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외계인-105화 (105/383)

제105화

리그 13라운드.

보카 주니어스 vs CD 고도이크루스전.

전반 초반에 하비에르 카세로가 득점하며 [1 – 0]으로 앞섰다.

[아아아아아아! 앙헬 몰리야의 슈팅이 골대를 넘어갑니다!]

슈팅이 아슬아슬하게 골대를 벗어나자 관중석에선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원터치로 빠르게 마무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상대 진영에서 볼을 돌리는 공격적 빌드업으로 점유율까지 챙겨가며 고도이크루스를 몰아붙였다.

“왼쪽으로! 공간 넓게 쓰자!”

그걸 지휘하는 건 하비에르 카세로의 역할이었다.

[보카 주니어스의 패스 정확도를 보십시오, 작년과 확연하게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이번 시즌을 준비하면서 세바스티안 란첼라 감독이 패스 정확도를 신경 썼다고 했는데 그 부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허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게 허리듯이 축구에서도 허리가 중요했다.

‘좋아.’

만족스러운 표정.

그리고 세바스티안 란첼라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곳은.

뻐---엉!

보카 3대장이 있는 공격진이었다.

든든한 중원.

치명적인 공격진.

보카 주니어스의 균형은 최고 수준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전반 34분.

하비에르 카세로와 앙헬 몰리야가 살짝 라인을 내린 것을 본 유지우가 중앙으로 이동하자 카를로스 로호가 빈 곳으로 오버래핑을 했다.

[유가 중앙으로! 그리고 빈 오른쪽을 카를로스 로호가! 이번 시즌 보카 주니어스가 자주 보여주는 패턴이죠.]

툭.

침투하는 카를로스 로호를 본 유지우가 패스를 내주고 안으로 달려갔다.

[유가 오른쪽으로 보낸 패스! 카를로스 로호가 잡아서 오마르와 대치!]

오마르가 어떻게든 막으려고 몸을 부딪쳐 보지만, 카를로스 로호의 덩치는 190cm라 몸싸움으로 밀리지 않았다.

퍼----억!

몸싸움을 버티곤.

고개를 들어 선수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찰나의 순간, 침투하는 유지우를 발견하자 왼발로 노룩 패스를 찔렀다.

- 오오오오오오오!

상대 수비수들이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른 타이밍의 패스.

고도이크루스의 뒷공간이 완벽하게 열렸다.

[카를로스 로호의 절묘한 패스으으으으으!]

[비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유입니다아아아아! 유!!!]

고도이크루스 수비수들이 손을 들어 오프사이드를 외쳐보지만, 부심의 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달려!”

폭발적인 스피드로 공간을 찢은 유지우는 골키퍼가 나오는 걸 보고 볼을 잡지 않았다.

투----웅.

감각적인 논스톱 로빙 슛.

볼의 힘을 그대로 이용한 로빙 슛에 골키퍼는 손을 뻗어도 닿지 못했다.

[슈우우우우우우우웃!]

볼은 왼쪽 구석으로 정확하게 들어가며 골망을 흔들었다.

마치 한순간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착각.

철렁.

골망이 흔들리자 시간은 다시 흘렀다.

[고오오오오오오올! 유가 골을 넣습니다! 이걸로 7골 13도움을 기록하며 20개의 공격 포인트를 달성합니다!]

[50개 공격 포인트를 전반기에 세울 기세입니다! 어메이징한 실력! 보카의 황제가 라봄보네라를 환호로 가득 채웁니다!]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폭발하는 보카 주니어스 팬들.

금빛 물결은 필드로 들어올 것처럼 요동쳤다.

“카를로스!”

골을 넣은 유지우는 묵묵히 포지션으로 돌아가려는 카를로스 로호에게 달려갔다.

이상하게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사람들을 경계하고 가까이 지내는 걸 꺼리는 모습.

그래서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디에고 로시, 기예르모 다린, 보카 주니어스 선수들이 자신을 어둠에서 꺼내줬듯이 이번엔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고 싶었다.

“나이스 패스!”

유지우는 달려가서 카를로스 로호에게 안겼다.

평소에 표현을 안 하는 유지우의 행동에 보카 주니어스 선수들은 물론 팬들까지 놀랐다.

[오! 유가 저렇게 표현한 적이 있나요?]

[대부분 유가 축하를 받는 입장이었는데 누군가를 축하해주는 건 봤어도…. 저렇게 적극적으로 축하해주는 건 처음 봅니다.]

“저기 봐봐.”

주변 시선을 무시한 채 유지우가 작게 말하며 가리킨 곳.

“…….”

그곳을 본 카를로스 로호는 순간 울컥했다.

- “카를로스으으으으!”

자신의 번호, 21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보육원 원장과 아이들이 있었다.

“보카 주니어스에 온 걸 환영해.”

유지우가 준비한 카를로스 로호의 입단 선물이었다.

직접 보육원에 찾아가서 원장과 협의해 아이들을 데려오는 데까지 유지우는 카를로스 로호에게 비밀로 했다.

“내 선물 어때?”

카를로스 로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난 저 아이들이 날 원망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릴 때 한 실수로 아이들이 자기를 무서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원망은 무슨.”

“응?”

“마르티나가 그러더라. 세상에서 제일 멋진 오빠가 있다고.”

“…….”

“이름이 카를로스라고 하던데?”

카를로스 로호는 웃고 있는 아이들 속에서 우는 아이를 발견했다.

여섯 살의 소녀에서 이제 제법 어른티가 나는 열일곱이 된 소녀.

바람이 불어오자 살짝 내린 앞머리가 걷히며 보이는 작은 흉터.

이마에 찢어진 흉터는 세월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너 그거 모르지?”

“…뭘.”

“마르티나랑 애들이 너 보려고 라싱 클루브 유스 리그에 자주 놀러 간 거?”

“…….”

“네가 좀 다가가 봐. 애들은 나만 만나면 너 잘 지내고 있는지부터 물어보더라.”

주르르륵.

마르티나가 눈물을 흘리자 카를로스도 눈물을 흘리며 웃음을 지었다.

[어? 카를로스 로호가 눈물을 흘리면서 웃습니다!]

[경기에서 웃는 걸 처음봅니다. 저렇게 웃을 줄 아는 선수였군요!]

웃는 카를로스 로호를 본 유지우는 포지션으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내일 저녁에 우리 아버지 식당에서 같이 밥 먹을래?”

평소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어.”

전혀 다른 대답이 들렸다.

그러곤 우물쭈물하더니, 한마디 더 했다.

“저 아이들도 같이 가도 될까?”

카를로스 로호가 가리킨 곳에는 유지우가 초대한 보육원 아이들이 있었다.

“당연한 걸 묻냐.”

활짝 웃으면서 말하는 유지우를 보며 카를로스 로호는 그동안의 벽을 조금씩 허물었다.

“카를로스으으으으으!”

“나이스 어시스트!”

“너 웃을 줄도 아는구나!”

“크크크크큭, 완전 유랑 똑같다니까.”

그 뒤, 달려온 선수들에게 축하받으며 보카 주니어스 선수단은 그렇게 한층 단단해졌다.

* * *

다음날 오후.

엔리케 보토는 회장실 안에서 라몬 카세레스에게 유지우의 재계약 최종본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조항은 그 정도면 됐고… 주급은요?”

“주급은 600만 페소(한화 약 6,100만 원)입니다.”

원래 500만 페소였던 걸 차명훈이 협상 끝에 600만 페소로 올려받았다.

“그리고 여기.”

엔리케 보토가 가리킨 곳.

거기엔 ‘바이아웃 조항’이 있었다.

“바이아웃 조항입니다. 이 부분에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바이아웃 조항은 책정된 금액만 지불하면 구단은 건너뛰고 선수와 다이렉트로 협상할 수 있는 프리패스권이었다.

그래서 보카 주니어스는 유지우의 바이아웃 조항 금액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사전에 미스터 차가 요구했던 50억 페소에서 더 올려 80억 페소로 책정했습니다.”

80억 페소.

한화로 약 813억이었다.

“얘기했던 것보다 높군요.”

“이 정도면 괜찮은 금액이라고 봅니다. 유에게 100억 페소가량의 금액을 지불하겠다는 의사를 가진 클럽들도 여럿 있으니까요.”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 클럽들은 유지우를 ‘1,000억’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쁘지 않네요.”

전체적인 계약서를 보고 라몬 카세레스 회장은 긍정적이었다.

“이대로 진행할까요?”

“아,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주급 부분이요. 600만 페소보다 조금 더 올리죠.”

“여기서 더요?”

라몬 카세레스 회장의 말에 엔리케 보토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믿기지 않았다.

방금 자기가 들은 말이 잘못된 말이 아닌지 의심이 들 때쯤, 라몬 카세레스 회장이 말했다.

“우리 클럽의 위상을 드높여준 선수에게 더 씁시다.”

짠돌이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쓸 때는 쓰는 쿨한 사람이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엔리케 보토를 보고 라몬 카세레스 회장은 미소를 지었다.

“제 결정이 의아하시죠?”

“아닙니다.”

“표정에 다 보여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구단 사람들이나 팬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선수를 상품 취급하는 돈벌레.

팬들이 보는 시선은 딱 이랬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유와 재계약은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떠나기로 한 선수에게 큰돈을 쓰는 건 내키지 않았거든요.”

유지우가 언젠가 떠날 거라고 공표한 만큼 라몬 카세레스는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마음이 서서히 변했다.

‘보카 주니어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응원하며 사랑에 빠진 클럽.

회장의 자리에 앉은 뒤부터는 어떻게든 보카 주니어스를 남미 최고의 클럽으로 만들고자 한마음이 컸던 사람이 라몬 카세레스였다.

“제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아세요?”

“…아뇨.”

“처음에는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달라지더라고요. 그 시점이 이곳을 통과 점으로 여기는 선수들이 많아질 때부터였을 거예요.”

달라진 계기는 이적하는 선수들이 세월이 지날수록 많아져서였다.

배려해주고 최대한 대우를 해줘도 결국에는 뒤통수를 치고 가는 선수들에게 감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렇게 이적하려는 선수들을 최대한 비싸게 팔려고 했고 그러다가 점점 선수들에게 돈 쓰는 게 줄었죠. 어차피 떠날 선수들이니까요.”

“…그러셨군요.”

엔리케 보토는 라몬 카세레스 회장의 옛날 모습은 몰랐다.

“그래서 더는 선수들의 정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최근까지는.”

“……”

“그런데 작년 시즌을 보고 마음이 이상하더라고요.”

점점 침체하기 시작했던 보카 주니어스.

그래서 신경도 날카로워졌었다.

그런데 작년에 보여준 기적.

그 기적이 옛날 보카 주니어스를 처음 맡았을 때를 생각나게 했다.

“계속 떠올라요.”

말을 하다가 물끄러미 책상에 있는 작은 액자를 봤다.

그곳엔 해맑게 마라도나의 손을 잡고 웃고 있는 어릴 적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제가 최고로 사랑했던 선수가요.”

유지우의 플레이가 그의 초심을 떠올리게 한 거였다.

엔리케 보토는 묵묵히 얘기를 들었고 라몬 카세레스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 보려고요. 떠날 선수라도 제가 책임지는 보카라는 곳이 행복한 곳이라고 느낄 수 있게요.”

엔리케 보토는 진심 어린 라몬 카세레스 회장의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속마음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책이었죠?”

“아뇨, 긴 시간 보카를 지켜왔을 회장님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게 돼서 기쁩니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함께 목표를 이뤄 가보죠.”

“그럽시다.”

클럽이 어려울 때, 혜성처럼 나타나 단숨에 리그 최고의 클럽 자리에 올려놓은 선수이자 잊었던 초심을 되찾게 해준 선수.

그 선수가 원하는 건 다 해주고 싶어졌다.

나중에 떠나고 긴 시간이 흘러 보카 주니어스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행복했어요.’

이 말이 나올 수 있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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