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골든 보이 수상을 하고 나는 지인들에게 축하 전화를 받았다.
이채운 감독님과 세바스티안 란첼라 감독님, 그동안 나를 품어준 감독님들은 물론 친한 선수들에게도 꾸준히 연락이 왔다.
그중에서 제일 뜨거운 건 단톡방이었다.
‘보카 3대장.’
이 이름으로 되어 있는 단톡방은 디에고 로시, 기예르모 다린, 그리고 나까지 총 3명이 있었다.
디에고 : 나도 ㅠㅠㅠㅠㅠ 골든 보이 ㅠㅠㅠㅠ
기예르모 : 유가 너무 앞서간다.
나 : 너 이적 소문 있던데? 레알 마드리드로 가는 거 아니었어?
기예르모 : 아직 정해진 건 없다.
나 : 너희도 유럽에 나오면 수상할 수 있을 거야. 아, 나이가 차서 못 받나?
디에고, 기예르모 : ……!!!
골든 보이는 20세 이하 선수들에게만 주는 상이다.
내가 19세, 두 사람이 20세니까 지금 당장 나와야 다음 해에 수상할까 말까였다.
디에고 : 젠장!
나 : 넌 언제 유럽으로 와?
디에고 : 네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나 : 아스날?
디에고 : 아니, 우리 약속 잊었어? 우리 셋은 절대 같은 클럽으로 안 가기로 했잖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보카 주니어스에서 뛸 때 애들이랑 약속한 게 있었다.
세 명은 각자 다른 클럽으로 가서 발롱도르 경쟁을 하자고.
나 : 그래서 둘 다 프리미어리그로?
디에고 : 난 그럴 거야.
기예르모 : 나도 그러고 싶다.
나 : 기예르모는 라리가 가는 거 아니야?
디에고 : 기예르모는 스페인 가서 탱고 배우라고 하고 우리는 영국에서 만나서 피쉬 앤 칩스 먹자! 그거 맛있다던데?
…누가 그런 소리를.
기예르모 : 나도 먹을 거다! 나도 프리미어리그로 갈 거다!
디에고 : 우리 셋이서 프리미어리그 뛰면 재미있겠다.
나 : 오퍼 오는 곳 있어?
디에고 : 몇 군데 오고 있지.
기예르모 : 나도.
내가 듣기로 디에고를 강력하게 원하는 곳은 맨체스터 시티고, 기예르모를 강력하게 원하는 곳은 첼시라고 들었다.
뭐, 어디가 됐던 이 녀석들을 영국에서 보면 재미있긴 하겠다.
디에고 : 아, 그리고 그거 알아? 기예르모 여자친구 생겼어.
기예르모 : 모델이다.
디에고 : 로봇 같은 녀석이 뭐가 좋아서 만나냐고 물어봤는데….
이것들 또 밤새 떠들겠네.
* * *
프리미어리그 20라운드.
아스날 vs 풀럼 FC
애슈버리 그로브는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 나오는 거야?”
사람들이 이토록 몰린 건 후반기 첫 시작이기도 했지만.
- 와아아아아아아!
유지우가 골든 보이 트로피를 홈에서 들어 올리는 걸 보기 위해서였다.
아스날은 지독한 암흑기를 시작하기 전에도 세계적으로 상을 받는 선수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래서 홈에서 트로피 세레머니를 하는 건 그들 입장에서 무척 생소한 일이었다.
후우.
터널 안.
그곳에선 유지우가 유니폼을 입고 입장을 기다렸고 옆에선 홍보팀 데이지 와츠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유,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멋지게 들어 올려 주세요.”
“네.”
“그냥 몇 마디 하시고 사진 찍고 오신다~ 생각하세요. 아셨죠?”
“후우, 알겠습니다.”
데이지 와츠는 긴장한 유지우를 보고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귀여워서 웃는 거였다.
‘인터뷰도 늘 유창하게 하던 사람이 이럴 땐 긴장하는 걸 보니까 신선하네. 이제야 좀 제 나이 같기도 하고.’
신호가 떨어지자 유지우는 걸어서 필드로 입장했고 데이지 와츠는 그 뒷모습을 보며 또 다른 직원인 크리스찬 퍼스에게 말했다.
“…퍼스 팀장님, 우리 홍보팀, 요새 일할 맛 나지 않아요?”
“너무 나지. 너무 나서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나는 기분이라니까?”
“유도 그렇고 유랑 같이 들어온 선수들 덕분에 홍보할 거리도 넘쳐나고!”
암흑기일 때는 기사 하나 내보내는 것도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소의 기분이었는데 요새는 홍보팀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어떻게 되어가? 얼마 전에 ‘루먼 쇼’에서 유의 출연을 요청했었잖아. 네가 오늘까지 구단주님께 보고한다고 하지 않았어?”
루먼 쇼는 영국 토크 프로그램이었고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매주 다양한 셀럽들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라 이번에 유지우에게 출연 요청 공문이 왔었다.
“구단주님이 캔슬놨어요.”
그러나 그건 이미 캔슬이 나버렸다.
“응? 어째서? 거기 나가면 아스날 홍보도 되고 좋잖아.”
영국 최고의 프로그램상도 받은 곳에 나가면 자연스럽게 아스날의 이름도 언급될 거였다.
그렇게 되면 억만금의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그걸 안 한다는 건 다소 의아한 결정으로 보였다.
“유의 컨디션 방해하지 말라고 하셔서.”
“아….”
“출연으로 경기력 떨어지면 제 목도 같이 떨어진다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취소해야지.”
유지우는 구단 특별관리 대상이었다.
“그럴 만하지.”
“구단주님 마음이 제 마음이라 이해해요, 지금껏 이런 선수는 없었잖아요.”
곧이어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들.
“유---!”
“네가 최고야!”
“와! 트로피가 번쩍번쩍 빛이 나네!”
“우리 홈에서 트로피 세레머니를 볼 줄이야.”
홍보팀 직원들은 활짝 웃었다.
“팬들이 기뻐하는 거 보면 저도 저절로 기뻐져요.”
필드로 입장한 유지우는 쭈뼛거리다가 단상 위에 올려진 골든 보이 트로피를 잡았다.
번쩍!
골든 보이 트로피를 홈팬들 앞에서 들어 올리자.
-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귀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피부가 짜릿해졌다.
온몸의 세포가 꿈틀거렸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
평생 잊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골든 보이 트로피를 들어 올린 후, 소감을 말하라고 직원이 마이크를 가져왔고 유지우는 관중석을 보며 입을 뗐다.
“곧 경기도 있고 타 클럽 팬분들도 있으니, 길게 얘기하지 않고 짧게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여기선 강수를 둬야 했다.
“다음에는 애슈버턴 그로브에서 발롱도르를 들어 올리겠습니다.”
아스날 팬들이 미쳐 날뛰는 그런 강수를.
* * *
트로피 세레머니를 마치고 들어와 경기를 준비했고.
잠시 후.
필드로 들어가기 위해 입장 터널로 선수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스날이 초대한 병원 아이들도 있었다.
“헤헤헤헤.”
아이들은 아스날 선수들의 손을 잡고 세상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유!”
내 옆에는 헨리 윌리엄스가 있었다.
“응?”
“저 정말 다 나으면 시즌권 주는 거죠?”
“…그럼.”
이렇게 대답하는데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병원 봉사활동 할 때는 몰랐는데 자주 병원을 찾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아이의 병.
이 아이의 병명은 ‘소아암’
그것도 나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악화하고 있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아자! 아! 그리고 저번에 가져다준 과일! 어머니가 맛있게 먹었다고 전해달래요.”
“너도 먹었지?”
“네! 유가 사다 줘서 그런지 더 맛있었어요!”
“다음에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먹고 싶은 건 많은데…. 병원에서 먹지 말라고 해서….”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시무룩해진 헨리 윌리엄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나중에 다 나으면 먹고 싶은 거 내가 평생 사줄게.”
“평생이요? 진짜?”
“네가 결혼하고 아이도 나으면 아이들까지.”
“와-! 약속한 거예요!”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아니다.
정말 난 이 아이가 나아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헨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입장 시간이 다가왔다.
주심의 뒤를 따라 선수들이 필드로 입장했고 헨리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꼭 이겨주세요! 리그 우승하는 것도 보여주시고요!”
“그럼, 리그 우승할 때는 너도 옆에 꼭 있어야 한다?”
“네!”
아이의 손을 잡고 터널을 통과해 걸어 나갔다.
열기로 가득한 필드 위.
하지만 나는 지금 잡은 이 손이 더 뜨거웠다.
‘꼭 우승할게.’
이 아이가 웃는 모습을 더 오래 보고 싶어졌다.
* * *
삐---익!
프리미어리그 20라운드가 시작됐다.
경기 초반은 탐색전이었다.
서로 무리하지 않았고 아스날은 중원에서 볼을 돌리며 풀럼의 상황을 살폈다.
‘음.’
유지우는 풀럼이 적극적으로 압박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라인을 내렸네.’
경기 전, 폴 사르 감독이 했던 말이 있었다.
풀럼이 라인을 올리지 않고 내려앉으면 귀찮아질 거라고.
그 말대로.
풀럼은 철저하게 잠그는 전술을 들고나왔다.
[풀럼 선수들이 아스날을 상대로 라인을 내린 텐 백을 시도합니다.]
전반기의 아스날의 상승세는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화제였다.
그렇기에 아스날을 상대하는 감독들은 전반기의 데이터를 가지고 전술을 꾸렸고, 풀럼 감독은 아스날의 공격력을 경계해 철저하게 내려앉는 수비 전술로 나왔다.
10분.
20분.
아스날이 몇 차례 공격을 감행했지만, 풀럼의 거머리 수비에 번번이 막혔다.
촤—악!
날카로운 태클.
퍼—억.
심지어 역동작에 걸렸는데도 억지로 몸을 틀어 얼굴로 막아냈다.
[풀럼의 수비가 단단합니다. 텐 백도 텐 백인데 거친 수비를 하는 풀럼이기에 뚫는 건 더 힘들어 보입니다.]
사르 볼은 제로톱으로 상대 수비라인을 끌어당겨 뒷공간을 노리는 전술이었다.
그걸 풀럼 감독은 맨 마크가 아닌 지역 마크로 돌리며 수비진들이 끌려 나오는 걸 방지했다.
“볼은 최대한 멀리 걷어내! 그리고 유! 유에게 공간을 내주지 마!”
최고 경계 대상은 유지우였다.
골든 보이 이후, 세계의 관심을 받는 선수였기에 풀럼 감독은 유지우를 상대로는 협력 수비를 지시했다.
한 명이 안 되면 두 명.
두 명이 안 되면 세 명.
유지우를 고립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유지우는 그들이 펼친 그물에 걸리지 않았다.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움직임.
폴 사르는 풀럼이 내려앉을 것을 대비해 대책을 세워놨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스위칭.
마틴 그라임스 – 아드리안 로마오 – 유지우.
이 세 명의 선수는 계속해서 자리를 바꾸며 수비에 혼란을 줬다.
이것이 폴 사르 감독이 내려앉은 팀을 상대하는 방식이었다.
작년에는 하지 못했지만, 올해는 가능한 롤.
‘멀티 플레이어의 존재’
유지우는 공격지역 어느 포지션에서나 뛸 수 있다는 걸 증명했고 폴 사르는 그 점을 노려 유지우를 좌측, 정면, 우측 사방으로 돌렸다.
뻐—엉!
기회가 나오면 시도하는 날카로운 중거리 슈팅은 풀럼을 위협했다.
[아! 유지우 선수의 왼발 슈팅이 아쉽게 골대를 벗어납니다!]
[확실히 폴 사르 감독이 유지우 선수의 활용법을 잘 알고 있는 게 보입니다.]
[어떤 부분에서요?]
[내려앉은 팀을 상대로 득점을 만들려면 패스도 패스지만,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크랙’의 유무입니다.]
상대의 진영을 혼자서 깨트릴 수 있는 선수.
그런 선수가 바로 유지우였다.
폴 사르는 유지우의 장점을 전술에 녹였고 그 결과, 아스날의 공격이 완성되어갔다.
31분.
크리스티안 페레스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유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1초도 안 되는 아주 찰나의 순간.
두 선수가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까지는 0.5초면 충분했다.
투—웅.
크리스티안 페레스의 로빙 패스.
타다다다닷-!
그와 동시에 톱 스피드를 내며 라인을 부수고 들어가는 유지우.
두 선수의 합은 풀럼의 견고한 수비에 틈을 만들어냈다.
- 오오오오오오오!
로빙 패스는 유지우가 들어가는 속도와 보폭까지 계산해 자로 잰 듯 정확히 발아래에 떨어졌다.
[유!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올리며 돌파합니다! 오른쪽 측면을 열고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그리고 컷백 크로스----!]
기습적인 침투로 수비수를 자신에게 끌어당긴 뒤, 생긴 공간으로 노룩 패스를 보냈다.
대각선으로 보낸 그곳에는 아드리안 로마오가 있었고.
툭.
그냥 발만 가져다 대며.
철렁.
골망을 흔들었다.
단 한 순간 만들어진 아주 작은 틈.
그 틈을 유지우가 정확하게 포착해 득점으로 만들어냈다.
[아스날의 후반기 첫 골이 아드리안 로마오의 발끝에서 나옵니다! 이것으로 리그 10호 골을 신고하는 아드리안! 유의 뒤를 이어 득점 순위 5위 안으로 안착합니다!]
[이게 믿어지십니까? 작년! 득점 10위였던 선수가! 5위라니요!]
아드리안 로마오는 울먹였다.
“내가 해냈드아아아아!”
득점 5위.
행복해하고 있는데.
“누가 보면 득점왕인 줄 알겠네, 아직 시즌 안 끝났거든?”
마틴 그라임스가 세레머리를 하는 아드리안 로마오에게 다가가 한마디 거들었다.
“좀 좋아하면 안 돼? 아~ 득점 9위라서 부러워서 그렇지?”
“…이딴 놈이 득점 5위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는 거지.”
“아주 잘만 돌아가고 있으니까 너무 부러워하지 마.”
티격태격하는 두 선수에게 유지우가 다가가며 말했다.
“둘이 안 부딪치면 하루도 못 살아요? 그럴 거면 아예 한집에서 살지 그래요?”
유지우가 나타나자 언제 말싸움을 했냐는 듯 어깨동무를 하며 친한 척을 하지만 표정에서는 다 드러났다.
“그만 떠들고 포지션으로 돌아가죠? 계속 떠들면 패스 안 줍니다?”
유지우의 한 마디에.
“넵!”
“알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군인처럼 잽싸게 포지션으로 뛰어가는 개와 고양이였다.
어느덧 유지우는 아스날의 개와 고양이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