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외계인-243화 (243/383)

제243화

“부주장직을?”

예상치 못한 말에 폴 사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부주장직을 내려놓겠다는 건 선수단 전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단순히 너의 입지가 줄어드는 거 같아서?”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내려놓겠다는 건가?”

폴 사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만약 그런 문제 때문에 시즌 중 부주장직을 내려놓는다면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 게 마땅했다.

“당장 내려놓겠다는 건 아니고, 이번 시즌이 끝나면 내려놓고 싶습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달랐다.

시즌 중에 부주장직을 내려놓으면 클럽이 흔들릴 수 있으니,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내려놓는 걸 원한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는 거 보니 정말 많이 고민했나 보군.”

“네.”

“내가 싫다고 하면?”

“계속 설득할 수밖에요.”

폴 사르는 말을 잇지 않고 스티븐 하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흔들림이 없어…. 진심이야.’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혹여 이를 통해 출전 수를 늘려달라고 시위를 하는 것 아닐까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폴 사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팀을 위해 진실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다음 부주장은 유가 하면 어떨까요?”

“유?”

“감독님도 아시잖아요. 유에겐 리더쉽이 있는 거.”

“그건 그렇지.”

폴 사르도 유지우에게 리더쉽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매번 챙겨보고 있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경기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메이슨이나 스튜어트를 추천하려고 했는데 그 녀석들은 30대 초반이라… 부주장은 다음 세대를 이끌 녀석이 맡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많이 생각했군.”

“네, 며칠을 생각했고, 어제 경기를 보고 확신이 섰습니다.”

스티븐 하머도 그냥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카를로스 로호에게 밀려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길어진 것도 있었지만, 그동안 클럽을 위해 곰곰이 생각했다.

썩은 물은 사라지고 새로운 물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 일은 시즌 종료까지 너와 나만 알고 있는 걸로 하지.”

“그러겠습니다.”

“…내가 밉지 않나?”

카를로스 로호가 입단해 단시간에 성과를 보여줬으니, 스티븐의 입지는 확 줄어든 셈이었다.

작년처럼 선발로 나갈 경기 역시 자연히 적어질 터였다.

“그럴 리가요. 전 감독님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아스날이라는 클럽이 더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해선 저보다 카를로스같은 유능한 선수가 필요합니다.”

“…고맙군.”

“별말씀을요.”

“하고 싶은 이야기 끝났으면 나가봐도 좋아.”

“네.”

스티븐 하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나갔다.

“참….”

홀로 남은 감독실 안.

폴 사르는 창밖을 보며 웃었다.

아스날에 처음 부임할 때, 직원들이 스티븐 하머를 부른 별명이 떠올랐다.

‘아스날의 어머니.’

어머니들은 늘 희생한다.

자식들이 더 잘 되길 바라며.

스티븐 하머도 마찬가지였다.

아스날이 더욱 잘 되는 걸 위해 스스로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뒤로 빠지겠다는 거였다.

“끝까지 욕심 한번을 부리질 않는 녀석이군.”

그랬다.

그에겐 욕심이 없었다.

무언가 생겨도 늘 주변 선수들을 챙기기 바빴다.

주목받지 못해도.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그런 행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2월 20일.

프리미어리그 25라운드.

아스날 vs 첼시.

장소: 애슈버턴 그로브.

“…이거 분위기가 묘한데?”

경기는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스날 0 – 1 첼시]

점수는 1점 차이였지만, 경기 내용 자체는 더 밀리는 그림이었다.

유지우가 옆구리 통증으로 출전하지 못했고, 선수들의 체력 관리 차원에서 크리스티안 페레스, 데릭 레드먼드, 마테오 크리스단테 등 주력 선수들도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스날은 전승을 한 홈에서도 좀처럼 흐름을 가지고 오지 못하고 있었다.

“중원 점유율은 아스날이 앞서고 있긴 한데 슈팅이 전부 골대나 골키퍼 선방에 막히고 있어.”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아스날의 슈팅이 골대를 맞거나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아스날 팬들의 입에서.

‘골대가 12번째 선수라도 돼?’

이런 우스갯소리마저 나오고 있었으니까.

“운이 따라주지 않는 거지.”

“맞아, 그게 아니었으면 아스날은 세 골은 넣었을 거야.”

“…어쩌면 아스날, 홈에서 첫 패배하는 거 아니야?”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 분명히 뭔가 회심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을걸?”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아드리안 로마오는 전반전만 뛰고 해리 펠티어와 교체됐다.

[아스날이 공격진에 변화를 줍니다!]

다니 아라우호를 중점으로 한 공격적인 빌드업.

아스날은 빠른 템포로 볼을 돌리며 동점 골을 노렸고.

64분에 다니 아라우호가 기회를 잡았다.

퍼—억!

강한 몸싸움으로 압박하는 상대 선수를 유심히 살핀 뒤.

메이슨 가벗이 찔러준 빠른 패스를.

탁.

퍼스트 터치로 압박하는 선수의 다리 사이로 볼을 빼내며 탈압박에 성공했다.

퍼—억!

옆에서 협력수비로 온 첼시 선수가 어깨로 밀며 균형을 흔들었으나.

뻐—엉!

그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전방으로 스루패스를 찔렀다.

수비수들은 재빠르게 반응하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선수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절묘한 패스-! 그리고 그걸 마무리하는 해리 펠티어! 오늘 부진한 아드리안 로마오 대신 나온 해리 펠티어가 동점 골을 만듭니다!]

[그리고 다니 아라우호의 패스도 대단히 영리했습니다. 수비수들이 방향을 읽었는데도! 속도를 더 줘서 아예 따라가질 못하게 했어요.]

남들이 볼 때는 단순한 스루패스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 모든 상황에서 최고의 패스를 보여준 거였다.

- 와아아아아아아!

다니 아라우호 – 해리 펠티어.

아스날의 로테이션 멤버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두 선수가 동점을 만들며 경기를 원점으로 만들었다.

이제 이대로 흐름을 타기만 하면 됐다.

* * *

아스날 1 – 1 첼시.

경기는 원점.

아스날의 홈인 만큼 응원 열기도 압도적이었다.

그 응원에 힘입어 역전 골을 노려보았지만.

까—앙!

[또다시 골대에 막히는 아스날의 공격! 대체 오늘 골대만 몇 번째죠?]

[첼시 12번째 선수가 바로 저 골대입니다! 첼시는 양심이 있다면 저 골대에 연봉을 줘야 합니다!]

아스날이 흐름을 유지했으나 이런 이유로 첼시에게 흐름이 넘어갔다.

“패스해!”

첼시는 어떻게든 이기고자 했다.

막심 코지엘로와 기예르모 다린.

이 두 선수가 첼시의 공격을 이끌었다.

[기예르모 다린이 헤딩으로 떨어트린 볼! 그걸 막심 코지엘로가 슈우우우웃!]

[아---! 빗나갑니다! 힘이 들어갔어요!]

두 선수의 스타일은 거칠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아스날 진영을 공략했고, 이 때문에 아스날의 수비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걸 본 폴 사르는 곧장 마테오 크리스단테를 준비해 솔 테일러와 교체를 준비했다.

뻐---엉!

그러나 마테오 크리스단테가 필드로 들어오기 전.

아스날의 공격을 끊어낸 첼시가 빠르게 왼쪽 측면을 열며 역습 기회를 잡았다.

[하비 모레노! 스티븐 하머가 쫓아가 보지만! 빠르게 얼리 크로스를 올립니다!]

왼발로 잔뜩 감아서 올린 크로스.

기예르모 다린은 볼의 궤적을 보며 움직였다.

퍼---억!

레이턴 버트란드는 그의 움직임을 잡으려고 했다.

‘절대 안 놓쳐.’

전반전에 어이없게 실점하긴 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높은 집중력으로 기예르모 다린을 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뛰어오르며 공중볼 경합을 했다.

어깨를 부딪치며 레이턴 버트란드는 우위를 점하려고 했는데.

‘아니.’

기예르모 다린에게 살짝 밀렸다.

‘안 돼.’

레이턴 버트란드는 어깨싸움에서 밀리며 유리한 고지를 빼앗겼고, 그 결과 기예르모 다린이 크로스에 머리를 가져다 대며 살짝 방향을 틀 수 있었다.

툭.

오른쪽 구석 낮은 곳.

리암 베인스가 손을 뻗으며 날았으나.

철렁.

볼은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균형을 깨트리는 건 첼시입니다-! 첼시가 78분에! 오늘 경기를 앞서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두 골을 넣은 기예르모 다린! 첼시의 스트라이커가 포효합니다!]

첼시의 새로운 스트라이커.

그는 어느새 첼시를 책임질 에이스로 성장하고 있었다.

* * *

그 후.

[해리 펠티어---! 아! 다리 아라우호의 패스를 논스톱으로 처리했는데 골대를 살짝 벗어납니다!]

뻐—엉!

[솔 테일러의 기습적인 중거리-! 떴어요! 관중석에 보내는 슈팅! 힘이 들어간 나머지 볼이 떠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스날의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홈에서의 첫 패배.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폴 사르는 교체 카드를 꺼내며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패스는 정교하지만! 잔 실수가 너무 잦아요!]

[첼시가 리드를 잡고 나선 공격 옵션을 전부 빼고 수비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텐 백, 아예 골대 앞에 버스 한 대를 세워놨어요!]

첼시는 프리미어리그 상위권 팀이었다.

그런 팀이 작정하고 걸어 잠그니, 아스날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 슈팅을 시도했지만.

삐익-! 삐익-! 삐---익!

애석하게도 종료 휘슬이 울렸다.

[아…. 아스널의 무패 행진이 여기서 막을 내립니다.]

[2 – 1! 마지막에 교체로 흐름을 되찾아보려고 했으나!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스날 선수들은 허탈해했다.

유지우는 출전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위로했다.

“괜찮아. 어깨 펴! 우리 겨우 한 번 진 거잖아.”

“…하아.”

다니 아라우호는 눈물까지 흘렸다.

와락.

“왜 울고 그래? 이거 졌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이 말이 맞았다.

“잘했어.”

20세의 어린 선수.

그는 선수들을 위로해줬다.

그렇게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기예르모 다린이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유!”

“기예르모, 축하해.”

두 사람은 가볍게 포옹했다.

“아직 너랑 디에고 쫓아가려면 멀었지 뭐.”

“이걸로 첼시가 리그 3위로 올라올 가능성이 생겼네?”

첼시가 죽기 살기로 이번 경기에 임한 이유.

그건 리버풀을 제치고 리그 3위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아직 리버풀에게 승점이 밀리긴 하지만 이 승리로 2점 차이로 좁혔다.

그러니 3위를 할 희망이 생긴 셈이었다.

“해내야지. 그래야 너희랑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테니까.”

그리곤 기예르모 다린은 유니폼을 벗었다.

“누구랑 교환하려고?”

“쟤.”

기예르모 다린이 다가간 곳.

그곳엔 다니 아라우호가 감정을 추스리고 있었다.

“너 굉장하더라, 유니폼 교환할래?”

“…그래, 좋아.”

다니 아라우호도 흔쾌히 유니폼 교환에 응했다.

아스날이 패배하긴 했어도.

오늘 다니 아라우호가 보여준 플레이는 크리스티안 페레스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할 만큼 뛰어났으니까.

[아스날 1 – 2 첼시.]

32-33시즌, 아스날의 무패 행진은 그렇게 끝이 났다.

패배하긴 했어도 아스날의 성적은 여전히 독보적이었다.

20승 4무 1패.

압도적인 리그 1위.

폴 사르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내 차분히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게 잘된 걸 수도 있어.’

알게 모르게 모두가 무패 행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았고 잠도 제대로 자질 못했다.

이런 게 쌓이고 보면 나중에 한꺼번에 터지는 법.

무패 우승은 분명 위대한 기록이 될 테지만, 시즌 전체의 성공과 비교해본다면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는 명확했다.

훗날 전력 보강을 한다면, 다시금 이 기록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 * *

“감독님! 한 마디만 부탁드립니다!”

경기가 끝나자 기자들은 폴 사르의 인터뷰를 따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무패 우승 실패.’

이것의 인터뷰를 위해서.

폴 사르는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무패를 놓친 건 아쉽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강해졌어요. 언제든 무패 우승을 노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으니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너무 이르게 영광을 거머쥐려고 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무패를 향한 욕심이 났지만.

폴 사르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괜히 욕심을 부리다가 두 가지를 모두 놓치게 될 수 있으니까.

“다시는 오지 못할 기회일 수도 있었습니다. 아쉽지는 않으십니까!”

“아쉽긴 하지만 누가 그러죠?”

“…….”

“다시는 오지 못할 기회라고?”

질문을 한 기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폴 사르는 그를 보며 이어서 말했다.

“우리 선수들은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선수들입니다. 이번 시즌이 아니라면 다음 시즌, 다음 시즌이 안 된다면 그다음 시즌, 두고 보십시오.”

“…….”

“기적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아스날이 최고의 영광을 거머쥐고 말리라는 것에.

스윽.

그는 정면을 보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이것을 보고 있는 팬들을 향해.

“팬 여러분, 무패를 놓쳤다는 걸로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께는 더 큰 선물로 보답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무패 우승보다 큰 선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프리미어리그 출입 기자들은 눈치가 빨랐다.

폴 사르가 말한 더 큰 보답.

무패 우승이라는 영광처럼 역사에 남을 영광.

그건 바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지금 폴 사르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가져오겠다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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