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12월 30일, 2032년이 지나기 전.
폴 사르는 감독실로 유지우를 불러 가볍게 티타임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눴다.
“새해는 가족들이랑 보내고?”
“네, 어제 누나가 런던으로 와서요. 다 함께 지낼 거 같아요.”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이네?”
“네.”
“시간 잘 보내고.”
“감독님도요.”
사소한 근황을 주고받던 중, 폴 사르는 슬쩍 주제를 바꾸며 본론을 꺼냈다.
“얘기는 들었어?”
“어떤 거요?”
“이적 소식.”
“아… 보카에서 한 명 데려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누구예요?”
폴 사르가 내민 프로필.
그 이름을 본 유지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카를로스요?”
아스날이 노리는 선수는 카를로스 로호였다.
오른쪽 풀백.
수비력도 뛰어나고 빠른 주력으로 인한 공격 가담이 강점인 선수였다.
보카 주니어스에서 유지우와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는 선수인 만큼, 아스날 입장에선 어떻게든 데려오고 싶은 자원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폴 사르는 유지우를 만나면서 직접적으로 의사를 물어봤다.
보카 주니어스에 관한 건 아스날에서 유지우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카를로스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한층 더 날카로운 공격이 가능해집니다.”
유지우는 카를로스 로호의 플레이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너랑 호흡도 괜찮고?”
“네.”
“성격은 어때?”
“음, 내성적이라서 주변에서 잘 케어해주면 금방 적응할 거예요.”
“플레이 스타일은 우리가 분석한 게 맞는 거지?”
“태클 능력도 준수한데 공격 능력도 좋아요. 커버해주는 선수만 있다면… 윙어처럼 뛰어다니면서 찬스를 만들어주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유지우가 카를로스 로호와 호흡을 맞춘 기간은 1년.
처음에는 불협화음이었지만, 그 뒤로 뛰어난 호흡으로 공격 포인트를 꾸준히 생산해냈다.
넓은 시야.
빠른 주력.
정확한 킥.
심장이 2개인듯한 체력.
아직 유럽 시장에 검증받지는 못했지만, 유지우는 그에게 유럽 베스트 11에 들어갈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선수한테 접근하는 클럽이 많다고 했는데… 아스날에 올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돈에 휘둘리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행이군.”
“…스티븐은 괜찮아요?”
만약 카를로스 로호가 오면 스티븐 하머는 자연스럽게 로테이션 멤버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아스날 부주장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유.”
“네.”
“우리는 동네 동호회가 아니야.”
“…….”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밀려나는 게 이곳의 룰이라는 거, 잊은 건 아니지?”
“…죄송합니다.”
“스티븐한테 미안하지만, 팀을 위해서라면 난 과감히 악역이 될 생각이다.”
프로 선수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스티븐 하머는 안정적인 수비력을 겸비하고 있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폴 사르는 그래서 과감한 선택을 내린 거였다.
팀을 더 높은 곳에 올리기 위해서.
* * *
【 카를로스 로호! 바르셀로나와 접촉? 】
【 보카 주니어스를 향하는 빅클럽들의 시선! 】
【 보카 팬 일동, “우리 좀 가만히 둬라!” 】
카를로스 로호는 31-32시즌부터 32-33시즌까지 아르헨티나 리그 베스트 11에 빠지지 않는 실력 있는 풀백이 되었다.
그래서 빅클럽들의 관심 속에서 여러 제안을 받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럴 때마다 카를로스 로호의 에이전트는 정중하게 제안을 거절했다.
에이전트는 그의 고객이 어떤 클럽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클럽들이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하더라도 그들을 모두 고사했다.
그렇게 여러 제안을 거절한 뒤.
마침내 그들은 아스날과도 미팅을 하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아스날 스카우트 루카스 놀리토입니다.”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명함을 받은 카를로스 로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껏 미팅을 진행하며 그가 이 같은 표정을 지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스날을 가장 기다렸는데 이제 만나네요.”
“…네?”
카를로스 로호의 에이전트가 대신 대답했다.
“카를로스가 가장 원하던 클럽이 아스날이었습니다.”
“저희 클럽이요? 이유가 있으신가요?”
“현재 유럽에 돌풍을 일으키는 클럽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카를로스 로호가 웃으며 먼저 대답했다.
“거기 가면 유랑 뛸 수 있잖아요.”
유지우의 존재.
카를로스 로호는 다시 한번 유지우와 호흡을 맞추는 걸 늘 상상해왔다.
“…그렇군요.”
“보카의 사람들에게 유는 영웅입니다. 그가 떠난 지금도 여전히 보카의 많은 팬은 그를 그리워하고 있죠.”
보카 주니어스에게 있어서 유지우라는 존재는 선수 그 이상의 존재였다.
암흑기였던 그들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남미 리그 최초의 트레블을 안겨준 선수.
몇몇 극성팬들은 유지우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할 정도였다.
그래서 카를로스 로호는 유지우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보카 주니어스에 있던 시간은 짧지만, 그와 함께 한 시간은 강렬했으니까.
“그거 다행이군요. 그러면 조건을 맞춰볼까요?”
서로의 생각이 통했으니, 이제 결정할 건 연봉을 포함한 세부 조건이었다.
.
.
.
【 아스날, 보카 주니어스 풀백 카를로스 로호 접촉 중! 】
【 카를로스 로호, “긍정적으로 검토 중.” 】
【 보카 주니어스 측, “대체 우리한테 왜 그러나!” 】
보카 주니어스는 선수를 키워놓기만 하면 빅클럽들이 와서 데리고 가니 미칠 지경이었다.
앙헬 몰리야.
하비에르 카세로.
이 두 선수가 중심을 잡아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 만약 두 선수도 없었다면 보카 주니어스는 진즉에 중하위권으로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프리미어리그는 우리랑 원수를 진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유, 디에고, 기예르모에 이어서 카를로스까지 데려갈 생각을 했겠어?”
“…카를로스도 떠날 준비를 한다니.”
“이러다가 라우타로도 가는 거 아니겠지?”
현재 미드필더에서 앙헬 몰리야, 하비에르 카세로를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내는 건 라우타로 오르반이었다.
22경기 출전 5골 13어시스트.
준수한 기록을 거둔 그는, 보카 주니어스의 미래라고 불리고 있었다.
“라우타로는 반드시 지켜야 해.”
“유망주들도 올라오긴 했지만, 아직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는 녀석들은 없어.”
“보통 유망주들이 그러는 건 정상이야.”
“그렇지.”
“유의 세대가 이상했던 거라니까?”
유지우와 디에고 로시, 기예르모 다린의 세대.
이 세대는 재능이 뛰어난 선수들이 대거 튀어나온 황금 세대였다.
데뷔하자마자 프로 리그를 씹어먹는 유망주가 어디 흔한가.
그들은 일찌감치 한 팀의 에이스를 차지할 재목으로 성장해 어느덧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들이 되어 있었다.
* * *
2033년.
새해가 되면서 유지우도 만 20세가 됐다.
오전부터 유지우의 집은 붐볐다.
유지우를 관리해주는 스태프들부터 유한우 식당 직원들까지 모여 대규모 새해맞이를 준비하는 것 때문이었다.
“유, 더 빨리요!”
음식들을 준비하는 곳과 떨어진 뒷마당.
그곳에서 유지우는 오전 훈련을 하고 있었다.
작은 폴대를 세워두고 양방향을 오가며 순발력을 높였다.
“두 번만 더 하고 쉴게요. 전력으로 해주세요.”
“네!”
“자세는 좋으니까 계속 유지하시면 됩니다.”
두 사람이 이 같은 훈련을 하고 있을 때면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 게 이 집안의 규칙이었다.
집에 온 손님들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새해인데도 훈련하는 거야?”
“유의 루틴이래.”
“…대단하다. 진짜.”
“저러면 언제 쉬어?”
“사장님 말로는 시즌 중에는 거의 쉬질 않고 매일 훈련한다고 하더라.”
쉴 법도 한데 쉬지 않고 훈련하는 모습에 몇몇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러니까 프리미어리그 황제 소리를 듣는구나.”
그들은 어째서 유지우가 프리미어리그 중심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타다다닷-!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 개인 훈련이었지만, 유지우는 전력을 다했다.
그가 훈련을 마칠 때쯤에는, 그의 이마에서 땀이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삐—익!
휘슬이 몇 번 울린 뒤에 휴식이 주어졌다.
“유.”
휴식 시간도 마냥 쉬는 게 아니었다.
몸 곳곳에 붙여놓은 패드를 기반으로 데이터가 뽑혔다.
에디는 그것을 노트북으로 정리해, 유지우에게 보여주며 설명해줬다.
“힘이 빠지면 왼쪽으로 균형이 쏠려요. 그 부분만 조금 신경 쓰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요?”
“조금 더요. 방향 전환할 때,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해요. 상대보다 반 박자 더 빨리 반응할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유의 전체적인 신체 밸런스는 뛰어난 편이에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압박을 많이 받는 상황에는 순발력이 중요한 건 알고 있죠?”
“네.”
“여기서는….”
훈련은 그 후에도 2시간가량 더 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이제 끝난 거야?”
누나인 유민하가 시원한 물 한 잔을 가져왔다.
유지우는 그걸 받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올라가서 좀 쉬다가 내려와.”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축구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뭘 도와준다고.”
유민하의 팩트폭행에 유지우는 웃음을 짓곤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훈련으로 흘린 땀을 씻고 나선 파티가 시작될 때까지 잠시 휴식을 취했다.
* * *
저녁 시간이 되자 음식들이 모두 마련되었다.
이들은 마당 한 편에 있는 파티장에 옮겨졌고, 마침내 파티가 시작됐다.
“유! 저희 사진 찍어요!”
유지우는 2층에서 잠깐 쉬다가 내려오자, 그를 발견한 사람들은 사진을 요청했다.
“네, 밸러리.”
이름을 말하자 들은 여성은 깜짝 놀랐다.
“제 이름을 아세요?”
“아버지 식당에서 서버로 일하고 계시잖아요. 제가 모를 리가 있겠어요?”
“저는요?”
“샤를로트, 카운터 보시고.”
“저요!”
“릴리는 주방 보조잖아요.”
“와, 다 아시네요?”
“제가 기억력이 좋아서요.”
유지우는 한 번 본 사람을 잘 잊지 않았다.
식당 직원들은 감동한 얼굴을 하며 같이 사진을 찍었다.
“아들! 여기!”
유지우도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새해맞이 파티가 시작됐다.
“아들, 잠깐만 기다려.”
많은 음식 가운데 어머니 서설희가 유지우 취향에 맞는 걸 덜어줬다.
“뭐 더 덜어줄까?”
“이거 먼저 먹고요.”
“천천히 많이 먹어.”
“감사해요.”
다음 경기까지는 5일이라는 시간이 있어서 오늘 하루만큼은 유지우도 마음 놓고 먹기로 했다.
다들 음식을 가져놓고 술을 한 잔 따른 뒤, 한 사람을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유한우는 술잔을 들고 일어났다.
“다들 바쁜 시간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인 사람들은 유한우의 말에 집중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다들 웃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서로 도우면서 올해도 행복한 해가 되기를!”
유한우의 간결한 말과 함께 마시려고 했으나.
“자, 우리 아드님도 한 마디!”
이 자리의 진정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유지우였다.
그의 말도 안 들어볼 수가 없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어….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멋들어진 말은 못 합니다.”
유지우는 어떤 말을 할지 곰곰이 생각하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북런던으로 빅이어를 가져오겠습니다!”
빅이어(Big Ear).
축구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은 이 말을 듣고 단번에 눈치챘다.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
유지우는 지금 그걸 가져오겠다고 얘기한 거였다.
“크으-!”
“역시 유의 자신감은 최고라니까.”
“지금 아스날의 폼이라면 가능할 거야.”
“유가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유! 부담은 갖지 마!”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프리미어리그의 황제로 등극한 아스날 에이스의 말을 안 믿으면 누구의 말을 믿겠나.
2033년 새해는 그렇게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