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유! 떠나지 마!”
빅클럽들이 관심 있다는 기사가 매일같이 쏟아지자 유지우의 집 앞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거기! 조용히 하세요!”
“더 소란을 일으키면 현행범으로 연행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해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단이 선수 안전을 위해 보낸 경찰들이 사람들을 강제로 해산시켰고 유지우는 2층 방에서 가족들과 톡을 했다.
어머니 : 지우야! 맨유다! 맨유!
누나 : 관상이 딱 맨시티 관상인데 뭘 맨유에요.
어머니 : 관상은 무슨 관상! 우리 아들처럼 잘생긴 선수가 얼간이들만 모인 곳에 왜 가!
누나 : 맹구는 무슨, 황시티지!
어머니 : 짭시티가 낄 자리가 아니란다, 딸아.
누나 : 어머니, 프리미어 리그의 황제는 맨시티입니다. 어머니의 맨유는 퍼거슨경이 은퇴하며 같이 은퇴하지 않았습니까.
어머니 : 너와 나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모양이다.
두 사람이 톡방에서 난리 치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방문을 노크하며 알리샤가 들어왔다.
“엠파나다 좀 했는데 먹을래?”
“아! 감사합니다.”
알리샤는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두며 말했다.
“네가 여기 온 지도 2년이 넘었네.”
“28년에 왔으니까 벌써 그렇게 됐네요.”
28년 10월에 아르헨티나에 오고.
29년 7월에 1군으로 올라가 지금 두 번째 시즌을 뛰고 있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마. 보카는 네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응원할 거야.”
“…아주머니는 안 잡으세요?”
“내가 뭐라고 잡겠어. 네가 조금 더 보카에서 뛰면 좋겠지만, 네가 더 큰 무대에서 뛰는 것도 보고 싶거든.”
“…….”
“그러니까 유.”
알리샤는 유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네가 후회되지 않는 결정을 내려. 주변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너를 위해서…. 알았지?”
“네. 그럴게요.”
“식겠다. 천천히 먹고 다 먹으면 접시는 그냥 둬, 내가 이따가 청소하면서 치울게.”
“항상 감사해요.”
“뭘.”
“아, 그리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할 때까지는 안 가요.”
“정말? 그러면 이번 시즌 끝나고 가겠네.”
“네?”
“이번 시즌에 우승할 거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하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알리샤가 내려가고 유지우는 엠파나다를 한 입 베어 물곤 창밖을 쳐다봤다.
“유!”
경찰들의 통제에도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
‘후회가 안 남는 결정이라.’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역시나 후회가 안 남으려면 답은 하나였다.
‘목표로 했던 걸 다 이루면 이적해야지.’
이적을 결심했는데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보카 주니어스 팬들의 열기였다.
열기만큼은 축구의 나라답게 어느 클럽을 가서도 쉽게 경험하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으니까.
이게 아쉬웠다.
이토록 축구에 진심인 팬들을 두고 다른 곳으로 가도 되나, 망설임도 살짝은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더 큰 무대에서 어릴 때부터 봐온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루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 * *
다음날, 보카 주니어스 훈련장에선 선수들이 훈련한 뒤에 잠시 쉬고 있었다.
“유! 오늘은 크로스바 내기 안 해?”
다음 훈련을 위해 자리에 앉아 수분 보충을 하는 유지우에게 디에고 로시가 다가왔다.
“또 져서 뭐 사주려고?”
“…….”
“응? 왜 말이 없어?”
“이번에는 내가 이길 거거든!”
디에고 로시가 이번에는 이길 거라고 하자 기예르모 다린이 옆에서 조용히 팩폭 했다.
“네가 진다.”
“아니야!”
“254전 254패, 네가 아이스크림을 산 숫자.”
“…….”
“또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싶은 그 마음이 정말 아름답다.”
“이, 이번에는 유가 살 거야!”
“희망 사항 잘 들었다.”
“으아아아아아!”
기예르모 다린의 팩폭에 디에고 로시는 충격에 빠지며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아아아아! 나도 킥 좀 잘하고 싶다!”
“…양심 없다.”
“양심?”
“유 다음 킥 정확도 좋은 게 넌데, 더 좋아지고 싶다고?”
“유는 이겨야지!”
“유는 이미 다른 세상 사람이다. 이기는 거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건 모르지!”
“너만 빼고 다 아는 사실이다.”
디에고 로시는 기예르모 다린의 팩폭에 삐진 척을 했고 두 사람을 본 선수들은 크게 웃었다.
“오늘도 디에고가 사주는 아이스크림 먹는 건가?”
선수들에게 일상이 된 유지우와 디에고 로시의 킥 내기였다.
“100유로씩 내기할까?”
“나한테 1조 유로가 있어도 디에고한테는 안 걸지.”
“맞아.”
“승률 0%인 녀석한테 절대 못 걸지.”
벌떡.
“하비에르!”
디에고 로시가 발끈하는 모습에 선수들은 더 빵 터졌고 유지우는 물을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유! 오늘은 아이스크림 말고 다른 걸로!”
“어떤 거?”
“스테이크! 페보르에서 선수단 전체 회식!”
- 오오오오오오오!
“페보르라면 그 비싼 소고기 전문점?”
“디에고, 감당되겠냐?”
기존 아이스크림 내기가 아니라 스테이크 내기 소식에 선수들이 점점 모였고 유지우는 물을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은 무제한으로?”
“…콜!”
“좋아, 훈련 다 끝나고 하자.”
삐----익!
때마침 리카르도 메사가 휘슬을 불며 선수들을 집합시켰다.
“다 쉬었지?”
“5분만 더요.”
“5분 일찍 은퇴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포지션별로 흩어져! 오후 훈련은 오전 훈련보다 더 힘들 거니까 각오들하고!”
- “네!”
포지션별로 흩어진 선수들은 땀을 흘리며 훈련에 집중했다.
연전연승을 거두며 리그 무패 행진을 하는 중이지만, 그 어디에서도 대충하는 선수는 없었다.
삐—익!
“빠르게!”
삐—익!
“반응이 늦잖아! 그렇게 반응하다가 실점까지 하면 네가 책임질래?”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훈련 때부터 꽉 조였다.
선수들의 땀은 잔디를 적셨고 노을이 질 때가 되어서야 훈련이 종료됐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다들 고생 많았고 내일은 훈련 없으니까 푹 쉬도록!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네!”
그렇게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감독님!”
“왜.”
“유랑 디에고랑 내기하는 데 보고 가시죠.”
“아이스크림 내기?”
세바스티안 란첼라마저 알만큼 두 사람 사이의 내기는 일파만파 퍼졌다.
“아니요. 오늘은 페보르 내기입니다.”
“몇 명이?”
“선수단 전체요.”
“…디에고 지갑 제대로 털리겠구나.”
하비에르 카세로는 세바스티안 란첼라가 디에고 로시를 걱정하는 걸 듣고 빵 터질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감독님도 같이 가시죠.”
세바스티안 란첼라와 몇몇 스태프들도 내기 현장을 찾았다.
두 선수의 앞에 놓인 10개의 볼.
그걸 골포스트에 가장 많이 맞추는 사람이 이기는 간단한 내기였다.
삐---익!
휘슬이 울리며 디에고 로시부터 시작했고 각자 10개 모두 성공했다.
“이번에 몇 번까지 갈까?”
선수들에겐 익숙했다.
둘 다 킥 정확도로는 클럽을 넘어 리그에서 순위권을 다투는 선수들이니까.
까—앙!
까—앙!
까—앙!
골포스트를 맞춘 것도 수십 번이 넘어갔고 먼저 실수한 쪽은 디에고 로시였다.
“아아아아아!”
디에고 로시는 10개 중, 9개를 성공시켰다.
“오오오오! 디에고한테 가능성이 있는데?”
“어?”
“아닌가?”
“디에고 표정 봐봐.”
선수들은 떠들다가 디에고 로시의 표정을 봤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고작 한 개 실패했는데 표정이 밝지 않았다.
“…아.”
그제야 알았다.
“유는 10개 이하로 실패한 적이 없지.”
유지우는 크로스바 내기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걸.
까---앙!
맑은 골포스트 소리가 울리자 디에고 로시는 드러누웠다.
“아아아아아! 또 졌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디에고 로시.
“응? 기예르모, 어디에 전화해?”
“페보르에 예약 전화하고 있습니다. 코치진까지 다 해서 34명, 7시로 예약하겠습니다.”
묵묵하고 철저한 기예르모 다린.
“우냐?”
고개를 숙인 디에고 로시를 놀리는 유지우까지.
보카 3대장과 보카 주니어스 선수단의 하루는 오늘도 평화롭게 지나갔다.
아.
물론 디에고 로시의 지갑은 평화롭지 못했다.
* * *
훈련이 끝난 늦은 저녁.
보카 3대장은 집에 가기 전, 유지우 아버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늦은 시간에도 식당 안은 와인 한잔하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누구도 세 선수가 밥을 먹는 걸 방해하진 않았다.
“아! 우리 시즌 끝나면 어디 놀러 갈래?”
“여행 가자고?”
“어! 우리 데뷔하고 지금까지 같이 놀러 간 적이 없잖아.”
비시즌 기간에 휴가를 가는 건 선수들에게 일상이었다.
디에고 로시의 말에 기예르모 다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상관없다.”
“유! 어때!”
“어디로 놀러 갈 건데?”
“우선 아르헨티나 근교로 갔다가 점점 사이즈를 키워가는 거지! 나중에는 섬 하나 빌려서 파티도 하고!”
“알았어.”
유지우의 입에서 수락이 떨어지자 디에고 로시는 활짝 웃었고 기예르모 다린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어디로 놀러 갈지 정해볼까?”
“벌써?”
“이런 건 일찍부터 해야지!”
“됐어. 그럴 시간에 훈련이나 해. 그렇게 해서 내 등번호 언제 빼앗으려고?”
“으으으으으!”
“내가 이적하면 빈집털이하게?”
“아, 아니거든! 그 전에 빼앗을 거야!”
“언제?”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적하지 말고 더 있으면 되잖아!”
디에고 로시의 얼굴이 빨개졌고 유지우는 피식 웃으며 밥을 먹었다.
“여행 가는 건 시즌 끝나고 정해도 되잖아. 어디 한 달 동안 갈 거 아니고 길어야 일주일인데.”
“그건 그렇다. 디에고는 놀 생각밖에 안 한다.”
“아니거든!”
세 선수가 밥을 먹는 테이블엔 웃음꽃이 피었다.
디에고 로시는 두 사람을 째려보며 삐진 티를 냈지만, 어차피 1분 뒤에 풀릴 게 분명했다.
“내기하자!”
역시나 1분 뒤에 언제 삐졌냐는 듯 해맑게 내기하자는 말에 유지우는 물을 마시며 얘기했다.
“또?”
“엘 수페르클라시코! 거기서 누가 더 골 많이 넣는지!”
“벌칙은?”
“시즌 끝나고 여행 가는 거! 비용 전액 부담! 어때?”
디에고 로시의 말에 두 사람은 놀랐다.
“…감당되겠냐?”
“난 이긴다는 마인드야.”
디에고 로시가 웃으며 말하자 기예르모 다린이 갈비를 씹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렇게 말하고 패배한 날이 훨씬 많다.”
발끈하는 디에고 로시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음식을 다 먹은 뒤, 언제나처럼 사람들에게 사인해주고 사진 촬영을 해줬다. 어린아이가 유지우에게 사인받으며 말했다.
“…정말 떠나는 거예요?”
울먹이면서 말하는 어린아이.
그 아이가 한 말에 식당 안은 침묵으로 뒤덮였다.
모두가 유지우를 봤다.
어떤 대답을 할지 기다렸다.
“응.”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이는 대답을 듣자 더 울상이 됐고 유지우는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보카를 너무 사랑하고 보카에서 뛰는 게 행복하긴 하지만… 그래도 세계적인 선수들과도 싸워보고 싶거든.”
보카 주니어스에서 뛰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이미 이곳에서 이룰 건 대부분 이룬 상태라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내가 어디를 가든.”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어디서 뛰든.”
약속한 대로 모든 대회에서 우승하고 나면 이곳을 떠나기로.
“보카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