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괜찮아?”
기예르모 다린은 쌍코피를 흘린 뒤 잠깐 필드 밖으로 나가 응급처치를 받고 다시 들어왔다.
“괜찮다.”
“코피도 골이랑 같이 노린 거야?”
“난 그냥 필사적으로 볼을 골대 안으로 넣으려고 했을 뿐이다. 노린 건 아니다.”
“오.”
“어떤 일이 벌어져도 골만 넣으면 된다. 그게 스트라이커의 역할이라고 배웠다.”
기예르모 다린은 스트라이커를 하려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골 결정력이 뛰어났다.
어떤 상황에서든 골을 노릴 수 있는 재능.
그건 유지우와 디에고 로시를 비롯해 보카 주니어스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리그 득점 3위.
이 기록이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까.
“다음에는 안면이 아니라 머리로 넣어.”
“응!”
“대답은 잘하네.”
“대답만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
기예르모 다린은 자기 위치로 갔고 유지우도 웃으며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삐----익!
잠시 후, 경기는 다시 진행됐다.
* * *
엘 수페르클라시코는 세계에서 가장 거친 더비,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봐야 하는 더비로 축구 팬들에게 유명했다.
위이이이잉.
“와, 실제로 엘 수페르클라시코를 보니까 열기가 장난 아니네요.”
유지우 다큐멘터리팀도 해외 취재진 틈에서 경기를 보고 있었다.
한국 K리그와는 차원이 다른 열기.
카메라로 영상을 찍으면서 연신 놀랐다.
“…항상 봐왔는데 진짜 신이 축구 하라고 내려준 선수 같아.”
한 명의 축구 팬으로서 유지우의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설렜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재능의 선수.
타국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어린 선수.
이런 선수가 한국 선수라는 게 자부심이 느껴졌다.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관중들이 내뱉는 폭발적인 함성에 귀까지 아팠다.
“지금까지 봤던 경기도 대단했는데 이 경기가 진짜네요.”
“괜히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봐야 하는 더비라고 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걸 피부로 직접 느낄 줄은 몰랐네.”
폭발적인 함성을 지르는 관중석도 카메라에 한 번 담고 다시 필드를 찍었다.
퍼----억!
경기가 진행될수록 선수들의 충돌은 빈번하게 일어났고 폭력 사태까지 갈 뻔한 상황도 많이 나왔다.
콰----앙!
광고판에 처박히고.
“xxxx!”
서로 욕도 하면서 더비전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 보카 주니어스 3 – 0 리버 플레이트 ]
양 클럽은 카드를 수집해가며 부딪쳤고 잠시 후.
삐익! 삐익! 삐-------익!
전반전 종료 휘슬이 울렸다.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리버 플레이트의 유효 슈팅은 1개로 그쳤고 보카 주니어스는 9개의 슈팅을 가져갔습니다!]
[압도적으로 끝난 전반전! 보카 주니어스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유효 슈팅만이 아니라 패스 성공률 부분에서도 리버 플레이트는 잔 실수가 잦았다.
‘76%.’
이것도 높은 수치였지만, 평소 패스 성공률 80%대를 유지하던 리버 플레이트에겐 낮은 수치였다.
“야! 너희 정신 안 차려! 또 보카한테 져야 정신 차릴 거야?”
“내가 이러려고 시즌권을 끊은 줄 알아!”
“이겨야 할 거 아니야! 다른 경기는 다 져도! 보카는 이겨야 할 거 아니냐고!”
필드를 떠나는 리버 플레이트 선수들은 쏟아지는 비난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같은 연고지.
늘 비교되는 대상.
보카 주니어스 선수들만이 아니라 팬들끼리도 신경전이 엄청났다.
예전에 보카 주니어스가 이겼다고 SNS에 자랑한 팬이 리버 플레이트 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사망한 사건처럼 그들에게 이건 즉, ‘전쟁’이었다.
“후반전에 정신 똑바로 차려서 무조건 이겨!”
* * *
리버 플레이트 라커룸은 전쟁에서 패배한 군대처럼 사기가 땅바닥을 기었다.
“이 한심한 경기력은 대체 뭐야! 그러고도 너희가 리버의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감독은 테이블을 치며 쓴소리를 했다.
“유 한 명을 통제하지 못해서 이 꼴이 말이 되냐고!”
경기를 준비하면서 유지우 영상을 상세히 분석했다.
그래서 자신이 있었다.
이번만큼은 작년과 다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전반전의 실수에 발목 잡히지 말고 후반전에는 어떻게든 이 결과를 뒤집어야 한다.”
가뜩이나 경기력 면에서 밀리고 있어서 리버 플레이트가 3 – 0을 뒤집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불가능하다고 보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 “…아닙니다!”
아직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지 않았으니까.
“무조건 넣고 넣고 넣어서! 최소한 무승부로라도 끝내! 이대로 보카한테 지면 우리 우승도 물 건너가는 거야! 알겠어?”
- “네!”
리버 플레이트는 후반전에 반전을 일으켜야 했고 다들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시각 보카 주니어스 라커룸에서는 세바스티안 란첼라의 목소리가 라커룸 밖까지 새어 나올 만큼 컸다.
“경기를 리드하고 있지만! 기회가 있다면 더 넣어! 한 10점까지 꽂아 넣어버려! 리버 녀석들이 우리만 만나면 오줌 질질 싸게 만들어 버리자고!”
대형 모니터에 전반전 영상이 틀어졌고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고칠 점을 말해줬다.
“리버가 후방으로 라인을 내리면 우리는 라인을 전반전보다 더 올린다. 에르네스토, 네가 라인 통제하면서 하프라인까지 올려. 오프사이드 트랩도 사용하고.”
“네.”
“후반에선 역습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사이드는 항상 역습에 대비하고 있고 패스 경로를 잘라내는 것 먼저 생각해.”
누가 볼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압박하고.
어떤 식으로 공격을 풀어갈 건지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자!”
그리고 출전 시간이 임박해지자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선수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엘 모누멘탈을 눈물바다로 만들어라! 그리고 보카로 돌아갈 땐 저놈들이 흘린 눈물 위에 배를 띄워서 타고 돌아간다!”
- “네!”
보카 주니어스 선수들은 라커룸을 나가 통로를 향했다.
디에고 로시, 기예르모 다린, 유지우.
세 사람은 후반전에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풀어갈 건지 얘기를 나누며 필드로 향했고, 그때였다.
“맞다. 기예르모, 너 리카르도한테 뭐 배우지 않았어?”
디에고 로시가 기예르모 다린에게 물었다.
“어, 배웠다.”
“왜 안 써먹어?”
“그거 쓸까?”
“뭔데? 어떤 건지 알아야 도움을 주지.”
“도움은 필요 없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거라.”
뭘 보여줄지 궁금했다.
“…뭐 이상한 거 아니야?”
“아니다. 리카르도가 스트라이커라면 꼭 갖춰야 할 장점이라면서 알려준 거다.”
그렇게 아직 열기가 식지도 않은 필드로 들어갔고.
삐-----익!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서자 잠시 후, 주심의 휘슬이 들리며 후반전이 시작됐다.
* * *
리버 플레이트 포메이션은 전반과 달라지지 않았지만, 몇몇 선수 교체가 이뤄졌다.
툭.
툭.
선수 변화를 주며 흐름을 가져오려고 했으나 보카 주니어스가 펼치는 티키타카에 중원 영향력을 좀처럼 가져오질 못했다.
[보카 주니어스의 패스 정확도가 확실히 작년보다 높아졌습니다.]
[하비에르 카세로와 앙헬 몰리야, 그리고 훌리안 마르티네즈까지, 모두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우승까지 이끈 선수들입니다. 개개인의 수준은 유럽 어디에 내놔도 통할 정도죠.]
유지우는 전반전과 마찬가지로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리버 플레이트 진영에 공간을 만들었다.
원터치로 패스를 돌리며 압박을 피하고.
만약 줄 곳이 없다면 볼을 보호하면서 리버 플레이트의 압박을 요리조리 피하며 줄 곳을 만들었다.
“이 개자식!”
짜증이 난 표정을 지은 아이모헤 페올라는 아예 발목을 노리는 거친 슬라이딩 태클을 했지만.
펄쩍.
유지우는 볼을 발등에 얹은 뒤, 점프를 뛰면서 제쳐냈다.
볼과 한 몸이 된 것 같은 움직임에 관중들의 엉덩이는 들썩였다.
- 오오오오오오!
관중들의 감탄을 들으면서 전방에 있는 기예르모 다린을 봤다.
손을 들면서 사인을 맞춘 뒤.
뻐----엉!
마누엘 갈란의 오른쪽으로 찌른 패스.
골키퍼와 수비수 사이 공간으로 꺾이면서 들어갔고 그사이를 기예르모 다린이 쇄도했다.
전반전 득점 상황과 똑같은 상황.
하지만 그때와 다른 건 마누엘 갈란을 비롯해 리버 플레이트의 수비 배치였다.
퍼----억!
기예르모 다린을 뭉개버릴 작정으로 거리를 좁혔고 빠져나갈 구멍을 막아버렸다.
꼼짝없이 막힐 거라는 생각이 들 때쯤, 기예르모 다린이 선택한 것은.
“으아아아아아아악!”
슬라이딩하며 비명을 지르는 거였다.
[어어어어어어! 주심이 페널티킥을 찍습니다!]
[선수들이 뭉쳐 있던 상황에서 기예르모 다린이 밀리면서 넘어진 것 같거든요? 리버 플레이트 선수들의 항의가 이어집니다!]
삐------익!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일어난 충돌.
유지우는 똑똑히 봤다.
기예르모 다린이 충돌이 있기 전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먼저 쓰러지는걸.
‘응? 너 뭐 하냐.’
넘어져서 고통스러워하던 기예르모 다린은 얼굴을 가리던 손 틈으로 상황을 살피다가 유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찡긋.
이게 다 연기라는 걸 알려주듯 윙크까지 날렸다.
‘아, 이제 생각났다.’
그때 유지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
작년 시즌에 리카르도 메사랑 같이 뛸 때, 가끔가다 봤던 다이빙 액션 장면이었다.
< 축구 선수에게 필요한 건 무엇보다 실력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연기도 필요해. >
< 연기요? 왜요? >
< 속이는 것도 실력이거든. >
그냥 농담으로 하는 소리인 줄 알고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그런데 시즌이 시작하고 리카르도 메사가 기예르모 다린을 불러서 뭔가 알려주는 것 같았는데 바로 그걸 배운 거였다.
‘어쭈.’
씩.
‘웃네.’
웃다가 갑자기 주심이 다가오자.
“으아아아아아아아!”
연기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걸 벤치에서 보던 리카르도 메사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잘 배웠다! 더 이상 나한테 배울 게 없어!’
* * *
리버 플레이트 선수들이 항의해서 VAR까지 확인했다.
워낙 밀집 지역에서 나온 반칙이라서 다양한 각도를 보느라 판정이 조금 길어졌고 주심의 판정은.
척.
번복되지 않았다.
그만큼 기예르모 다린이 넘어지는 게 절묘했다.
[페널티킥입니다! 여기서 한 골이 더 들어가면 리버 플레이트로서는 극복하기 힘들 겁니다!]
[축구도 기세 싸움입니다. 기세를 빼앗기면 경기에서 이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죠.]
리버 플레이트 관중들은 야유하며 키커로 나선 기예르모 다린이 실수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철렁.
하지만 그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리버 플레이트의 골망이 네 번째 흔들렸고 동시에 기예르모 다린의 해트트릭이 달성됐다.
- 와아아아아아아아!!
[이 골로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기예르모 다린! 누가 뭐라 해도 오늘 경기 MVP는 기예르모 다린입니다!]
[4 - 0으로 벌어지는 스코어! 남은 시간은 30분! 경기 내용을 보면 리버 플레이트가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해설위원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관중석 곳곳에선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최악이야!”
경기가 종료되지 않았는데도 일찌감치 희망이 없다며 빠져나가는 사람들이었다.
홈에서 맞이한 30-31시즌 첫 엘 수페르클라시코.
리빌딩까지 하며 우승을 목표로 하던 리버 플레이트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삐익! 삐익! 삐-----익!
그 뒤, 두 개의 골이 더 들어가며 종료 휘슬이 울렸다.
시즌 첫 엘 수페르클라시코는 작년과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 보카 주니어스 6 – 0 리버 플레이트 ]
아르헨티나의 황제는 보카 주니어스로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한 곳.
- “…….”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해 보이는 유지우의 모습에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 보카 주니어스! 시즌 첫 엘수레르클라시코에서 대승을 거두다! 】
【 최종 스코어 6 – 0! 보카의 금빛 물결이 리버를 삼켜버리다! 】
【 무패 행진을 이어가는 보카 주니어스! 】
【 K.O.M으로 뽑힌 기예르모 다린, “내가 흘린 코피가 보카를 승리로 이끌었다!” 】
.
.
.
【 유, “작년보다 올해, 올해보다 내년, 더 뛰어난 선수가 되고 싶다.” 】
그리고 며칠 후.
【 SMC! 유지우 다큐멘터리 1월 7일 첫 방송! 】
많은 축구 팬들이 기다리던 유지우의 다큐멘터리 방영일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