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대한민국 선수단은 필드를 떠나지 않고 경기장을 찾아준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유지우는 인사를 하기 전, 필드에 마련된 믹스트 존에서 인터뷰를 했다.
“오늘 경기 소감, 먼저 부탁드립니다.”
“우선 스페인 선수들의 기량이며 전술적인 부분도 그렇고 상당히 어려운 경기였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으셨나요?”
“어떤 클럽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세계적인 클래스의 팀을 상대하면 실수를 많이 줄여서 공간을 주지 않아야 하는데 그 부분이 잘 이뤄지지 않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들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침착하게 인터뷰하는 유지우를 보며 살짝 놀랐다.
‘얘기를 이렇게 잘해?’
보통의 10대 선수들은 긴장해서 말을 못 하거나 흥분해서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유지우는 도저히 10대 선수가 하는 인터뷰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의 벽이 어떤 것인지 느꼈고 세계적인 선수들과 뛰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아직도 경기 내용이 머릿속에서 생생히 떠올랐다.
제라르 레오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의 축구.
분명히 공략할 틈새가 보였지만, 마지막까지 그 틈새를 공략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정말 귀중한 경험을 했고 이 경험을 토대로 한층 더 나은 선수가 되어 더 나은 축구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각오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유지우는 기자들을 보며 어떤 말을 할지 고민했다.
그때였다.
손에 들린 제라르 레오의 유니폼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 그리고 입이 열리며 뇌를 거치지 않고 곧장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발롱도르를 한국으로 가져오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유지우는 기자들에게 인사를 한 뒤, 팬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마지막 발언의 여운은 믹스트 존에 남았고 그 어떤 기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하하하, 방금 얘기 들었어?”
“발롱도르라니…. 아시아 선수 입에서 이 말이 나온 게 얼마 만이냐.”
“월드컵 해단식에서도 유지우가 말했잖아.”
“아! 맞다, 너무 꿈같은 얘기라 잠깐 잊고 있었네.”
“꿈같은 얘기긴 하지만.”
“응, 뭔가 기대되긴 해, 유지우 선수라면 해주지 않을까?”
아시아에선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단 한 명의 발롱도르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세대별로 기대받는 선수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발롱도르에서 3위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제일 높은 성적은 10위로, 30년 전 이탈리아에서 뛰었던 박우근이 그 주인공이었다.
“한번 보고 싶군, 한국인이 발롱도르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인터뷰를 하는 사이, 선수단이 먼저 인사를 해 유지우는 혼자서 필드를 돌아다니며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유지우 선수 멋졌어요!”
“지긴 했어도 당신이 최고예요!”
“다음 경기도 기대할게요!”
“사랑해요!”
팬들의 응원에 유지우는 박수로 화답했다.
수만 명이 보내는 박수, 유지우는 행복한 미소를 보이며 필드를 떠났다.
.
.
.
경기 MVP로 뽑힌 제라르 레오도 라커룸으로 가는 길목에 마련된 믹스트 존에서 경기 후 인터뷰를 했다.
“유는 수준이 높은 선수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런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엄청난 재능을 가졌습니다. 아마 그가 제 나이가 되면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엄청난 극찬이었다.
“그러면 팀 동료로서는 어떤가요?”
한 기자의 질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제라르 레오에게 향했다.
“그와 같이 뛸 수 있다면….”
기자들은 마른침을 삼켰고 이내 들리는 말에 동공이 커졌다.
“행복할 겁니다.”
사실상 세계 최고의 선수가 보낸 러브콜이었으니까.
* * *
【 대한민국 1 – 4 스페인, 패배! 】
【 세계 최고의 위엄! 제라르 레오 해트트릭! 】
【 ‘국가대표 에이스’ 유지우, “아시아 최초로 발롱도르를 대한민국으로 가져오는 선수가 되겠다.” 】
【 제라르 레오, “유지우는 함께 뛰고 싶은 선수, 같은 팀이 되면 행복할 거다.” 】
스페인전도 화제였지만, 그 후에 선수들의 인터뷰도 화제였다.
아시아 최초로 발롱도르를 가져오겠다는 선수.
한국 선수를 팀 동료로 맞이하고 싶은 선수.
해당 이슈들은 9시 뉴스에도 보도되며 엄청난 이목을 끌었다.
- ㄹㅇ 제라르 레오가 저렇게 말했다고?
ㄴ 대박.
ㄴ 보고도 안 믿기더라.
ㄴ 근데 경기 내용이 미치긴 했었음, 국가대표에서 유지우만 보이더라.
ㄴ 제라르 레오랑 유니폼 교환할 때, 포옹하는 거 ㄹㅈㄷ
ㄴ 거기서 쌌다.
- 레알 마드리드 가면 좋겠다.
ㄴ ㅇㅇ UEFA 챔피언스 리그 최다 우승팀이기도 하고 근본이 있잖아.
ㄴ 제발 ㅠㅠㅠㅠ 한국 선수가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 입는 거 보면 소원이 없겠다 ㄹㅇ.
ㄴ 레알 마드리드 갈락티코 시절이 돌아왔으니까 유지우가 가서 한 축이 될 수도 있을 듯?
ㄴ 미켈도 곧 은퇴하겠던데?
ㄴ ㅇㅇ 36세니까 유지우가 가서 미켈 뒤를 잇는 그림도 나쁘지 않음.
- 그것도 그런데 지우 발언 봐라 ㄷㄷ 발롱도르 가져오는 한국인이 되고 싶단다.
ㄴ 옛날에도 이런 선수가 있었지.
ㄴ 흔적도 없이 사라진?
ㄴ 어디서 불백 장사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음.
ㄴ 기사식당 맛집으로 소문난 그곳?
ㄴ 미친놈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전문가 형님들, 제가 축알못이라 그런데 갓지우께서 발롱도르 탈 확률은 얼마라고 봄?
ㄴ 아직 잘 모르긴 하지만 아르헨티나 리그 경기력을 유럽에서도 보여줄 수 있으면 50%는 된다고 봄.
ㄴ 50%? 너무 높아.
ㄴ 어째서?
ㄴ 국적.
ㄴ 아….
ㄴ 클럽 성적만 좋으면 되는 게 아니라 국대 성적도 받침이 되어줘야 함.
ㄴ 월드컵 기간만 못 타는 거면?
ㄴ 그래도 국대 성적이 어느 정도 돼야 하는 건 변함이 없음.
ㄴ 그래서 몇 퍼센트?
ㄴ 많아 봐야 1%?
ㄴ 그렇게 낮다고? 적어도 10%는 넘을 줄 알았는데.
* * *
온두라스와 두 번째 경기는 2 – 0 완승하며 A매치 데이가 끝났다.
유지우를 전반전만 기용하고 후반전에 뺐는데도 좋은 성과를 낸 선수단을 향해 팬들은 박수를 보냈다.
【 대한민국 2 – 0 온두라스, 값진 승리! 】
【 유효 슈팅에 비해 낮은 득점률, 골 결정력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
【 주앙 달루트, “대한민국은 점차 나아지고 있다. 문제점을 개선해 더 멋진 축구를 보여드릴 것.” 】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기 전에 가족들이랑 집에서 5일 정도 지내고 가려고 했는데 차명훈이 한 가지 얘기를 꺼냈다.
“유지우 선수, 한 달 전에 말씀드린 건 생각해 보셨나요?”
“저번에 말했던 거요? 스포츠 코리아 스포츠 음료 광고?”
“네, 촬영할 의향이 있으시면 오늘까지 답변을 달라고 하십니다. 어떻게든 지우 선수 일정에 맞춰 본다고요.”
“흐음.”
차명훈과 하는 얘기는 광고 촬영이었다.
스포츠음료 광고 모델로 나를 쓰고 싶다는 거였다.
“일정은 괜찮죠?”
“네, 아르헨티나로 출국하는 일정이 틀어질 일은 없습니다.”
“근데 광고 촬영을 이렇게 급하게 찍어도 돼요?”
보통 광고는 몇 개월을 준비해서 찍는 대규모 촬영이었다.
내가 지금 결정을 한다고 해도 내일 당장 찍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씩.
차명훈이 웃으며 말했다.
“콘티도 다 짜여 있고 유지우 선수만 승낙하면 지금이라도 촬영할 수 있도록 세팅이 되어 있습니다.”
“당장이요?”
“네! 혹시라도 유지우 선수가 찍을 가능성을 두고 사전에 제작진과 미팅해서 점검했습니다.”
“제가 그러라고 했나요?”
“어? 한 달 전에 얘기했을 때, 제가 광고주와 미팅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 한국에 왔었고요…. 기억 안 나세요?”
아.
이제 기억났다.
그때 하도 이적 문제 때문에 머리 아플 때라서 차명훈이 한 얘기를 대충 들었었다.
“…만약 제가 안 찍는다고 했으면요?”
“저희 에이전시 소속 유명훈 선수를 대체 카드로 쓰려고 했습니다.”
유명훈이라면…. 아,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야구 선수지.
“대체 카드가 있긴 하지만 광고주는 꼭 유지우 선수와 찍는 걸 원하고 있습니다.”
보카 주니어스에서 데뷔하고 월드컵을 거친 유지우는 대한민국 스포츠 스타 중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외모.
팬들에게 인정받은 인성.
그의 인기는 대한민국 3대 느님을 4대 느님으로 늘려야 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만큼 높아졌다.
“급하게 촬영하게 되면 촬영팀께 미안한데요.”
“본인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차명훈이 무언가를 얘기하자 유지우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네, 촬영팀에 연락해서 콘티 받고 일정 조율하겠습니다.”
어차피 한국에 있는 5일 동안 가족들이랑 지내는 게 전부였다.
하루 정도는 촬영에 투자해도 나쁘지 않겠지.
* * *
이틀 뒤.
서울 강남의 촬영 스튜디오.
“…야, 나도 너랑 이렇게 있는 거 어색하거든.”
오늘 찍는 건 나 혼자 찍는 광고가 아니라 다빈 누나랑 찍는 합동 광고였다.
“누나랑 같이 광고라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광고는 전부터 들었는데 누나랑 찍는 건 얼마 전에 들었지. 그래서 수락했고.”
“어째서?”
“나 혼자 찍는 것보단 누나랑 찍는 게 덜 어색할 거 같아서.”
방송 촬영은 지금 찍는 다큐멘터리밖에 없어서 아직 카메라 앞이 어색했다.
만약 단독 광고였으면 거절하려고 했는데 다빈 누나랑 같이 찍는 거라 수락했다.
“나도 그렇긴 해.”
이 누나도 촬영하는 걸 어색해했다.
예전에 올림픽 특집 예능 나갔을 때, 청심환만 5개 먹었다고 했나?
“누나는 나랑 찍는 거 알았어?”
“너한테 컨택 넣고 있다곤 들었어.”
다빈 누나도 나랑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었다.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너한테 부담될까 봐. 네가 촬영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이 누나랑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우리는 얘기를 나누며 촬영을 준비했고 차례대로 메이크업을 받았다.
“오오오오.”
“지우 선수…. 메이크업 받으니까 그냥 배우인데요?”
“당장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을 비주얼이에요!”
내가 메이크업을 다 받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웅성거렸다.
난 재빨리 감사하다고 말한 뒤에 소파에 가서 쉬었고 다빈 누나가 메이크업을 받고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러 사람의 감탄이 들려왔다.
“…뭘 그렇게 보냐?”
“예뻐서?”
“이게!”
“아! 칭찬해도 왜 그래! 누나도 우리 누나 닮아가?”
“내가?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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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지는 광고 촬영.
두 사람은 능숙하게 촬영에 임했다.
15초만 나가는 광고였지만, 촬영 시간은 오래 걸렸다.
“제작비 많이 들었겠다.”
놀란 부분은 스튜디오 안에 작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야외촬영을 하려면 협조를 받아야 하고 이것저것 들어가는 문제가 많은데 아예 스튜디오 안에 세트장을 만든 거였다.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제작비만 있으면 나라까지 만들 판이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장장 여덟 시간이 넘는 촬영이 끝나고 제작진들이 모여서 촬영본을 봤다.
점차 말을 잃어갔다.
여배우급 외모로 많은 팬을 거느린 펜싱 여제 최다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에이스 유지우.
두 선수의 비주얼 합을 본 강문희 감독은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저 두 사람은 배우를 해도 성공했겠어.”
“왜요?”
“비주얼 봐봐라, 이게 스포츠 선수 비주얼인 게 말이 돼?”
그리고 마지막에 두 선수가 노을 아래에서 마주 보면서 웃는 걸 끝으로 영상이 마무리됐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편집하고 여러 과정을 거쳐야 최종본이 나오는데 초안을 본 사람들은 이미 영상에 빠져버렸다.
“…이 광고 나가면 난리 나겠군.”
강문희 감독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주님이 내일 출장에서 돌아온다고 하니, 바로 보여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