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7월 7일.
대한민국 vs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열리는 보카 주니어스의 홈구장, 라봄보네라에는 인파가 몰렸다.
“미스터 유!”
그때 유한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고 다름 아닌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알리샤의 가족들이었다.
“여기서 만나네요.”
가족들 모두 아르헨티나에 왔을 때, 인사도 하고 파티도 한 사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미안해요. 오늘은 유를 응원하지 못할 거 같아요.”
“괜찮습니다. 다 각자의 나라를 응원해야죠.”
“지더라도 속상해하지 마세요.”
“제가 할 말을 다 하시네요. 하하하하하하!”
묘한 신경전을 하면서 나란히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직원들의 표 검사가 끝난 뒤, 관중석으로 올라가자 이미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저희는 이쪽 구역이네요.”
“그러면 경기 끝나고 볼까요?”
“상황 보고서 제가 연락드릴게요. 같이 오신 분들이 계셔서.”
“아! 그러시겠네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 아까는 농담이었고 누가 이기더라도 축하해주죠!”
여러 대화를 나눈 뒤에 좌석 때문에 갈라졌고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긴 채, 대한민국 서포터즈들에게 배정된 자리로 이동했다.
“한우 씨! 여기요!”
거기엔 한인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유니폼 맞춘 거예요?”
“네! 다 지우 선수 유니폼으로 맞췄습니다!”
백 명이 넘어가는 한인회 사람들은 모두가 유지우의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오늘 이기겠죠?”
“그럼요! 무조건입니다! 독일도 이기지 않았습니까! 아르헨티나를 이기고! 4강 신화의 재현! 시나리오 딱 나왔습니다!”
“크으! 이러니까 응원할 맛이 나네요.”
“아, 그리고 깃발도 올 겁니다.”
“깃발이요?”
“특수 제작했거든요.”
펄럭.
멀리서 걸어오는 거대한 깃발을 든 사람.
그 사람은 차명훈이었다.
“아버님, 어머님! 오셨습니까!”
“명훈 씨!”
거대한 깃발을 내려두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깃발에 뭘 적은 거예요?”
붉은 악마 그림이 있는 건 얼추 보였지만, 다른 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차명훈이 뒤이어 온 맥스와 깃발을 쫙 펼쳤다.
‘AGAIN 2002’
현재 대한민국에서 퍼지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4강 신화를 다시 한번 보길 기도하면서 적었습니다!”
“좋은 단어네요.”
유한우는 문구를 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지우 선수 힘나게 해줘야죠! 하하하하!”
“역시 명훈 씨! 우리 아들이 든든하겠어요!”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 아버님이 지도 편달을 잘해주신 덕분이죠.”
“명훈 씨가 옆에서 잘 케어해줘서 지우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잖아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자 잠시 후, 선수들이 워밍업을 위해 필드로 나왔다.
“아드으으으으으을!”
“지우야! 누나 왔다아아아아아!”
대한민국 팬들은 워밍업을 하러 나온 선수들을 보며 열렬한 환호를 보내줬다.
아르헨티나 팬 중 몇몇은 대한민국 선수단에 시선이 갔다.
등번호 10번.
유지우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 저기 유다!”
“어디? 어디?”
“저기 10번 저지 입고 있는 선수.”
“진짜네! 유!!!”
아르헨티나 관중 중 절반 이상은 보카 주니어스 팬들이라 유지우를 좋아하는 팬들도 많았다.
“…하필 유의 나라랑 붙다니, 슬프네.”
“그러니까 귀화했으면 우리랑 계속 올라갈 텐데 아쉬워.”
보카 주니어스 팬들은 라봄보네라에 유지우가 적 팀으로 등장하자 뭔가 어색하고 슬펐다.
그런 관심 속에서 선수들은 가벼운 워밍업 후,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 * *
월드컵 8강 상대인 아르헨티나는 우승 후보들 가운데서도 전력이 높았다.
안정적인 수비진.
활동량이 많고 공격적인 성향이 짙은 미드필더진.
돌파력과 결정력이 좋은 공격진.
삼박자가 고루 갖춰져 강력한 우승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그에 비해 한국은 언제 탈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전력이었다.
‘탈락 1순위.’
우승 후보 중 한 곳인 독일을 이겼다곤 해도 월드컵 시작할 때부터 붙어 있던 꼬리표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긴장되나?”
-네!
“…네?”
선수들의 대답에 주앙 달루트는 순간 놀랐다.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줄 알았으니까.
당황한 주앙 달루트를 보고 유지우가 에스파냐어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긴장 안 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 하하하하하! 솔직해서 마음에 든다!”
이어서 선수들에게 통역을 해줬고 주앙 달루트는 전술을 설명할 작전판을 두드리며 오늘 사용할 전술에 대해 설명했다.
어제저녁까지 지겹도록 듣던 단어들이지만, 선수들의 집중력은 최고조였다.
‘표정이 좋아.’
시작하기 전부터 패색이 짙어 보였지만, 선수들의 표정에는 쉽게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주앙 달루트는 전술 설명이 끝난 뒤, 입장하기 전, 선수들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더 위로 올라갈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갈지는 이제 너희들의 발에 달렸다.”
- “네!”
선수들을 한 차례 보고선.
“필드 위에서 후회를 남기지 마.”
마치 져도 괜찮다는 말처럼 들렸다.
사실 주앙 달루트는 아르헨티나전을 준비하면서 여러 전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독일전에서 체력 소모가 극심해서 이번 경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준비한 건 최선이다. 이제 남은 건 선수들을 믿는 것뿐이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선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제일 높은 곳!”
- “…….”
“너희들의 목표는 어디까지지? 이미 이룰 거 다 이뤄서 괜찮나?”
- “아닙니다!”
“이길 가능성은 있다! 독일전 때처럼 1%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승리를 쟁취하자!”
- “네!”
“전반전만 버텨라, 후반전에는 급해진 아르헨티나의 실수를 기회로 만들어 승부를 결정짓는다!”
- “네!”
“가자!”
선수들은 사기를 끌어 올린 다음 라커룸을 나와 필드로 입장하는 통로로 갔다.
대한민국 선수들과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나란히 섰고 가장 뒷열에 선 유지우는 옆에선 디에고 로시와 인사를 했다.
“찌우!”
활짝 웃는 디에고 로시.
“유.”
담담하게 이름을 부르는 기예르모 다린.
“여기서 만나네.”
무심하게 대답하는 유지우까지.
보카의 3대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자 하비에르 카세로도 슬쩍 다가왔다.
“몸 상태는?”
“최고죠.”
“다행이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리고 앙헬 몰리야도 다가왔다.
“오, 유가 그렇게 말하니까 기대되는데?”
“너희들만 인사하고 있냐?”
“치사하게.”
에르네스토 게레라, 훌리안 마르티네즈, 파우스토 바르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에 합류한 보카 주니어스 선수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경기 입장 시간이 임박해지자 말소리는 사라졌다.
“안 봐준다.”
디에고 로시가 정면을 바라보며 주먹을 내밀자 유지우도 마찬가지로 주먹을 뻗어 디에고 로시의 주먹을 살짝 쳤다.
“누가 할 소릴.”
주심의 뒤를 따라 양 국가 선수들은 나란히 필드 쪽으로 걸어갔다.
늘 지났던 라봄보네라의 통로.
보카 주니어스 유니폼이 아닌 대한민국 유니폼을 입고 입장하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척.
필드로 한 발 내딛자.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라봄보네라에 모인 수많은 인파가 내뿜는 열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 아르헨! 아르헨! 아르헨!
-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시작부터 양 국가의 팬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월드컵 8강전! 대한민국 vs 아르헨티나! 양 국가 선수들이 라봄보네라로 입장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축구 팬들에겐 유지우 선수가 소속된 보카 주니어스의 홈구장으로 많이 알려진 스타디움이죠.]
귓가를 울리다 못해 아프게 만드는 커다란 함성.
아르헨티나를 연호하는 소리 속에서 유지우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살짝 들렸다.
“유!”
그들은 보카 주니어스 팬들이었다.
“우리는 너를 응원하지 못하지만! 응원할게!”
“그게 무슨 소리야?”
“마음 한편은 유를 응원하겠다는 소리지!”
그렇게 스타디움을 울리던 커다란 함성은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서자 어느덧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양 나라의 국가가 연주됐다.
[아르헨티나 국가가 연주된 뒤, 이제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연주됩니다.]
- 동해 물과~ 백두산이~
선수들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제창했다.
양 나라의 국가 연주가 끝나고 선수들은 악수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대한민국 선수 중 제일 마지막에 있는 유지우에게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잘해보자.”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보카 주니어스를 비롯해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는 선수들도 있었으니까.
“유.”
기예르모 다린과 가볍게 포옹했고 디에고 로시와도 포옹했다.
“얘기는 경기 끝나고 실컷 나누자.”
“그래.”
간단하게 말을 나눈 후, 디에고 로시는 아르헨티나 진영으로 달려갔다.
[마지막으로 디에고 로시와 인사를 나눕니다.]
[팀 동료들과 적이 되어 싸우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보카 주니어스에서 호흡을 맞춘 선수들과 보카 주니어스의 홈에서 싸워야 한다니…. 마음이 복잡할 겁니다.]
이곳은 유지우에게 홈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홈이었다.
관중 비율도 아르헨티나 팬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이라 한국 선수들은 살짝 긴장했다.
애써 긴장감을 털어내려고 했고 포지션으로 가기 전, 선수들은 어깨동무하며 원을 둘렀다.
“감독님이 하신 말씀 다들 알지?”
주장인 김기하가 말을 시작했다.
“우리 발로 우리 미래를 결정짓는다.”
- “네.”
“집에 돌아가는 건 최대한 늦게 가자.”
- “네!”
“우리는 대한민국! 죽을힘을 다해! 적을 쓰러트리자!”
- “아아악!”
김기하의 선창, 그리고 다른 선수들의 후창 후에 포지션으로 갔다.
후우.
포지션에 선 유지우는 긴 호흡을 내뱉고 주위를 둘러봤다.
늘 봤던 풍경.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입장이 달랐다.
같이 뛰었던 동료들과 적이 되어 마주 보며 서 있으니까.
더구나 서 있는 곳이 오른쪽 측면이라서 그런지 관중석에서 하는 말이 간간이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널 응원 못 해! 이해해줘!”
아르헨티나 팬들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관중석.
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 국민의 절반이 사랑하는 보카 주니어스 팬의 비율은 절반 이상이었다.
“다치지 마!”
“유!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보카 주니어스 유니폼을 입고 역사를 세운 선수기에 애정도가 엄청났지만, 지금은 명백한 적이라 마음이 뒤숭숭했다.
“…씁쓸하네, 뭔가.”
“그러니까, 늘 여기서 유의 응원가를 불렀었는데.”
씁쓸한 건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유가 아르헨티나로 귀화했으면 마음 놓고 불렀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오늘은 유를 응원할 순 없어.”
“아쉽지만, 어쩌겠어. 응원가는 리그 때, 실컷 불러주자고!”
“아르헨티나! 4강! 결승! 그리고 우승까지 가자!”
사람들의 아쉬운 소리와 함께.
삐----익!
대한민국 vs 아르헨티나.
주심의 휘슬이 불리며 2030 월드컵 8강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