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리그 30라운드 보카 주니어스 vs CA 반필드.
유지우는 하비에르 카세로 대신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장하며 보카 주니어스의 공격을 이끌었다.
“줄 곳이 없으면 뒤로!”
전력 차이가 커서 방심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단 한 순간도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다.
‘왼쪽은 늦고, 오른쪽은 빨라.’
장점인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반필드 선수들의 위치를 파악했고 동료 선수들에게 꾸준하게 지시를 내렸다.
“루시아노! 뒤로!”
앙헬 몰리야 대신 나온 루시아노 오르반.
“페데리코! 주고 들어가!”
오른쪽 윙 포워드로 나온 페데리코 가고.
보카 주니어스 선수들은 총사령탑 역할을 맡은 유지우의 지시를 받고 비교적 여유롭게 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오, 유가 경기 전체를 보는 시야가 굉장히 좋습니다.]
[그리고 볼 터치도 많이 가져가면서 빈 곳을 계속해서 공략하고 있네요. 저렇게 나오면 반필드는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지시만 하는 게 아니라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경기를 진두지휘했다.
돌파할 때는 돌파를.
패스할 때는 패스를.
슈팅할 때는 슈팅을.
경기를 자기 리듬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반필드는 한 가지 수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삐-----익!
반칙으로 끊는 거였다.
유지우가 돌파하려는 순간에 유니폼을 잡던가 발을 걸면서 일부러 흐름을 끊는 행위를 했다.
[반필드의 라인이 극단적으로 내려앉으면서 보카 주니어스의 공세를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습니다.]
- 우우우우우우우!
라봄보네라의 홈 팬들은 에이스를 거칠게 막는 반필드 선수들에게 야유를 보냈다.
“감히 유를 건드려! 너희는 목숨이 두 개라도 되냐!”
“저 개자식!”
“16번? 내가 너 얼굴 기억해뒀다!”
강도 높은 야유가 쏟아져도 반필드 선수들의 반칙은 끝나지 않았다.
얼굴은 주눅이 든 표정이지만, 몸은 팀의 승리를 위해 움직였다.
퍼---억!
거칠게 부딪치며 넘어트리려고 했지만, 루시아노 오르반이 버티면서 오른쪽으로 볼을 툭 밀어줬다.
“유가 들어온다!”
상대 선수가 보자마자 소리쳤고 빠르게 달려들며 볼을 향해 몸을 날리지만.
투---욱.
상대 선수보다 한발 먼저 볼을 터치한 유지우는 빈 곳으로 볼을 길게 보내놓고 치달을 시도했다.
- 오오오오오오오!
[빠릅니다! 빠르게 골대와 좁혀가는 유!]
[하지만 반필드의 수비가 상당히 타이트한데요! 금세 라인을 구성하며 유를 막아섭니다!]
전반전부터 필사적으로 보카 주니어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거머리 수비 전술.
반필드는 텐 백을 구성했다.
‘라인을 내렸다면.’
빈틈이 없는 수비진.
유지우는 더 들어가지 않고 골대와 거리를 계산한 뒤, 자세를 잡았다.
“…젠장!”
슈팅 자세를 잡는 걸 본 주장인 안토니오가 달려 나왔지만.
뻐----엉!
그 전에 유지우의 발을 떠난 슈팅.
볼은 빨랫줄처럼 쭉 뻗으며 왼쪽 상단으로 향했고 그대로 골대 안에 꽂혔다.
철렁.
[고, 고오오오오올! 저 위치에서 슈팅을 때리다니요! 정확하게 레이저처럼 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는 유의 슈팅! 전반 36분에 보카 주니어스의 선제골이 나옵니다아아아아아!]
-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라봄보네라의 금빛 물결이 일렁였다.
* * *
한 골이 들어가면서 균형이 깨지자 반필드는 극단적인 수비 전술에서 역습 전술로 변화를 줬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무승부를 하겠다는 의도로 준 변화였다.
그렇다고 보카 주니어스가 흔들리는 건 아니었다.
-탁.
유지우는 압박하는 선수를 따돌리며 안전하게 볼을 잡았다.
[유가 잡자마자 근처에 있던 세 명의 선수가 압박! 공간을 빠르게 좁힙니다!]
길이 점차 좁아졌고 유지우는 발바닥으로 볼을 끌면서 전방을 살폈다.
은밀하게 뒷공간으로 이동하는 선수와 눈이 마주쳤다.
길이 다 좁혀지기 전에 찌른 로빙 패스.
스르르르르륵.
왼쪽 측면에서 뒷공간으로 쇄도한 디에고 로시는 패스를 안정적으로 잡고선 반 박자 빠른 슈팅으로 때려보았지만.
철렁.
아쉽게 옆 그물을 때리고 말았다.
디에고 로시는 아쉬움에 얼굴을 양손으로 쓸었고 유지우는 잘했다며 박수를 쳐줬다.
[옆 그물을 흔들긴 했어도 디에고 로시의 침투는 정말 매서웠습니다.]
[패스를 찌른 유의 시야도 놀라울 정도예요. 저 위치에서 저 공간을 볼 수 있는 건 정말 특별한 재능입니다.]
[공격 자원으로 유는 정말 가치가 높은 선수입니다. 윙 포워드를 비롯해 공격형 미드필더, 심지어 스트라이커까지 소화가 가능한 선수는 드물죠.]
공격과 수비 모두 소화 가능한 멀티 플레이 자원은 너무나도 귀중한 자원이었다.
어떤 전술에도 접목할 수 있으니, 전문가들이 보는 유지우의 가치는 높았다.
‘볼을 잡아놓는 게 정말 좋아.’
그중에서도 퍼스트 터치는 축구의 모든 플레이 중 첫 번째로 뽑을 만큼 중요했다.
잘못 터치를 하면 다음 플레이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서 정확하게 받아놓는 게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유지우는 퍼스트 터치가 탁월했다.
‘기본기.’
다른 장점도 있지만, 그 장점이 모두 기본기에서 파생되어 빛을 내는 거라 코치진은 유지우의 기본기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뻐----엉!
[에르네스토 게레라가 멀리 걷어낸 볼! 유가 쫓아갑니다!]
잡지 않으면 라인 아웃이 되어 소유권이 넘어갈 상황이라 유지우는 떨어지는 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달렸다.
탁.
회전이 걸린 볼을 안전하게 잡아놓은 뒤, 주변을 살폈다.
‘부딪치진 않네.’
전반전과 달리 상대 선수들이 밀착 마크하진 않았다.
유지우가 드리블할 경로를 파악하고 그곳을 먼저 막는 방법을 택했다.
‘뭐, 그러면.’
그러나 시야가 넓은 유지우에게, 그 같은 전술은 그저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뻐-----엉!
‘패스를 하면 되니까.’
돌파를 막는다고 해도 패스라는 또 다른 무기가 있었다.
높은 활동량.
넓은 시야.
이것을 바탕으로 찬스 메이킹을 하는 게 유지우의 강점이었고 그의 발을 떠난 볼은 전방에 침투하는 기예르모 다린에게 향했다.
[유의 기습적인 패스으으으! 기예르모 다린이 침투하는 공간을 노립니다!]
[아아아아! 수비가 몰리는데요! 이대로면 잡힐 위기!]
기예르모 다린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수비에게 끊길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타닷-!
골대로 달려가던 기예르모 다린이 무언가를 보고선 갑작스럽게 수비의 타이밍을 빼앗으며 바깥으로 돌아 나왔다.
볼은 백스핀이 걸려 상대가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떨어졌다.
스르르르르륵.
유지우가 일부러 볼에 백스핀을 걸어서 벌어진 장면이었다.
그걸 눈치채고 수비수를 따돌리며 나온 기예르모 다린.
완벽하게 맞이한 노마크 기회.
기예르모 다린은 골대를 등진 상태에서 볼을 가슴 트래핑으로 떨군 뒤, 수비가 붙기 전에 몸을 돌리며 슈팅했다.
‘터닝슛.’
기예르모 다린은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졌고 발을 떠난 볼은 수비수 다리 사이를 지나 왼쪽 구석으로 들어갔다.
철렁.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고오오오오오오올! 기예르모 다린이 리그 18호 골을 만들어내며 득점 2위로 올라섭니다!]
[거의 매 경기 득점을 만드는 기예르모 다린! 차세대 골잡이가 포효합니다!]
관중들은 아발란차 퍼포먼스를 하며 함께 기뻐했고 골을 넣은 기예르모 다린은 유지우에게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발 올려!”
유지우가 패스한 오른발을 올리자 닦는 세리머니를 했고 마지막엔 포옹했다.
[보카의 3대장! 이 선수들이 아르헨티나 리그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차이로 산티아고 메디나를 따돌리며 어시스트 1위를 차지한 유! 그리고 그 뒤를 쫓아오는 디에고 로시와 기예르모 다린! 현재 아르헨티나 리그는 이 세 선수의 세상입니다!]
아직 20대가 되지 않은 세 선수의 압도적인 재능에 관중들은 환호했고 상대 팀은 절망했다.
* * *
며칠 후.
훈련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
차 안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다큐멘터리 촬영 기간에는 이렇게 차에도 카메라를 설치해 일상을 담는 걸 자주 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적응됐다.
“하---암.”
“졸리세요?”
“조금이요.”
“제가 금방 집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유지우가 창밖 노을을 보자 차명훈이 넌지시 불렀다.
“지우 선수.”
“네.”
“이적할 클럽에 대한 기준이 따로 있습니까?”
재계약을 하며 바이아웃 조항을 넣은 뒤로 여러 클럽이 접촉했지만, 아직 어디로 갈지 확고하게 정한 곳은 없었다.
“아직은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우승해야죠.”
“그렇긴 한데 미리 언질을 주시면 제가 준비할 수가 있어서요.”
차명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갑자기 이적하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선수가 원하는 클럽을 찾는 게 에이전트가 할 일이니까.
그래서 유지우는 곰곰이 생각한 뒤에 말했다.
“곧장 빅클럽으로 가는 게 맞을까요?”
유지우도 여러 고민을 했다.
빅클럽으로 가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지만, 뭔가 내키지 않았다.
차명훈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경청했다.
“처음에는 빅클럽에 가고 싶었는데… 뭔가 지금은 이른 거 같아요. 가더라도 좀 나중에요.”
“그럼, 지금은 빅클럽 생각이 없으신 거네요?”
유지우는 자기가 고민하고 낸 결론을 차명훈에게 말해줬다.
“당장 세계 최고의 선수들하고 뛰는 것보다는 중하위권 클럽으로 가서 그런 선수들을 상대로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경험해보고 싶어요.”
사실 빅클럽으로 가서 많은 연봉을 받고 뛸 수도 있었다.
그만큼 빅클럽에서 직접적으로 온 제안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유지우는 그런 성공 코스보단 다른 걸 원했다.
당장 빅클럽으로 가는 것보단 조금 더 기회를 많이 주는 곳으로 가서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빅클럽에서 꾸준한 기회를 받지 못하고 도태되는 유망주의 이야기는 옛날부터 너무 많이 들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차명훈은 내심 궁금했다.
유지우가 어떤 생각으로 상위권 클럽이 아니라 중하위권 클럽을 원하는지.
그러자 들려오는 대답.
“그야 최고로 잘하는 선수들과 싸워보고 싶어서요.”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뛰면 우승하는 건 쉬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거로 만족하진 못할 거 같았다.
‘끝없는 상향심.’
어릴 적부터 TV로 봤던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보단 그들을 상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경험해보고 싶었다.
씩.
대답을 듣자 차명훈은 순간 놀랐지만, 이내 웃음을 지었다.
“역시 지우 선수를 선택한 게 제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선택이에요.”
“…갑자기요?”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 얘기를 듣고 더 확고해졌습니다!”
창밖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차명훈이 활짝 웃으며 계속 말했다.
“그래야 재미있죠! 남들이 다 이길 것 같은 클럽으로 가서 잘하면 뭐 합니까! 결국, 팀의 도움으로 이뤘다고 생각하겠죠!”
처음에는 유지우가 빅클럽으로 가서 안정적으로 생활하길 원했다.
에이전트로서도 선수가 많은 연봉을 받고 빅클럽에 가면 그만큼 떨어지는 수수료가 많으니까.
하지만.
유지우와 같이 지내면서 차명훈도 이익만 좇기보단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빅클럽들과 경쟁해도 밀리지 않는 중위권 클럽이 어디 있는지!”
“감사해요.”
“뭘요! 지우 선수는 그냥 건강만 하시면 됩니다! 축구 외적인 부분은 제가 전부 케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유지우는 이적에 관한 기준점을 잡았다.
빅클럽이 아닌 중위권 클럽.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