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7화
“유, 괜찮아?”
유지우가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길에 크리스티안 페레스가 옆으로 다가왔다.
걱정스러운 그의 물음에 유지우는 웃음을 지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전반전 내내 집중 견제를 받는 바람에 유지우의 유니폼을 벌써 너덜너덜했다.
“전반전에 몇 가지 실수가 있었어.”
“패스 시도는 좋았는데 마무리가 아쉬웠지.”
“후반에는 이렇게 변화를 줘보는 게 어때….”
두 에이스는 나란히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폴 사르가 들어오며 선수들이 그에게 집중했다.
“플레이는 괜찮았지만, 내가 계속 얘기했잖아. 축구는 결국 골을 넣어야 하는 스포츠라고.”
빌드업 과정이나 기회를 창출하는 모습은 폴 사르도 감탄할 만큼 좋았다.
중요한 건 마무리 능력.
유효 슈팅 비율이 첼시보다 높긴 했지만,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며 선제골을 넣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상대 골키퍼의 반응이 좋아. 그럴 때는….”
폴 사르는 선수들에게 어떤 부분을 고쳐야 할지 설명해줬다.
이어서 후반전에 사용할 전술도.
선수들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집중했다.
“공격 템포의 조율은….”
그렇게 전술 설명이 끝난 뒤.
폴 사르는 선수들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도 방심해선 안 된다. 첼시도 이 경기에 모든 걸 걸었으니까.”
타이틀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FA컵 4강에서 맨체스터 시티에게 패배하면서 첼시에겐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들은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임팩트가 필요했고, 아스날의 무패를 끊는 건 그 같은 기회가 될 터였다.
“분명히 급해지는 순간이 올 거다. 중원에서 압박을 타이트하게 가져가면서 측면으로 유인해. 수비하다 보면 실수가 한 번은 나올 테니 그걸 이용해야 한다.”
폴 사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그도 전반전에서 첼시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거였다.
“지금 여기서 무승부를 해도 문제가 될 건 없다. 우리의 무패 행진은 그래도 깨지지 않아.”
“…….”
“하지만 그걸로 만족하는 녀석은 아스날에 필요 없다. 어떤 경기라도 승리를 노리는 것이 우리 아스날이다!”
선수들은 눈을 빛냈다.
“가서 첼시를 철저하게 부수고 새로운 역사를 써보자!”
* * *
첼시의 킥오프로 시작된 후반전.
아스날은 초반부터 라인을 올려 압박하며 거칠게 붙었다.
[아스날의 압박에 첼시가 전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막심 코지엘로는 전방에서 볼을 받아주려고 움직였지만, 카이 베일로브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방해했다.
[네덜란드의 진공청소기라는 별명이 있는 선수답게 필드에서 막심 코지엘로를 지우는 카이 베일로브!]
혹시라도 첼시에게 흐름이 넘어갈 것 같으면.
삐—익!
영리하게 반칙으로 끊으며 흐름도 같이 끊어냈다.
그리고 그건 첼시도 마찬가지였다.
양 클럽은 전반전보다 타이트하게 수비하며 영리한 반칙도 자주 했다.
그 뒤로 주심의 휘슬이 연달아 울렸다.
10분 동안 카드가 세 장이 나왔다는 사실은, 양 팀의 승리를 향한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지 잘 보여주는 듯했다.
[시작부터 중원 줄다리기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점유율은 54 vs 46, 아스날이 앞서고 있긴 하지만 첼시가 뒤처지는 그림은 아닙니다.]
마테오 크리스단테와 카이 베일로브.
에이스 듀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지만, 두 사람이 차지하는 중원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툭.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빌드업.
특히 수비라인과 연계하는 빌드업은 첼시의 라인을 끄집어내기 위한 폴 사르의 지시였다.
[아스날이 전반전보다 뒤에서 빌드업을 운영합니다.]
[데릭 레드먼드와 레이턴 버트란드, 심지어 골키퍼인 다비드 바르트라까지 개입하네요. 첼시의 내려앉은 라인을 올리겠다는 의도겠죠?]
첼시는 공격력이 좋지만, 그들의 공격 패턴 대부분은 역습을 이용한 속공 전술이었다.
때문에 아스날은 첼시의 라인을 올리게 하면서 뒷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너무 올라가지 말고!”
하지만 첼시는 그것을 눈치채며 하프라인 위로 타이트한 압박을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규칙을 정한 거였다.
하프라인 밑으로 내려오면 타이트하게 붙자고.
[후반 초반! 아스날이 볼을 빼앗자마자 짜임새 있는 빌드업을 통해 점유율을 가져갑니다.]
첼시도 적절하게 압박을 가하며 혹시 모를 아스날의 역습에 대비했다.
그렇게 10분이라는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아-! 첼시의 역습이 끊기며 아스날에게 기회가 옵니다!]
[마테오 크리스단테가 바로 크리스티안 페레스에게 넘겨주며!!!]
크리스티안 페레스는 볼을 잡자마자 들어오는 상대방의 압박에.
툭.
원터치로 패스를 틀어줬다.
그 패스를 받은 건 유지우였다.
살짝 중앙으로 올라와 볼을 터치한 그는 미리 봐둔 길을 통해 드리블을 시작했다.
[저 위치에서 유지우 선수한테 공간을 줘선 안 되죠!]
첼시 선수들은 공간을 차단했다.
유지우가 전방으로 패스를 뿌릴 수 없도록 선수들의 개인 마크도 타이트하게 들어갔다.
퍼—억!
그들은 진드기처럼 상대 선수들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유지우는 패스 루트가 없는 걸 보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때 옆에서 들어오는 태클.
정확하게 볼만 건드리는 깔끔한 태클이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유지우는 찰나의 순간 빠르게 판단했다.
이대로 돌파를 해서 슈팅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지를.
그는 그렇게 수비수의 태클에 일부러 걸리며 넘어졌다.
삐----익!
[어어어-! 여기서 프리킥이 선언됩니다!]
[태클이 깊었다는 판정! 유지우 선수가 넘어지면서 프리킥 기회를 가져옵니다!]
좋은 위치에 얻은 프리킥이었다.
첼시 선수들은 일제히 항의했지만 주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한 액션이었으니까.
“유-!”
프리킥 성공률 62%의 유지우와 47%의 크리스티안 페레스.
정점의 킥력을 자랑하는 두 선수가 나란히 서서 킥을 준비하자 골키퍼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여기서 골을 넣는다면! 결승 골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제가 다 긴장이 됩니다. 손에 땀이 차고 있는데요! 과연 아스날이 여기서 득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준비가 끝난 뒤, 주심의 신호가 떨어지자.
후우.
유지우는 심호흡하고 수비벽의 오른쪽으로 강한 회전을 넣어서 슈팅을 시도했다.
뻐엉-!
부메랑처럼 꺾인 슈팅은 골대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다가 안으로 확 꺾였다.
절묘한 궤적.
그대로 골이 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틱.
그런데 볼은 목숨 걸고 뛰어오른 골키퍼의 손끝에 맞으며.
까—앙!
골대에 맞고 나왔다.
흘러나온 볼은 첼시 수비수가 빠르게 걷어내며 득점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걸 막아내는 골키퍼! 정말 미세한 차이로 슈퍼 세이브를 보여줍니다!]
[수비수의 후속 플레이도 깔끔했습니다. 득점 기회를 놓치는 아스날! 그래도 흐름을 탔으니 이 기세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프리킥의 실패로 아쉬워하는 것도 잠시.
아스날 선수들은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 * *
여러 번의 기회가 나오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득점이 안 터지고 있었다.
팬들도 언젠가 터질 득점을 기대하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양 클럽 서포터즈들의 응원 열기도 엄청납니다.]
[아스날 응원가가 주로 들리지만, 첼시 팬들도 원정인데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FA컵 4강에서 탈락한 그들에게 남은 건 아스날의 무패를 끊었다는 타이틀 하나였다.
그 때문에 플레이 하나하나 간절했다.
신중했고.
또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과감한 플레이를 이어갔다.
뚝.
그때였다.
흐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돔 형태의 구장이 아니라 필드 위쪽이 뚫려 있어 비는 그대로 필드와 선수들을 적셔갔다.
타다다다닷.
그러나 선수들의 발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빗방울이 굵어져도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볼만을 쫓았다.
촤—악!
몸을 날리고.
퍼—억!
부딪치며.
간절하게 볼의 소유권을 가져오고자 했다.
그렇게 아스날의 공세에 첼시가 밀리는 듯 보였으나, 첼시도 맞불을 놓았다.
[패스를 잘라낸 첼시! 그대로 전방으로!]
[하비 모레노가 중앙에서 볼을 받아주고선 오른쪽으로 길게! 막심 코지엘로를 봅니다!]
첼시의 역습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아스날이 대비해서 곧장 라인을 구성했으나.
라인이 채 완성되기 전에 막심 코지엘로가 더 들어가지 않고 얼리 크로스를 올렸다.
뻐---엉!
날카로운 크로스는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 공간으로 정확히 날아갔다.
[기예르모 다린이 침투! 하지만 데릭 레드먼드가 따라붙습니다!]
기예르모 다린이 크로스 궤적을 보며 달려들었다.
자석처럼 빨려 들어오는 볼.
그는 그대로 낙하지점을 파악한 뒤, 점프를 뛰며 데릭 레드먼드와 경쟁을 했다.
퍼—억!
데릭 레드먼드는 영리하게 어깨로 상대방을 밀어내며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
머리에 먼저 닿기 직전.
막아냈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기예르모 다린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무슨 점프력이.’
탄력이 남달랐다.
데릭 레드먼드의 제공권보다 높게 잡힌 타점.
툭.
기예르모 다린이 이마에 맞힌 볼은 왼쪽 구석을 노렸지만, 다비드 바르트라가 뻗은 손에 막히고 말았다.
- 아아아아아아!!!
아쉬워하는 첼시 팬들과 안도하는 아스날 팬들.
나올 듯 나오지 않는 골에 양 팀 팬들의 손에 땀이 찰 무렵.
[득점이 이렇게 안 나올 수가 있나요?]
[양 클럽이 수비도 수비지만, 골키퍼들의 선방쇼가 엄청납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 한 골이면 됩니다! 한 골!]
어느덧 경기 시간은 10분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 * *
이 경기에서 아스날은 무승부를 해도 크게 상관이 없었다.
55경기 연속 홈 경기 무패 행진이 무승부를 했다고 깨지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 종료 시간이 다가올수록 급해지는 건 첼시일 수밖에 없었다.
“템포를 올려도 간격은 유지해!”
첼시 감독은 라인을 올리면서도 아스날의 역습에 대비해 최종 수비라인은 올리지 못했다.
이것이 그들의 실수였다.
공격을 더 다양하게 가져가며 아스날을 흔들려면 최종 수비라인까지 올리며 패스 경로를 더 많이 가져갔어야 했는데 메이슨 브라이튼의 뒤를 받치는 선수가 없었다.
[마테오 크리스단테의 깔끔한 태크으으을! 볼을 가져오는 아스날!]
스탠딩 태클로 볼을 빼앗은 마테오 크리스단테는 전방으로 패스를 뿌렸다.
하지만 첼시는 그에 대해 방비를 해둔 상태였다.
최종 수비라인을 올리지 않은 덕분이었다.
공격력을 반감시킨 결정이었지만, 덕분에 아스날의 기습 공격을 막아낼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
“사이드에서 올라오는 걸 경계해! 중앙은 내가 커버할게!”
그들은 사전에 약속한 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아스날은 Y.M.C.A라인이 가동됐다.
네 선수는 일제히 올라갔고 볼을 잡은 크리스티안 페레스가 결정권을 가졌다.
스윽.
그는 고개를 돌려 상황을 인식했다.
어떤 식으로 공략할 것인지.
그의 머리가 계속해서 회전한 끝에, 패스가 뿌려졌다.
툭.
크리스티안 페레스가 왼쪽에 있는 마틴 그라임스에게.
툭.
마틴 그라임스는 압박하는 선수가 다가오자 원터치 로빙으로 올라온 아드리안 로마오의 앞으로.
툭.
아드리안 로마오는 패스가 바운드 되자 힐패스로 들어오는 크리스티안 페레스에게.
그들이 보여주는 원터치 플레이에 첼시 수비진의 혼이 쏙 빠졌다.
불과 몇 초만에 벌어진 패스 플레이.
그 아름다운 그림에 관중들이 환호하고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일어날 때.
투—웅!
마무리를 지으려는 크리스티안 페레스의 원터치 로빙 패스가 수비수 키를 넘겼다.
그리고 Y.M.C.A라인의 중심인 유지우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가슴 트래핑으로 센터백의 진행 방향의 반대쪽으로 떨궈 역동작에 걸리게 한 후.
오른발로 골키퍼의 다리 사이로 가볍게 볼을 툭 밀어 차.
철렁.
오늘 경기 첫 골이자 결승 골을 만들어냈다.
첼시 선수들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체념했다.
그 순간, 아스날의 붉은 파도가 첼시의 푸른 파도를 집어삼켰다.
[고오오오오올! 유지우 선수가 마침내 경기 종료 직전! 오늘 경기의 첫 골이자 결승 골을 신고합니다!]
[그야말로 아스날이 어떤 축구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준 골이었습니다! Y.M.C.A라인! 아스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격라인으로 뽑힐 네 선수의 합작품이 첼시의 희망을 산산이 부숩니다!]
89분에 나온 극적인 골.
첼시는 후에 어떻게든 동점을 하려고 했으나 급한 마음에 실수를 거듭할 뿐이었다.
결국, 아스날은 유지우의 결승 골로 1 – 0 승리를 거뒀다.
삐익-! 삐익-! 삐---익!
종료 휘슬과 동시에 전광판에 나오는 ‘55’라는 숫자.
마침내 레알 마드리드가 세운 기록과 타이기록을 만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