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삐익-! 삐익-! 삐이이이이익-!
전반 종료 휘슬이 울리며 대한민국은 한 점 뒤진 0 – 1로 전반전을 마무리했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후우.”
전체적으로 독일전보다 고전하고 있어 라커룸 분위기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고개 들고 여기 봐라, 아직 진 거 아니니까.”
분위기를 읽은 주앙 달루트는 선수들을 집중시킨 뒤, 모니터를 가리키며 전반전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선수 간격.
압박 타이밍.
공격 시에 패스 타이밍.
선수들의 소통 부재.
꼬집을 문제는 차고 넘쳤다.
그래도 괜찮은 점은 수비 집중력이 높아 전반전을 1실점으로 마무리했다는 점이었다.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좋은 점도 있었던 전반전이었다.”
- “…….”
“독일전처럼! 후반전에 역전해서 다시 한번 모두를 놀라게 할 각오는 벌써 사라진 거냐?”
- “아닙니다!”
“이대로 아르헨티나에 잡아먹힐 건가?”
- “아닙니다!”
경기 내용은 절대적으로 불리하긴 하지만 선수들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좋아, 그러면 후반전에는 약간의 변화를 준다.”
주앙 달루트는 후반전에 사용할 전술을 설명했고 그걸 듣자 선수들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놀라움은 사라졌다.
주앙 달루트가 얘기한 건 아르헨티나전을 준비하면서 설명한 작전 중 하나였으니까.
.
.
.
- 와아아아아아아!
필드로 들어오는 선수들을 발견한 팬들은 환호를 보냈다.
관중 중에는 보카 주니어스 팬들도 있어서 필드로 들어오는 유지우를 발견하고 반가워했지만,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
가만히 지켜보던 남성 한 명이 입이 근질거렸는지 소리쳤다.
“기죽지 마! 유!”
“야! 상대 선수한테 뭐 하는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인데? 난 아르헨티나 사람이긴 하지만 유의 팬이기도 해!”
남성을 시작으로 보카 주니어스 팬들은 유지우를 응원했다.
홈팀 팬들이 원정팀 선수를 응원하는 건 이색적인 광경이라 기자들은 흥미롭다는 듯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고마워요.”
유지우는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려준 뒤에 자리로 걸어갔다.
“어?”
아르헨티나 팬들은 유지우의 모습에서 전반전과 다른 점을 발견했다.
“…유의 팔에 저게 뭐야?”
오른쪽 팔에 있는 노란 완장.
그건 팀의 주장 완장이었다.
“유가 왜 주장 완장을…?”
유지우가 주장 완장을 차고 필드로 들어오자 대한민국 관중들은 모두 놀랐다. 그중에서 제일 놀란 건 가족들이었다.
“여보, 우리 아들 팔에 저거 주장 완장 맞지?”
“…맞는 거 같은데?”
“우리 아들이 대표팀 주장?”
“진짜? 진짜야? 진짜냐고!”
유한우와 서설희는 서로 끌어안으며 기뻐했고 누나인 유민하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빈아, 이거 실화야? 내 동생이 대표팀 주장이 됐어!”
“보통 주장이 빠지면 그다음 고참이 차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아무렴 어때! 내 동생만큼 주장에 어울리는 선수가 어디 있다고!”
“그건 그래.”
옆에서 캠으로 관중석 곳곳을 찍는 강주현이 긍정적으로 말하자 유민하는 활짝 웃었다.
“거봐! 주현이도 그렇다고 하잖아.”
“하긴 지우가 제일 잘하긴 하니까.”
사람들이 놀라는 사이, 유지우는 대한민국 진영으로 걸어갔다.
‘아직 안 끝났어.’
남은 시간은 후반 45분.
어떻게든 동점 골을 넣어야만 했다.
후반전 시작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
선수들이 포지션으로 가서 서자 중계 카메라는 선수들을 찍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 변화가 있습니다. 김기하 선수가 나가고 임한선 선수가 들어왔군요.]
[임한선 선수는 오른쪽 윙인데 왜 중앙 미드필더를 빼고…. 어… 저거 보십시오, 유지우 선수의 팔에!]
그러다가 대한민국 중계 카메라는 유지우의 모습을 잡았고 모두가 팔에 있는 주장 완장을 봤다.
[주장 완장입니다! 김기하 선수가 나가면서 유지우 선수가 대신 완장을 찼군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유지우 선수가 서 있는 위치를 보십시오. 측면이 아닌 중앙입니다!]
유지우가 서 있는 위치는 오른쪽 윙어가 아닌 중앙 미드필더, 정확하게는 중원 다이아몬드의 꼭짓점인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였다.
삐----익!
대한민국 진영의 파격적인 변화를 본 사람들의 놀람이 가시기도 전에 월드컵 8강 후반전이 시작됐다.
* * *
1점은 독일전에서도 충분히 극복한 점수 차이라 한국 선수들은 집중해서 아르헨티나의 틈새를 노렸다.
[유지우 선수가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맡으며 대한민국의 공격을 이끌기 시작합니다!]
아르헨티나 감독 후안 페케르만은 유지우의 위치를 보곤 살짝 놀란 눈치였다.
‘윙인 선수를 중앙으로?’
예상하지 못한 수를 놓자 후안 페케르만은 라인 가까이에 서서 유지우를 관찰했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지우의 플레이를 유심히 보던 후안 페케르만은 주앙 달루트가 유지우를 왜 중앙으로 올렸는지 알아차렸다.
“유가 가진 플레이 메이킹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거군.”
유지우의 플레이 메이킹의 위험도는 분석을 통해 잘 알았다.
측면이 아닌 중앙.
측면에만 국한된 플레이 메이킹이 필드 전체로 영향력을 끼칠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적절한 지시를 내리며 유지우의 압박 강도를 높였고 유지우는 침착하게 볼을 돌리며 기회를 살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그렇게 패스로 공간을 만들더니.
타다다다닷-!
순간적으로 마크하는 훌리안 마르티네즈를 따돌리며 뒷공간으로 쇄도했다.
뻐—엉!
타이밍에 맞춰 후방 미드필더 최남일이 시도한 기습적인 스루패스가 아르헨티나 진영을 갈랐다.
[최남일 선수의 패스으으으으으으!]
산티아고 메디나와 훌리안 마르티네즈가 유지우를 쫓아갔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주력 차이가 심해서 따라가질 못해.’
수비형 미드필더들과 격차를 벌리자 에르네스토 게레라가 달려 나와 방해하려고 했다.
좁혀지는 거리, 눈앞의 공간이 전부 사라지기 전에 한 템포 빠르게 슈팅을 때렸다.
뻐---엉!
중심을 앞으로 가져가며 왼발로 잔뜩 감아서 찬 슈팅.
[아아아아아! 유지우 선수의 기습적인 중거리 슈팅이 골대 위로 지나갑니다!]
그 슈팅은 회전이 덜 들어가면서 아슬아슬하게 골대 위로 지나가고 말았다.
[주장 완장에 대한 부담감이 전혀 없어 보이는 플레이! 자신감이 넘칩니다!]
[희망이 살짝 보이기 시작합니다! 유지우 선수가 골을 넣어준다면! 이 경기! 어떻게 될지 아직 모릅니다!]
유지우에게 가는 볼의 빈도가 높자 아르헨티나는 유지우를 고립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두 명이 아닌 세 명.
마크맨을 붙여 필드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다.
툭.
단 한 번의 터치.
유지우는 세 명의 선수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비어 있는 공간으로 달려갔다.
- 오오오오오오!
[깔끔한 퍼스트 터치! 압박하는 선수들을 순간적으로 벗겨냅니다!]
[굉장한 센스입니다. 당황하지 않고 아르헨티나를 상대하는 유지우 선수! 대한민국의 에이스답습니다!]
그럴수록 아르헨티나의 압박은 더 거세졌다.
독일처럼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플레이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우 유에게 최대한 공간을 내주지 마라.’
후안 페케르만의 지시대로 선수들은 유지우가 기회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대한민국은 유지우 선수를 중심으로 꾸준하게 공격 작업을 하고 있지만, 아르헨티나가 그걸 눈치채고 강도 높은 압박을 합니다.]
[이럴 때는 주위 선수들이 더 도와줘야죠. 유지우 선수에게 가해지는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선수 중 혼자서 해결하는 능력을 갖춘 선수는 유지우가 유일했다.
그래서 유지우가 가지는 부담감이 엄청났다.
퍼---억!
집중되는 압박.
투---욱!
볼을 살려서 패스를 해줘도 살리지 못하는 팀원.
“…하아.”
역습 상황에선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뭔가 생각한 대로 움직여주길 원했는데 그게 독일전 때보다 이뤄지지 않았다.
독일과 연장전까지 혈전을 치르면서 쌓인 피로.
그게 서서히 대한민국 선수들의 다리를 무겁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쪽 말고!”
“뒤로… 아.”
주변에서 받쳐주는 선수들의 차이가 경기의 차이를 만들었고 대한민국의 공격이 실패하자 아르헨티나의 역습 상황이 이어졌다.
[강예수 선수가 무리하게 돌파를 시도하다가 볼을 빼앗깁니다! 이어지는 아르헨티나의 역습! 볼 전개가 빠릅니다!]
[순식간에 오른쪽 측면의 앙헬 몰리야에게! 앙헬 몰리야가 올라오면서 반대 사이드로 길게 넘겨줍니다!]
빠른 패스 전개에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대한민국의 수비는 흔들렸고 디에고 로시는 앙헬 몰리야가 찔러준 패스를 안정적으로 잡아놨다.
그와 동시에 밀착 마크하던 김윤태가 몸을 부딪치자 디에고 로시는 등지며 볼을 지켜냈다.
툭.
틈을 보던 디에고 로시는 발뒤꿈치로 볼을 차서 김윤태의 다리 사이로 볼을 빼냈다.
- 오오오오오오!
군더더기 없는 드리블, 그리고 김재민이 앞을 막는 걸 보고.
툭.
툭.
기예르모 다린과 원투 패스로 대한민국 수비진을 완전히 열어버렸다.
[골키퍼와 1 vs 1!]
골키퍼의 위치를 살핀 디에고 로시는 드리블하는 자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자세로.
뻐---엉!
왼쪽 구석으로 낮게 깔아 찼다.
철렁.
골키퍼가 다이빙했으나 타이밍을 빼앗겨버린 탓에 볼에 닿지 못했다.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아르헨티나의 차세대 에이스, 디에고 로시가 경기의 격차를 벌립니다.]
[드리블부터 슛까지 정말 부드러운 동작이네요…. 슛 타이밍을 잡지 못할 만큼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졌습니다.]
디에고 로시는 활짝 웃으며 동료 선수들과 함께 기뻐했고 전광판의 스코어는 바뀌었다.
[대한민국 0 – 2 아르헨티나]
이것으로 약간 있던 희망의 불씨도 바람이 불며 꺼져갔다.
[경기 내용이 너무 불리하게 흘러가네요…. 남은 시간은 30분, 경기는 2 – 0이 됐습니다.]
눈으로 본 압도적인 기량 차이.
오히려 이 점이 유지우를 자극했다.
“볼 주세요.”
* * *
60분.
0 - 2로 지고 있는 한국은 어떻게든 한 점을 만회하려고 필사적이었고 유지우는 최전방과 최후방을 넘나들며 경기 자체를 조율했다.
“여기로 줘!”
고립된 선수를 구해주고.
뻐---엉!
단숨에 뒷공간을 열어버리는 기습적인 패스로 아르헨티나를 당황하게 했다.
무엇보다.
모두를 소름 돋게 한 건 62분에 나온 단 하나의 플레이였다.
[대한민국의 역습! 유지우 선수가 볼을 잡고 드리블을 하지만 선수들의 대응이 늦습니다! 다 뒤에 있습니다!]
반응이 늦은 대한민국 선수들, 게다가 아르헨티나의 수비 백업도 빨라 금세 돌파 경로가 좁아졌다.
그래서 유지우는 무리해서 더 들어가지 않고 템포를 늦췄다.
스르르르륵.
볼을 발바닥으로 끌며 수비수들을 끌어당겼다.
유지우를 막으려고 중앙으로 밀집된 수비 진형.
그때 유지우는 손짓으로 몰래 사인을 내렸고 그걸 본 김윤태가 오버래핑했다.
아직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유지우는 바로 오른쪽으로 패스하지 않았다.
스윽.
왼쪽으로 전개하는 척하면서 볼을 한 번 접으며 김윤태가 올라오는 타이밍을 만들었고 타이밍에 맞춰 오른쪽으로 ‘툭’ 찔러줬다.
마치 잠깐 필드 위의 시간이 멈춘 착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유지우의 플레이에 매료되어 갔다.
“…허어, 보면 볼수록 놀랍네.”
축구를 아는 전문가들은 유지우의 플레이를 넋 놓고 봤다.
[김윤태 선수의 오버래핑! 라우타로 몰리나가 따라가는데요!]
라우타로 몰리나와 거리가 좁혀지자 김윤태는 노룩 힐패스로 볼을 뒤로 흘렸다.
그러자 임한선이 노마크가 됐고 크로스가 올라갔다.
[크로스으으으으으으! 어느덧 골대 앞까지 쇄도한 유지우 선수가 점프를 뛰며 헤더어어어어!]
머리에 맞춰 돌려놓은 게 아슬아슬하게 골대를 벗어나고 말았다.
[아!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와, 근데 방금 연결 과정 보셨습니까? 유지우 선수로 시작해서 유지우 선수로 끝나는 플레이였습니다.]
자기 흐름대로 경기를 만들어가는 능력에 보는 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유지우는 대한민국을 홀로 이끌다시피 했고 볼을 잡는 순간.
타다다다닷-!
대한민국 선수 전체가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툭.
툭.
발등으로 볼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
사실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드리블이었지만,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다들 긴장했다.
‘이번에는 대체 뭘 하려는 걸까.’
2점 리드하고 있으면서도 퍼지는 묘한 긴장감.
그리고.
타다다다다닷-!
대한민국에서 홀로 빛나는 별 하나가 필드 위에 있는 수많은 별 가운데 가장 환하게 빛나며 필드를 자신의 빛으로 수놓기 시작했다.
- 와아아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