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외계인-226화 (226/383)

제226화

“으아아아-!”

기지개를 피고 통유리로 된 창 너머의 바다를 봤다.

좋구나.

넘실거리는 파도도.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평화로웠고 오랜만에 경쟁이 없는 여유라는 걸 제대로 느껴보고 있었다.

“성공의 맛이라도 느끼고 있는 거야?”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 주방에서 요리하던 누나가 거실로 나오며 말을 걸었다.

“그건 런던에서 실컷 느끼고 있지.”

“하긴 그런 집이면 숨만 쉬어도 ‘아, 내가 성공했구나.’ 그러지.”

“먹을 거 그냥 나가서 사서 먹자니까. 뭐하러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요리하고 있어.”

“네가 드디어 누나를 생각해주는구나.”

“누나 고집 때문에 힘든 어머니를 생각하는 건데?”

꽁.

“이게!”

1박 2일로 놀러 오긴 했지만, 밖을 돌아다니는 건 되도록 자제하기로 했다.

나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몰리면 통제해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심심하지?”

“조금?”

펜션에 도착한 지는 2시간.

부모님과 누나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도 도와주려다가.

‘넌 쉬어! 무조건 쉬어!’

강제로 거실로 쫓겨 나버렸다.

“그러면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그래도 돼?”

“대신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변장은 다 하고 나가야 한다.”

“알았어.”

누나의 말대로 꽁꽁 싸맨 채 밖으로 나왔다.

우리 가족이 묶는 숙소에서 바다와 거리는 걸어서 1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쏴---아!

바다와 가까워지자 파도 소리가 들렸다.

해변을 걷자 바다 냄새가 느껴졌다.

오랜만에 맡는 바닷냄새는 마음을 평안하게 해줬다.

그리고 난 휴가가 끝나고 아스날에 돌아가면 어떤 일정이 기다리는지 천천히 곱씹었다.

‘UEFA 챔피언스리그.’

모든 대회가 중요하지만, 이번 시즌 아스날에 특히 더 중요한 건 챔피언스리그였다.

유럽 모든 선수가 사활을 걸고 싸우는 대회에 아스날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줘야 했으니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런 근본적인 고민은 하지 않았다.

해야만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걷고 있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와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어? 유지우 선수 아니에요?”

모자가 벗겨지자 근처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런 상황에서 아니라고 했다가는 도리어 인터넷에 이상하게 글이 올라간다.

나는 그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유지우 선수! 같이 사진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가족들이 걱정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몰리는 성수기도 아닐뿐더러 일기예보로 비까지 온다고 해서 그런지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유지우 선수라고?”

“진짜?”

“와! 미친.”

“잠깐만요! 밀지 말고 질서 지켜주세요!”

그래서 그들은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질서를 지켰고 난 웃으며 팬 서비스를 해줬다.

“피곤하실 텐데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휴가 동안 잘 쉬시고! 아스날 돌아가서도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팬 서비스를 끝내고 숙소로 들어오자 어느새 바비큐 준비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들키지는 않았어?”

“들켰지.”

사실대로 대답하자 누나는 깜짝 놀란 듯했다.

“괜찮아?”

“응, 그냥 사인이랑 사진 찍어주고 온 게 다야.”

“넌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얘기한다? 휴가까지 와서 그러는 거 쉽지 않잖아.”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팬 서비스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귀찮지도 않았다.

팬들이 없으면 축구도 그저 그런 공놀이에 불과했으니까.

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 * *

여유가 넘쳤던 1박 2일의 가족 휴가를 끝낸 뒤.

다음 날, 유지우는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미국을 경유해서 긴 시간 비행 후에 도착한 아르헨티나는 떠날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지우 선수, 이쪽으로.”

몰래 온 거라 혹시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됐기에 차명훈은 신속하게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았다.

모자는 썼지만, 마스크를 하지 않아 지나가던 꼬마가 유지우를 알아본 거였다.

“유, 맞죠?”

“안녕?”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그들과 찍은 사진 하나.

그 사진은 곧이어 보카 주니어스 팬 커뮤니티에 올라갔다.

【 방금 유랑 공항에서 만났어! 사진 찍고 잠깐 대화를 나눴는데 일주일 정도 아르헨티나에 머물다가 간대! 】

[오, 미친!]

[나는 왜 공항에 안 나간 걸까.]

[우리의 황제께서 오셨다!]

[유의 그다음 일정 아는 사람 있어? 어디서 묵는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지내는 건 호텔이 아닐까? 그리고 만날 사람들이라면 보카 주니어스 선수들 아니겠어?]

[유를 귀찮게 하지 마! 그는 휴식하러 아르헨티나에 온 거라고! 그러니까 만나더라도…. 악수 정도만 요청하는 게 어때?]

사람들은 유지우가 보카 주니어스 사람들을 만날 거로 예측했고 그건.

“유-!”

틀리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에 입국하고 다음 날, 유지우는 구단에 미리 연락해서 훈련장을 찾았다.

시설이 전보다 좋아진 것을 보고 감탄하던 유지우를 본 선수들은 반갑게 인사했다.

“유럽 최고의 스타님께서 오셨군.”

제일 먼저 온 건 앙헬 몰리야였다.

“오랜만이에요. 앙헬.”

“크으-! 안 본 사이에 더 멋져진 거 같다?”

“그래요? 앙헬은 나이가 들어가는 게 보여서 슬프네요.”

“…이제 사람도 놀릴 줄 알고? 많이 달라졌다?”

“전 여전한데요?”

“분위기, 그래! 분위기가 여기 있을 때랑 다르게 부드러워졌어.”

확실히 유지우는 프로 선수 생활을 하며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한국에서 사건을 겪고 아르헨티나에 왔을 때만 해도 가족을 제외한 모두를 의심하고 경계하던 사람이 지금은 다른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유는 전부터 부드러웠어, 앙헬은 고작 1년밖에 안 봤으니까 그걸 모르겠지.”

그리고 주장 하비에르 카세로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수들과 얘기를 나눴고 곧이어 세바스티안 란첼라 감독이 찾아왔다.

“왔나?”

“네.”

“밥은?”

“먹었습니다.”

“쉬는 건 괜찮고?”

“고향 온 느낌이라 편하게 쉬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네.”

“잘 풀린다고 방심하면 안 돼. 프로의 세상은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그대로 도태된다는 걸 명심하고.”

“감독님이 그런 말씀 하실 줄 알았어요.”

“…크흠.”

세바스티안 란첼라는 채찍과 당근 중, 채찍의 비율이 높은 감독이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선수를 생각하는 사람인 건 분명했다.

유지우도 그걸 알기에 세바스티안 란첼라의 조언을 듣고 공감했으니까.

“3일 뒤, 경기 끝나고 같이 밥이나 먹지.”

“좋습니다.”

“대답은 여전히 시원시원해서 좋군.”

“플레이도 시원시원해졌습니다.”

“그건 여기서도 보고 있으니까 알고 있어.”

“2연속 트레블 축하드려요.”

“그게 내가 한 일인가, 다 선수들이 한 거지.”

“여전하시네요.”

“너도.”

그 뒤로도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마음이 편했고 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축구 선수로 키워준 곳.

이곳은 유지우에게 친정과 마찬가지였다.

* * *

아르헨티나에서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났다.

하루는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알리샤와 마르시오 가족들과 만나 밥을 먹었고 다른 날은 후원하는 보육원도 찾아갔다.

“아스날에 가서도 계속 후원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몸은 멀어졌어도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지우는 아스날에 갔음에도 아르헨티나와의 인연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중 하나가 보육원 후원이었다.

그는 이적했다고 후원을 끊지 않고 오히려 금액을 더 올려 아이들이 더 잘 클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유, 덕분에 아이들이 지내는 시설이 더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리고, 예전에 말했던 그건 어떻게 되어갑니까?”

보육원장의 질문을 들은 유지우는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대답했다.

“슬슬 시작하려고요.”

“그렇군요. 유라면 잘 해낼 겁니다.”

“그런가요?”

“장담합니다.”

유지우가 계획하는 것.

‘재단.’

광범위한 재단 사업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연봉 일부를 후원금으로 책정해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재단까지 생각하신 겁니까?”

“그냥요.”

“…….”

“아이들을 후원하면서 보니까 이런 아이들이 많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어요.”

“훌륭한 생각이시네요.”

“원장님 덕분입니다. 원장님 아니었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후원하면서 원장과 많은 얘기를 나누며 생각한 재단 사업이었다.

재능은 있으나 환경이 어려워 포기하는 아이들.

유지우는 그런 아이들을 이곳에서 수도 없이 봐왔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도.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도.

음식을 잘 만드는 아이도.

환경 때문에 포기했으니까.

“저는 말입니다. 원장님.”

아이들이 웃는 걸 보고 있자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웃으면서 커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겠어요.”

자신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게.

가족들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유지우의 말을 들은 원장은 웃으면서 하늘을 쳐다봤다.

‘신께서 축복을 내려주실 겁니다.’

원장은 간절히 기도했다.

유지우가 원하는 것을 이뤄 고통받는 아이들이 한 명이라도 줄어들기를.

“그러려면 우선 확고한 기반부터 다져야겠죠.”

지금 당장 시작해도 상관이 없었다.

축구 선수가 사업하는 게 법에 위반되는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유지우는 신중했다.

멀리 보고 가는 후원 사업이었기에 기반을 단단하게 잡아야 했다.

“유!”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뛰어놀던 아이들이 유지우를 불렀다.

“같이 축구해요!”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축구 선수.

그러한 선수가.

“그래!”

보육원 아이들과 벽 없이 어울리는 것을 보고 원장은 눈물을 흘렸다.

가난했던 보육원.

카를로스 로호가 조금씩 후원한 돈으로 버티고 버텼지만, 여유롭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먹는 것은 물론 옷가지, 잠자리까지 걱정해야 했던 시절.

정부에서도 도움을 망설이던 그때.

‘안녕하세요.’

찾아왔던 한 선수 유지우.

그가 아니었다면 아이들의 웃음꽃이 이리도 피지 않았을 거라는 걸 원장은 느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선수는.

“히히히히히-!”

보육원을 넘어 더 많은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여기도 오랜만이지?”

“네, 런던에서도 가끔 생각나더라고요.”

“이 집 스테이크를 한 번 먹으면 다른 곳에서 고기 못 먹는다니까? 내가 스페인에서 뛸 때도 제일 그리웠던 게 이거였어.”

자주 가던 스테이크 집에서 하비에르 카세로, 앙헬 몰리야와 같이 저녁을 먹었다.

“팬들보다 그리웠던 게 스테이크였다니, 하비에르 알고 있었어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하하하하하-! 농담이 진짜 많이 늘었네.”

“시간이 지나니까 이렇게 되더라고요.”

웅성웅성.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하고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TV나 너튜브로 많이 본 얼굴이 있었다.

“…리오넬 메시?”

아르헨티나 레전드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

2000년대 2010년대를 호령하고 은퇴할 때까지 최정상의 면모를 보여주며 발롱도르 역대 최다 수상자.

동경하던 선수가 보이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하비랑 앙헬!”

리오넬 메시가 이곳을 보며 반갑게 인사하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일어나 다가갔다.

“오랜만이에요. 레오.”

“당신은 안 변했군요? 여전한 인기입니다.”

“너희들도 만만치 않잖아.”

보카 주니어스에서 뛰던 시절.

리오넬 메시가 국가대표의 끝물 때, 두 사람이 막내로 합류하며 인연이 있었다고 듣긴 했었다.

“이쪽은.”

“레오도 알죠? 요새 축구계를 흔드는 녀석.”

두 선수와 인사를 나누던 리오넬 메시의 시선은 어느덧 나를 향해 있었다.

씩.

웃음을 짓고선 한 걸음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만나서 반가워.”

내가 축구 선수 생활을 하기 전에 은퇴해 직접 경기를 본 건 없지만, 너튜브를 통해서만 본 선수.

‘세계 최고.’

이 단어가 부족하지 않은 선수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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