으로 안전하게 볼을 잡아두고 크로스으으으으으, 에베르통 실바의 헤더어어어어어!]
스트라이커 에베르통 실바가 헤딩으로 돌려놓은 볼은 아쉽게도 보카 주니어스의 골대 옆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산투스의 매서운 공세! 그러나 보카 주니어스의 골문은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보카 주니어스의 수비진은 리그에서도 단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곳을 히카르지뉴는 어떻게든 뚫으려고 별의별 플레이를 시도했지만, 득점으로 연결되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XX! 내가 이러니까 여길 떠나려는 거야! 볼을 주면 뭐 해! 넣질 못하는데!’
득점에 실패하자 신경질적으로 잔디를 걷어찼고 수비 전환도 하지 않았다.
그때.
라인을 내려와 볼을 잡은 하비에르 카세로가 넛맥으로 압박하던 선수를 제치고 산투스 FC 진영을 바라봤다.
아직 정비되지 않은 산투스의 공간.
허겁지겁 수비 전환을 하던 선수들보다 먼저 그 공간을 휘젓는 선수가 보였다.
씨익.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투욱.
그리고 정면으로 밀어준 볼.
어느새 유지우가 측면이 아닌 중앙으로 올라와 있었다.
[중앙에서 볼을 잡는 유!]
[조금 전에는 왼쪽 하프 스페이스에서! 또 어떤 때는 오른쪽에서! 여러 공간을 누비며 산투스 FC를 위협합니다!]
볼을 받은 유지우는 쫓아오던 헤나투 얀을 보더니, 볼을 쭉 치고 달리며 최대한 볼과 접촉하는 시간을 줄이고 최대한으로 속도를 냈다.
잡힐 듯 안 잡히는 거리.
센터백들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라인을 지켰고 리카르도 메사가 최종 라인에 걸쳐 있다가 슬쩍 돌아 들어가려는 걸 본 유지우는 과감한 중거리 슈팅을 때렸다.
하지만 슈팅은 살짝 회전이 걸려 골포스트를 스치며 나가버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골대 왼쪽으로 휘어 나가는 슈팅!]
[후반전에는 확실히 유가 볼을 잡는 빈도가 늘어난 게 보입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보카 주니어스의 포메이션은 4-3-3이지만, 세부적으로 따지면 후반전에는 4-4-1-1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그렇게 되면 공격력이 줄어들지 않나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죠. 앙헬과 하비에르를 중앙 아래로 내려도 될 만큼 공격 메이킹 능력이 뛰어난 선수가 존재한다면요.]
“설마.”
산투스 FC 감독은 유지우의 플레이를 유심히 보다가 무언가 눈치를 채고선 보카 주니어스 벤치 쪽을 바라봤다.
“프리롤이라고?”
오른쪽 측면.
중앙.
왼쪽 측면.
최전방까지.
하나의 포지션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하게 움직이는 유지우에게 주어진 롤은 자유로움의 끝인 ‘프리롤’이었다.
유스 시절이나 전에 보여줬던 측면 플레이 메이커 롤은 측면에서 메이킹을 했다면 프리롤은 더 넓은 의미의 롤로 필드 전체에서 메이킹을 하는 거였다.
‘전체 프리롤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포지션 이해도가 높다고? 저 나이에?’
프리롤은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롤이었다.
포지션의 이해도가 높아야 했고 필드 전체를 누빌 만한 체력, 상대의 압박을 벗어날 탈압박 능력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팀에 민폐인 롤이었다.
그러나 유지우는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등 축구 포지션에 대한 이해, 전술적인 이해도가 높았다.
경기를 뛰지 못했던 시기에 전술 공부로 한 해를 다 보낸 것이 도움이 된 거였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아무리 다른 포지션으로 가 있어도 본인의 포지션을 허투루 하지 않았고 다른 선수들의 공간까지 커버하는 미친 활동량과 지능적인 플레이를 보여줬다.
축구에 대한 높은 이해도.
그걸 기반으로 나오는 빈틈이 없는 플레이.
중앙에서 패스받자마자 현란한 발재간으로 두 명의 선수를 제친 뒤, 최전방으로 침투하는 리카르도 메사의 앞으로 로빙 패스를 하는 것을 보고 스테파노 감독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히카르지뉴의 재능이 평범해 보이다니….”
감독 생활을 하면서 히카르지뉴보다 더한 재능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지금 눈앞에 브라질 리그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는 선수보다 더한 재능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