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외계인-125화 (125/383)

제125화

울리지 않길 바라던 종료 휘슬이 울리며 30-31시즌 아르헨티나 리그 최종 라운드가 끝났다.

-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을 들으며 필드로 나갔고 선수들이 포옹하며 기뻐하다가 필드로 들어온 나를 보더니 달려왔다.

“유!”

분명히 뭔가 이상한 짓을 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껴서 도망가려는 모션을 취하자 하비에르 카세로가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어! 도망가기 전에 다 잡아!”

“갈 때는 가더라도! 그냥은 못 보내지!”

“높이 올려! 제일 높이!”

“유! 새로운 기록 축하한다!”

“이걸로 리그 역사에 당당하게 이름 새겼네! 하하하하하하!”

근처로 모인 선수들은 나를 붙잡아 헹가래를 쳐줬다.

하늘 높이 올라가자 관중석에 있는 팬들의 표정이 더 생생하게 보였다.

눈물을 흘리는 팬.

눈물을 훔치는 팬.

열렬한 환호를 지르는 팬.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는 팬들을 보자 뭔가 울컥했다.

“우냐?”

헹가래에서 내려오자 디에고 로시가 슬쩍 내 얼굴을 보며 말했고 난 황급히 손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나.

“왜, 막상 마지막이니까 아쉬워?”

“더는 여기서 뛰지 못하니까 아쉽긴 해.”

“그러면 가지 마.”

“어떻게 안 가?”

“혹시 모르지. 결승전에서 지게 되면….”

“…그거 승부조작이야.”

“누가 몰라서 그래? 아쉬워서 그래! 아쉬워서!”

선수들과 같이 필드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K.O.M으로 뽑혀서 인터뷰가 먼저였다.

“갔다가 와, 우린 먼저 돌고 있을게.”

필드에 마련된 믹스트 존으로 걸어가니,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운영팀장인 세르히오가 웃으며 안내해줬고 난 카메라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유, 그토록 기대하던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됐는데 소감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많은 사람이 도와줘서 가능한 기록이었습니다. 도와준 동료들과 믿어준 코칭 스태프들께 감사하다고 말씀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인터뷰를 하다가 중요한 질문이 나왔다.

“유, 만약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우승하게 되면 이번이 보카 주니어스 소속으로 치르는 마지막 홈경기가 되는 셈입니다. 기분이 어떠셨나요?”

질문을 듣고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언젠가는 저에게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닥쳐오니… 아쉽고 슬픕니다.”

정이 든 곳과 이별을 하는 건 처음이라서 여러 감정이 몰려왔다.

그중 제일 큰 건 아쉬움과 슬픔이었다.

그 감정을 담아 여러 질문에 대답했고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 나왔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우승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요?”

“네, 작년에 가져오지 못한 걸 가져오겠습니다.”

작년에는 부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승에 뛰지 못했다.

그 아쉬움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쉬웠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홈에서의 인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직 그 인사는 이른 거 같습니다. 결승전에서 이긴 뒤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경기가 남아 있으니, 작별 인사를 남기는 건 시기상조였다.

인터뷰를 마친 뒤, 필드를 돌아다니며 홀로 관중석의 팬들에게 인사했다.

“유!!!”

이름을 연호하고.

“사랑해!”

사인해 달라는 팬들의 외침에 라봄보네라에 온 첫날처럼 마지막 날도 팬 서비스를 했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스케줄상 살짝 말리던 관계자들도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가 하는 걸 곁을 따라다니며 지켜봤다.

저벅.

저벅.

팬 서비스로 한 바퀴를 더 돌고 나가려고 할 때.

팬들의 표정을 보고 나도 울컥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이어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는데.

펄럭.

관중석에서 커다란 플래카드 하나가 펼쳐졌다.

< 유, 우리는 영원히 너를 잊지 않을게! >

금색 종이꽃까지 같이 휘날리는 장관.

그리고 들려오는 내 응원가.

…이 광경은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다.

* * *

【 30-31시즌 리그 최종 라운드 종료! 보카 주니어스! 최고의 성적을 거두다! 】

【 유, “이곳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나에게 너무 슬픈 일이다.” 】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 보카 주니어스 vs SC 코린치안스! 】

조기 우승을 하고, 결승전 무대를 남겨두었다는 건 팬들을 설레가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슬프게 만들었다.

결승전에서 이기게 되면, 유지우가 그들을 떠나는 것이 기정사실로 되는 것이었으니까.

에이스와의 이별.

이건 일반 선수들이 이적하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 되어 팬들의 가슴에 ‘툭’ 하고 박혀버렸다.

[펍에서 보고 있는데 팬들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유를 위해서 준비한 걸 보고 눈물이 났어.]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 한 경기가 남아 있어서 이런 말 하긴 이르지만, 유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기억될 거야.]

[그 눈물을 본 순간, 나도 우리 가족도 다 울었어. 난 유가 만약에 보카를 떠나 새로운 곳을 간다고 해도 행복했으면 해. 그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 것처럼.]

신문 1면에 실리면서 화제가 된 건 종료 휘슬이 울린 순간이 아니라 유지우가 교체된 직후, 벤치에서 홀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국내에도 빠르게 보도가 됐다.

- 눈물 흘리는 거 봐라…. 내가 다 눈물이 나네.

ㄴ 그만큼 보카에 진심이었던 거지.

ㄴ 감독이 마지막에 안아줄 때, 어린아이처럼 울더라.

ㄴ 남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까지 시켜놓고 가면 모든 게 완성이 됨.

ㄴ 눈물은 트레블 후에 흘리자, 지우야!

- 와…. 진짜 역사를 새롭게 쓰네.

ㄴ 보카 주니어스에 하비에르랑 앙헬 말고도 세계에서 관심 두는 유망주들도 많은데 그 선수들 다 씹어 먹음.

ㄴ 말이 되냐고 이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전에 약물 의혹이 왜 떴는지 알겠다.

ㄴ ㄹㅇ 상대 팀 입장에선 지옥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한국 선수 중에 이런 선수가 있었나? 한 리그의 역사를 바꾸는 선수가?

ㄴ 이건 레전드들도 어려운 일임.

ㄴ 유럽 리그에서 만약 이렇게 했다? 그해 발롱도르는 따놓은 거지.

ㄴ 발롱도르 순위에는 들지 않을까?

ㄴ 설마, 유럽이랑 남미 기자들 사이에서 아시아 선수가 그럴 리는 절대 없음.

- 우리는 유지우의 시대를 살고 있다?

ㄴ 아직 그 정도까지는….

ㄴ ㅇㅇ 이적한 뒤에 유럽에서 성과 내면 그런 말 해도 됨.

ㄴ 유럽 성과 말고 남미 성과만 해도 미친 거 아니냐?

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까지 차지하면 더 ㄹㅈㄷ

그 시각.

보카 주니어스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유지우는 구단에 한 가지 요청을 했다.

“제가 마지막으로 부탁드리는 건 그거 하나입니다.”

엔리케 보토 단장은 유지우의 제안을 듣고서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유지우가 구단에 요청한 건 보카 주니어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유.”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엔리케 보토가 불렀다.

“예?”

“마지막까지 잘 부탁한다.”

씩.

“물론이죠.”

* *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앞둔 어느 날.

유지우는 정규 훈련을 한 뒤 개인 훈련을 하면서 감각을 끌어올렸고, 선수들이 다 간 뒤에도 홀로 남아서 훈련장 한가운데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구경했다.

“…생각해 보면 이곳도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클럽 하우스에서 훈련하는 것도 며칠 남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온 날이 생각나면서 잠깐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저벅.

저벅.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워낙 조용해서 발소리가 다 들렸고 유지우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그곳을 봤다.

“로드리고.”

인생을 바꿔준 스카우터 로드리고였다.

“오랜만이다.”

“아시아에서 돌아오신 거예요?”

“네가 보카에서 뛰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지.”

로드리고는 갈색 종이봉투에 담긴 추로스를 내밀었다.

“우승할 거라는 걸 알고 계신 모양이네요.”

“그럼! 사실 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내가 타임머신이 있거든? 그거 타고 미래에 갔더니, 보카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더라고.”

농담을 하는 로드리고를 보며 웃으면서 추로스를 먹었다.

“결승전 준비는 잘돼 가?”

“그럭저럭이요.”

나란히 앉아서 밤하늘에 뜬 별을 구경했다.

일상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깐 대화가 중단된 사이.

“…죄송해요.”

먼저 운을 뗀 건 유지우였다.

“뭐가 죄송해?”

“로드리고는 저를 도와줬는데, 저는 로드리고를 얼마 도와드리지 못한 거 같아서요.”

이적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후로 로드리고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축구 선수에게 이적은 당연히 따라다니는 거야. 너를 붙잡지 못한 구단이 잘못한 거지, 네가 잘못한 건 없어.”

“…….”

“네가 실력이 있어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진즉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마음 쓰지 마.”

로드리고도 프로 중의 프로였다.

축구 선수와의 이별은 숱하게 겪어와서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심이 담긴 그의 말에 유지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감사해요.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와줘서.”

“나야말로 고맙다.”

“뭐가 고마워요?”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의 활약을 보여줘서.”

로드리고는 유지우가 이렇게 단기간에 세계 레벨의 선수가 될 줄은 몰랐다.

자질을 지닌 선수긴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하비에르 카세로와 마찬가지로 20대에 꽃을 피울 거로 생각했다.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구나.’

그동안 예상했던 걸 다 뒤엎으며 유지우는 단기간에 아르헨티나 최고 선수가 되면서 이적하게 되는 거니, 아쉽긴 해도 싫진 않았다.

자기가 발굴한 선수가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거니까.

“이제 보카 주니어스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경기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한 경기 남았네?”

“네.”

“갈 거라면 남미 정상은 찍고 가야지?”

“그럴 생각이에요.”

후회 없이 떠나려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트로피가 반드시 필요했다.

대답한 유지우의 표정을 본 로드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너라면 왠지 할 것만 같다.”

“감사해요. 아시아에는 또 언제 가세요?”

“네가 이곳을 떠나는 걸 본 뒤에 갈 거다. 너 같은 보물들을 찾는 게 내 일이니까.”

로드리고는 당분간 아르헨티나에 머물 예정이었다.

자기가 발굴한 선수가 남미 최고의 선수가 되는 걸 보기 위해서.

“이겨라.”

“네. 지켜보세요. 로드리고가 데리고 온 선수가 어떤 선수가 됐는지.”

* * *

5월 22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가 열리기 3일 전.

결승전이 열릴 칠레 산티아고는 축구 팬들의 열기로 가득 채워졌다.

거리 곳곳에 보이는 플래카드.

남미 최고의 축구 클럽을 가리기 때문에 남미 축구 팬들의 이목이 산티아고로 쏠렸다. 그리고 보카 주니어스 선수단과 SC 코린치안스 선수단이 입국했다.

“보카! 이번에는 꼭 이겨!”

“무슨 소리! 이번에는 코린치안스가 이길 거라고!”

양 클럽의 팬들도 미리 입국해서 신경전을 벌였고 결승전이 열릴 산티아고 거리는 남미 축구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결승전이 열리기 하루 전.

산티아고 근처 펍은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양 클럽의 서포터즈들이 충돌할까 봐 하루 일찍 경찰 인력도 배치됐다.

“작년에는 유가 없는 게 좀 컸지만, 이번에는 달라.”

“유의 해트트릭으로 보카 주니어스가 이길 거야! 내가 장담해!”

“오! 그러면 내기하는 거 어때?”

“무슨 내기?”

“넌 해트트릭이라고 했지? 난 두 골에 어시스트 한 개!”

보카 주니어스 팬들은 펍에서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웃으며 맥주를 들이켜던 한 남성이 휴대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야! 이것 봐봐!”

“뭔데?”

“얼른!”

【 코린치안스 감독, “마치 보카 주니어스가 우승한 것처럼 떠들어서 기분이 나쁘다. 결승은 우리가 이길 것이고 유가 보카 주니어스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

코린치안스 감독이 한 말을 보고 남성은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 소리야.”

옆에서 맥주를 마시던 친구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유가 이적 못 하게 해주겠다는 거지?”

“그런 거 같은데?”

“…그러면 코린치안스를 응원해야 하나?”

쾅!

두 남성이 얘기를 나누고 있자 옆에서 듣던 중년 남성이 맥주잔을 크게 내리쳤다.

“멍청한 소리! 우승컵은 보카가 주인이지!”

“아저씨는 유가 떠나도 좋다는 거예요?”

중년 남성은 맥주 한 모금을 마신 뒤에 대답했다.

“떠나는 건 아쉬워, 하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 선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전부야.”

남자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우가 보카를 떠나는 것은 당연히 아쉬운 일이었지만.

최고의 순간을 선사해준 선수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왕 이기는 거 확실히 이기자! 유가 떠나더라도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그래, 황제의 마지막이면 이십 대 영쯤으로 이기면 되겠다. 유 혼자 열일곱 골쯤 넣으면 되잖아.”

“…근데 왜 유라면 가능할 거 같냐?”

보카주니어스 팬들은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경기가 다가오기를 기다렸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삼일 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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