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경기가 끝으로 갈수록 열기는 식지 않고 더 뜨거워졌다.
열기로 가득한 관중석의 한쪽.
한 중년 남성이 필드를 누비는 유지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보카의 30번이 어린 왕자라고 불리는 선수지?”
리버풀 스카우터 론 허드만과 팀원인 제임스였다.
“네. 지금 저 애를 노리는 클럽들이 서서히 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론의 마음에도 드십니까?”
론 허드만은 도르트문트부터 시작해 유럽 빅클럽들의 스카우터를 역임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오랜 세월을 스카우터로 지낸 덕에 선수 보는 눈은 웬만한 사람보다 뛰어났다.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야.’
볼을 받기 전에 고개를 돌려 상황을 인지하고 풀어나가는 방식.
자신에게 압박이 몰렸을 때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빈 곳에 있는 선수를 이용하는 침착함.
그리고 기회가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처리하는 대담함.
‘…왜 다른 스카우터들이 극찬했는지 알겠군.’
경기를 유심히 보던 그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론.”
그는 유지우를 아르헨티나로 데려온 스카우터 로드리고였다.
“로드리고.”
“못 본 새에 주름이 많이 늘었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군.”
로드리고는 옆에 앉다가 론 허드만의 수첩에 적힌 유지우의 이름을 봤다.
“우리 애한테 관심이라도 있어?”
“유를 말하는 건가?”
“어.”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선수라면 어떤 팀이라도 침을 질질 흘릴걸?”
실제로 유지우의 경기를 본 스카우터들이 돌아간 뒤로 여러 클럽의 문의가 빗발쳤다.
“데려가려면 애 좀 먹을 거야.”
“당장은 안 보낼 거 같고, 이적하게 된다면 1년 후나 2년 후가 되겠군.”
나날이 가치가 올라가는 열일곱의 어린 선수.
여러 클럽이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보카 주니어스가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예상을 했다.
이적 시장에 나오는 건 아무리 빨라도 1년 뒤가 될 거라는 걸.
“예리한 건 여전하네.”
“그야 조금만 생각하면 되잖아. 저런 퍼포먼스를 내년까지 보여준다면 그 가치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뛸 거니까.”
“나중에 저 애가 유럽으로 간다고 하면 리버풀도 뛰어들 거야?”
“만약 저런 경기력을 내년까지 보여준다면… 영혼까지 끌어서라도 베팅해야지.”
출전만 하면 공격 포인트를 만들어주는 선수.
이런 선수를 그냥 두고 볼 클럽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면 난 이만 가본다.”
“어디 가? 경기 안 끝났잖아.”
“이 정도면 결과는 이미 정해졌잖아.”
로드리고는 끝까지 보지 않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시간은 5분 남짓.
승자는 이미 정해졌으니까.
로드리고가 가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제임스가 물었다.
“저 애가 이적 시장에 나올까요?”
“언제가 됐든 나오긴 할 거야.”
볼을 받고 두 명의 압박을 벗겨내는 유지우를 보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적 시장에 나온다면 빅클럽들의 피 튀기는 쟁탈전이 시작되겠지.”
머지않아 유지우로 하여금 빅클럽들의 영입 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걸.
* * *
산투스 FC는 주력이 빠른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속공 전술이 지배적이었다.
남은 시간 5분.
어떻게든 동점 골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산투스 FC는 템포를 빠르게 가져갔다.
“측면보다는 중앙! 집중해!”
그에 맞서는 보카 주니어스는 체력이 거의 다 소진된 만큼 측면을 포기하고 중앙 수비를 더 두껍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오, 역시 에르네스토 게레라입니다. 산투스가 측면 공격보다 중앙의 히카르지뉴를 이용하는 빈도가 높아지자 과감하게 측면을 포기하고 중앙 수비에 집중합니다.]
[괜히 보카 주니어스의 부주장이 아니죠. 하비에르 카세로가 공격 상황을 이끈다면 에르네스토 게레라는 수비 상황을 이끄는 선수입니다.]
때마침 히카르지뉴에게 가는 패스.
근처에 있던 훌리안 마르티네즈가 태클로 빼앗으려고 했지만, 히카르지뉴는 스텝 오버로 압박을 벗겨냈다.
[히카르지뉴의 돌파아아아! 보카 주니어스의 골대와 거리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여기서 동점 골을 넣어야만 산투스가 편해집니다! 히카르지뉴! 히카르지뉴!!!]
툭.
수비가 앞에 붙자 따돌리려고 한 번 볼을 쳐낸 뒤에.
뻐—엉!
슈팅 공간이 나오자 기습적으로 시도한 슈팅.
쭉 뻗어간 슈팅은 오른쪽 구석으로 가다가 골포스트를 맞고 라인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아아아아아아! 또 빗나가는 히카르지뉴의 슈팅! 주저앉아 아쉬움에 울부짖습니다!]
[사실상 산투스에서의 마지막 경기이거든요. 이 경기에서 이겨 떠나기 전에 산투스에 트로피를 안겨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집니다.]
89분.
어느덧 정규 시간이 다 흘렀다.
주어진 추가 시간은 고작 3분.
한 골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시간이라 보카 주니어스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삐—익!
[두 명을 제치고 시도한 히카르지뉴의 슈팅이 골키퍼의 손을 맞고 나가며! 산투스의 코너킥 기회!]
[골키퍼 마르콩까지 골대를 비우며 보카 주니어스 골문 앞으로! 산투스의 총공세입니다!]
어차피 여기서 득점을 하지 못하면 지는 상황이라 산투스는 도박을 걸었다.
휙.
그걸 본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라인에 서서 유지우에게 손짓했다.
끄덕.
[산투스의 노림수에 보카 주니어스는 유를 최전방으로 올리며 압박을 가합니다! 저러면 산투스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죠.]
역습을 허용하더라도 산투스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삐—익!
히카르지뉴가 올린 크로스.
문전 앞에서는 선수들끼리 치열하게 자리싸움을 했고 제공권 싸움에서 이긴 건 에르네스토 게레라였다.
[에르네스토 게레라의 헤딩! 흐른 볼은 리카르도 메사의 앞으로!]
“리카르도!”
정면을 가리키며 소리치는 하비에르 카세로를 보고 리카르도 메사는 전방으로 볼을 보냈다.
[산투스의 코너킥이 실패하고 보카의 역습 기회! 걷어낸 볼은 유가 있는 곳으로! 산투스가 빠르게 수비 전환을 해보지만, 볼은 이미 최전방으로 넘어갔습니다!]
쿠—웅!
[바짝 붙어서 수비하는 헤나투 얀! 이 사이에 산투스는 커버를…. 어?]
해설위원들은 깜짝 놀랐다.
투웅.
리카르도 메사의 롱패스를 따로 잡아두지 않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볼의 반동을 완전히 흡수한 뒤, 아름다운 트래핑으로 한 차례 띄우며 헤나투 얀의 머리 위로 보냈다.
‘어딜.’
헤나투 얀이 돌아서려고 할 때.
투웅.
공중에 있는 볼을 다시 한번 머리 위로 보내며 농락했다.
전성기 호나우지뉴와 네이마르가 자주 사용하던 ‘솜브레로 플릭’이었다.
“이 자식이!!!”
두 번의 농락에 열 받은 헤나투 얀이 달려들려고 하자.
뻐—엉!
유지우는 망설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볼을 하프라인에서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볼은 무지개를 그리며 비어 있는 골대로 향했고 그대로.
철렁~.
골대 안으로 꽂혔다.
-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단 세 번의 터치 후에 나온 초장거리 골.
보카 주니어스의 두 번째 골이 나왔다.
[산투스의 골문이 다시 한번 열립니다아아아아아! 정규 시간이 다 지나고 나온 어메이징한 골의 주인공은 유! 남은 시간은 2분! 2분만 지나면 보카 주니어스가 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컵을 가져가게 됩니다!]
[하프라인에서 시도한 초장거리 고오오오오오올! 이것으로 2 – 0! 한 골 더 달아나면서 산투스가 경기를 뒤집기는 어려워졌습니다!]
양손을 들고 하늘을 가리키는 세리머니.
보카 주니어스 팬들은 환호하며 유지우의 응원가를 불렀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는 두려움을.
두 걸음을 내디딜 때는 환호를.
세 걸음을 내디딜 때는 승리를!
길을 비켜라, 그리고 무릎을 꿇어라.
새로운 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찬양하라!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
우리의 새로운 왕 유에게 경배를!]
아르헨티나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들리는 응원가.
그 응원가가 울리고 2분 뒤, 히카르지뉴가 어거지로 한 골을 만회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경기를 뒤집기는 무리였다.
삐익! 삐익! 삐-----익!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립니다! 2029 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팀은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입니다!]
[마지막에 히카르지뉴의 중거리 슛이 들어가며 최종 스코어는 2 – 1! 보카 주니어스가 브라질의 강호 산투스 FC를 제치며 아르헨티나로 우승 트로피를 가져갑니다!]
5년이라는 시간이 넘게 브라질의 품에 있었던 남미 대륙컵.
그 첫 번째 조각이 보카 주니어스를 통해 다시금 아르헨티나의 품에 안겼다.
* * *
경기 종료 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까지 다 끝난 뒤 경기장을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급히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다.
“히카르지뉴, 뭐 하는 거야?”
혹시라도 패배한 충격에 나한테 해코지라도 하러 왔을까 봐 하비에르 카세로가 막아 주려는데.
“흐끅.”
…뭐야, 쟤 울어?
“흐으으으윽.”
소매로 눈물을 닦기까지 했다.
“괜찮아?”
내가 묻자 히카르지뉴는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다, 다음에는… 흐윽… 아, 안 져.”
그러면서 상의 유니폼을 벗어서 건네는 걸 보고 살짝 웃으며 상의 유니폼을 내밀었다.
“어차피 넌 유럽으로 가서 다음에 붙을 일이 없는데.”
팩트 폭행에 히카르지뉴는 어버버 말을 얼버무렸다.
“그, 그래도! 너도 나중에 유럽으로 나올 거잖아!”
유럽이라.
“그거야 모르지.”
가보고 싶긴 하지만 아직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데뷔한 지 1년도 안 된 신인이 벌써 이적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지금은 이적보다 프로 무대에서 뛸 기회를 준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너도 조만간 알게 될 거야. 이곳은 작다는 걸.”
히카르지뉴는 눈이 붉어져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유럽에서는 이거의 배로 갚아줄 거니까! 각오하고 오는 게 좋을 거야!”
“알았어. 너, 콧물도 나온다.”
“크응!”
그러고서 악수하고 헤어졌다.
필드를 나와 라커룸으로 가는 길에 기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 가볍게 인터뷰를 했다.
“우승 축하드립니다! 데뷔하고 첫 우승 트로피인데 소감 한 말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팀원들과 함께 우승을 할 수 있어 기쁩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더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 질문이 오갔고 잠시 후, 마지막 질문이 나왔다.
“현재 한국에서는 유가 연루됐던 감독 폭행 사건이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있으신가요?”
차명훈에게 들었다.
드디어 그것에 관련된 조사를 시작했다고.
그래서 인터뷰에서도 그 질문이 나올 거라는 걸 넌지시 알려줬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도달한 하나의 결론.
“제가 감독을 폭행한 것은 사실입니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결론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폭력은 정당화가 될 수 없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 실망하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감독 폭행에 대해 인정을 했다.
어떤 이유가 있든 폭행이라는 건 잘못이니까.
“하지만.”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당시 저와 절친했던 친구의 어머니가 감독에게 불상사를 당할 상황이라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않고 제일 빠른 방법을 택하며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그러면 정말 성추행이 있었단 말인가요?”
“네.”
“그때 있었던 피해자들의 진술은…?”
“다 거짓이죠. 제가 구해준 친구 어머니와 친구도 거짓말을 하며 저를 절벽으로 밀었습니다.”
거짓으로 포장되어 숨겨졌던 진짜 진실을 말했다.
프로 데뷔하고서부터 숨길 생각도 없었고 첫 번째 트로피를 얻은 지금, 나를 지지하는 기반도 더 늘어났을 거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진실이 나오기 시작했으니 여기서 한 마디만 해줘도 그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
“어째서 그 당시 그런 일을 제대로 밝히지 않으셨나요?”
“주변은 전부 제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내 편은 오로지 가족뿐이었다.
“그들을 용서하실 생각은 있으신가요?”
그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용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도 저지른 죗값을 제대로 치러야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내가 당한 만큼 상대방도 당해야 공평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