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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처음이라서 (3/12)

3장. 처음이라서

술은 마실 때는 좋지만 깨어나고 나서는 마신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지는 것처럼 아픈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날의 컨디션도 최악을 달린다. 전날에 술을 먹고 한 말의 반은 개소리고, 나머지 반은 진심도 무엇도 아닌 흥에 들떠서 하는 헛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열에 아홉 번 중에 남은 한 번, 그 한 번의 느낌을 받으며 일어났다. 창피함도, 우스움도, 지나버린 감정의 쓰레기봉투를 여는 것도 아닌 그 가뿐함, 마른 갈대 같은 갈색 눈동자.

씹을수록 달콤한 어제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을 때 방으로 들어오는 냄새가 내 위장을 뒤틀었다. 부엌에서 사조가 요리를 하나 싶었는데 웬걸. 작지만 정갈한 밥상 위에 죽 그릇이 놓여 있었다. 푸르뎅뎅한 색깔이 꼭 보말죽이나 전복죽처럼 보였다. 숟가락하고 입가심할 깍두기까지 반듯한 네모로 잘라 올려놓았다. 바닥으로 내려가 식탁 앞에 앉았다. 숟가락으로 죽 한 숟가락을 떠서 먹으니 고소한 참기름 맛이 났다. 보말죽이었다. 섬에 와서 처음으로 바닷가 음식을 먹어 본다. 입맛이 없어서 몇 술 뜨고 끝내려고 했는데 사조가 끓여다 준 정성을 생각하니 남길 수 없었다. 한 시간에 걸쳐서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비운 죽 그릇과 식탁은 직접 부엌에 내놓았다. 사조는 평상 위를 둘러보아도 없기에 구태여 찾지 않았다. 어차피 그 남자랑 무얼 해 보자는 것도 아니고, 이 섬을 나가면 끊길 인연인데 굳이 나서서 찾아 정답게 얘기하는 것도 우습고. 나중에 보면 죽 잘 먹었다고 하는 게 좋지. 그게 맞는 거지.

‘내 나이가 몇으로 보이기에 그래?’

설거지하기 위해 틀어놓은 물은 십 분이나 그냥 보냈다. 개수대에 물이 넘칠 동안 멍하니 어제 일을 생각했다. 어쩜 그렇게 다들 사람 마음에 불을 지펴놓고 떠나는 데에 선수인지 모르겠다. 어쩜 그렇게 나는 사람들 마음에 불도 못 지피고 어정거리다가 내쫓기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누구의 마음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사람, 잊혀져도 그만인 사람이 된 거다.

툭, 거친 손길로 물을 잠갔다. 남이 해 준 죽을 먹고 아침부터 잡생각에 시달리는 것도 재주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말고 남이 나한테 죽 끓여 준 게. 맨날 남한테 끓여 주기만 해 봤지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죽 한 그릇에 쉽게 감동하고 그러면 안 되는데. 후끈해지는 볼을 부여잡고 멀뚱멀뚱 선 게 이상 증세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싱크대에서 물기 어린 손을 닦지도 않고 서성이는 것, 일 층에 내려올까 싶어 작은 소리에도 집중하고 있는 것, 누가 봐도 나는 사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애를 기다린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못하고 십 분을 거기에 서 있었을까.

바람이 부는 소리에 창밖을 바라보니 볕이 좋았다. 며칠간 비만 보다가 맞이한 볕이라 그런지 더욱 반가운 느낌이었다. 불도 켜지 않은 깜깜한 주방으로 볕이 들어와 내 앞까지 손을 뻗었다. 그 볕을 보고 생각이 난 게 있었다.

‘정인이 너는 첫사랑 있어?’

그런 질문을 술자리에서 종종 들어봤던 것도 같다. 나는 그 질문에 항상 이도 저도 아닌 미소로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런 거냐고 아닌 거냐고 묻는 질문에 입이 아닌 속으로 대답했다.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다고. 아니면 반대로 한 사람도 아닌 것 같아서 잘 모르겠다고.

첫사랑. 그 사랑의 기준이 뭘까. 사랑은 도대체 뭘까. 이 사람이 드디어 사랑이다 싶어서 믿고 안심하면 그전에 만났던 사람보다 더한 상처를 주고 떠나갔다. 나는 거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 잊고 싶은 사람이었다. 남들은 첫사랑을 추억하고 산다던데, 그럼 나는 첫사랑이 없었다. 다시 들춰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기억들. 어쩌다 생각나면 그날 밤 짜 둔 것처럼 악몽을 꾸었다. 남들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사랑을 한 게 아닌가 보다. 구걸만 한 셈이었다.

암흑과도 같았던 전 남자친구를 떠나보내며 다짐했었다. 사랑 그까짓 것은 이 세상에 없는 허상에 불과하니까 하지 말자고. 이딴 죽 한 그릇이 뭐라고 누구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설거지하다가 젖은 손을 바지에 닦으며 현관으로 뛰어갔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신발을 구겨 신고 밖으로 나갔다. 머리 식힐 겸 바람도 쐬고 배도 언제 오는지 보고, 비타민 가득한 볕을 느끼면서 그날 내가 다짐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했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의 마지막 한 걸음. 그 마지막 한 걸음을 사조에게 내어 줄 수 없었다. 그건 걔한테도 못 할 짓이었다.

섬을 한 바퀴 다 돌고 바다에 앉아 배가 언제 오는지 확인하려고 했다. 담을 넘어 불이 꺼진 아랫동네로 가고 있을 때였다.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려 앞쪽으로 시선이 갔다. 언덕을 올라오고 있는 진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눈을 찡끗했다. 기지개를 켜던 자세로 굳어 버린 나는 돌연 정색했다. 사실은 좋은데, 좋아해선 안 되니까 표정이라도 애써 봤다.

“반가워 죽는 표정이네.”

걸어 올라오는 사조의 머리칼이 눈에 띄게 짧아졌다. 사조도 내 시선을 아는지 괜스레 짧게 깎은 자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자연스럽게 돌아서서 없어지는 척해야지. 그랬던 계획은 사조의 짧게 친 머리에 붙들리는 바람에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입고 있는 까만 러닝셔츠가 이제야 눈에 들어올 정도로 나는 그의 머리 스타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은 까무잡잡해진 사조의 팔이 등 뒤에서 나왔다.

“짜잔.”

얼마 전에 사조가 슈퍼에서 사 온 그 아이스크림이었다. 소주와 함께 사 온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 행방을 알 수 없어서 은근히 아쉬웠던 참이었다. 사조는 받으라는 듯이 아이스크림을 흔들었다. 내가 반응이 없자 기껏 가져왔는데 먹기 싫으면 관두라고 했다. 사조는 아이스크림 봉지를 찢어 자기 주머니에 넣은 후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나무 손잡이 두 개가 달린 아이스크림이 내 앞에 나타났다. 아이스크림이 볕에 녹아 버릴까 봐 무심결에 그 손잡이를 잡았다.

눈에 보이니까 먹고 싶어졌다. 손잡이를 잡고 양옆으로 잡아당기자 아이스크림은 반으로 갈라졌다. 내가 이 아이스크림을 찾는 이유는 할아버지와의 추억도 있지만, 나 자신의 운수를 테스트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언제쯤 정확히 반으로 갈라질지를 말이다. 나는 매번 한쪽이 더 많게 갈라졌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불공평하게 갈라진 아이스크림을 보며 그에게 많은 쪽의 아이스크림을 주려고 했다. 먹고 싶어서 기다리는 게 미안해서라도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망설임 없이 적게 잘린 쪽을 제 혀로 가져갔다. 진한 초코맛 아이스크림이 그의 빨간 혀에 뭉개졌다. 그는 입맛에 맞지 않는 것처럼 미간을 모으더니 아이스크림을 한입 더 깨물었다.

“이런 것 많이 먹으면 병 걸린다.”

“병?”

“달기도 달아서.”

이럴 수가. 내가 왜 착각했을까. 사조는 한 개도 어리지 않았다. 왜 어리게 봤는지 모를 정도로 머리를 짧게 깎으니 나와 동갑, 혹은 연상처럼 보였다. 나이가 들었다기보다 함부로 어린애 취급을 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지금껏 나와 이 아이스크림을 먹은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큰 쪽을 가져갔다. 달기도 달다며 싫은 티는 팍팍 내는 주제에 사조는 아이스크림을 따듯한 입안에서 녹여 먹고 있었다. 가끔씩 보이는 그의 붉은 혀가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내 마음을 핥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어디 가게.”

죽에 이어서 이번엔 아이스크림에 넘어간 거냐? 성도, 출신도, 가족도,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한테 빠져서 어쩌려고. 아이스크림을 한 입도 먹지 못하고 그에게서 멀어져 뒤편에 이어진 샛길로 빠졌다. 풀이 무성하게 나지도 않고 꽃이 듬성듬성 피어나 내 마음을 뺏지 않는 길. 섬을 두른 평지라서 힘들이지 않고 바다와 섬 전체를 둘러보기에 좋았다. 여름은 여름이었다. 장마는 장마였고. 빗물을 잔뜩 맞고선 푸르러진 꽃들을 보자니 내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저렇게 장마가 지나고 더 푸르러지는 게 있는 반면, 장마 같은 사랑을 끝내고 석 달 내리 앓아눕는 얼간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얼간이가 나인데.

“단 것을 달다고도 못 하나.”

미치겠다. 훠이훠이 쫓아낸 줄 알았는데 따라오고 있었다. 마음을 숨기는 제일 좋은 방법 같은 건 없었다. 특히 나 같은 사람은 그에게 흔들린다는 티를 아주 많이 내게 될 것이었다. 그게 처음에는 창피한 건 줄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되게 창피한 거였다. 착한 사람들은 그걸 약점으로 안 봐줄지 몰라도,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그만큼 착한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그건 나의 약점이 됐다.

“안 따라와도 돼.”

차갑게 말하려고 해도 자꾸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말이 나왔다. 한술 더 떠서 그가 오해하거나 미워할까 봐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날이 더워. 나 저기 앞까지만 갔다 올 거야.”

이쯤이면 안 따라오려나 싶었는데 내 뒤를 밟는 발소리는 끈질겼다. 이제는 그림자도 다 가리게 생긴 그의 존재감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저기 앞까지 어디.”

“저기…….”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자면 어디쯤.”

시답잖은 그의 말에 넘어가 나는 아무 곳이나 손가락으로 찍었다. 잘 대처한 줄 알았는데 뒤에서 웃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내 복잡한 마음을 알아낸 웃음인 것 같아서 그를 찾아 뒤돌아보았다.

보지 말걸.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바다 구경하는 그를, 뒷짐 짓고 걸어오는 그의 특이한 걸음걸이를. 하나둘 그의 모든 게 마음에 각인되기 시작해서 눈을 깜빡일 수조차 없을 때, 바다 구경을 마친 그의 무심한 눈동자가 돌고 돌아 나에게로 왔다. 얼마 가지 못해서 붙잡힌 나의 시선을 조롱하듯이 그가 아까보다도 더 환하게 웃었다. 입속까지, 마음속까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풍경이라도 덜 예뻤으면, 바람이라도 더 불었으면, 나는 이 장면을 잊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필 바람이 적당해서,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었다.

“너, 꼭 너희 집 앞마당 걷듯이 걷는다?”

왜 그렇게 걸어서 나의 기억에 남는 거냐고 따져 묻는 거지만 그는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였다.

“맞는데. 여기 내 집 앞마당이잖아.”

“무슨. 섬 전체가 다 네 것은 아니지.”

“내 것, 맞는데.”

과장이 심한 그의 말을 듣고 피식 웃자 그도 따라서 웃었다. 하긴. 자기 혼자밖에 안 사니까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뒤돌아서 걷던 내가 앞을 보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갑자기 보폭을 넓혀서 따라 걸어온 그가 내 머리를 손으로 꾹 누르고 앞질렀다.

“더 가면 바다다.”

그가 아까 내가 가리킨 곳을 따라 가리키곤 여유작작하게 산책길을 걸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걷는 그의 뒷모습은 자유라는 단어와 어울렸다. 참 별거 아닌 행동으로 사람 마음 어지럽히는 데에 뭐 있다. 까만 러닝을 쫓는 나의 발을 멈추고 싶었지만, 뭐, 그런 건 대체로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커다란 참나무 몇 그루에 가운데만 봉긋 솟은 작은 산엔 볼 일이 없어 바다 옆으로 난 산책길만 걸었다. 나는 다 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버리지 못했다. 손이 끈적거리고 찝찝했지만 약품 먹인 나무 막대기의 질감이 그의 손가락 같았다. 말없이 둘이 길을 걷는 게 좋았다. 서로를 재는 말도 안 하고, 나는 내 감정을 온전히 가질 수 있고, 남의 말에 이리저리 바뀌는 게 아니어서 편했다. 원래 감정이란 게 내가 처음 남한테 얻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질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사랑을 할 때보다 빠지기 직전이 더 좋은 것 같다.

앞서서 잘만 걷던 사조가 멈추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듯이 턱에 흐르는 땀을 닦은 그가 날씨를 탓했다.

“덥네.”

“그니까 내가 덥다고 했잖아. 오지 말라고.”

그가 멈추어 있으니 내가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금방 만나게 됐다. 그는 더워서 제정신이 아니고 내 경우엔 그냥 제정신이 아니었다. 짧게 깎은 그의 머리를 볼 때마다 결심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았다. 푹 고개를 수그린 나는 아이스크림이 묻은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런데 사조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손 내봐.”

어린애도 아니고 아이스크림 하나 처리 못 해서 창피당하긴 싫었다. 하지만 사조는 기어코 된장인지 고추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양 내 손목을 잡아 끌어갔다. 좋아한다고 떠벌린 아이스크림을 손에 칠갑한 것을 보자 사조는 고소하다는 듯이 킬킬 웃었다.

“더위는 네가 먹었구나.”

“집 가서 씻을 거야.”

“가는 길은 참을 수 있으려나.”

내 말끝은 자신감을 잃고 흐리멍덩해졌다. 사조는 있는지도 몰랐던 생수병을 허리춤에서 꺼내 내 손을 씻어 주었다. 생수병 주둥이에서 차가운 물이 떨어져 찝찝한 자리에 닿았다. 흘린 물이 바닥에 닿을 때가 돼서야 단 숨을 내쉬었다. 더위를 안 타는 나의 온몸이 열이었다. 그의 엄지가 손금을 문질러 닦아 주듯이 만지작거릴 때마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렸다.

“냄새나.”

그가 곁에 붙어 있는 게 불편해서 일부러 이맛살 찌푸리며 말했다. 냄새는커녕 살랑대는 향기가 나서 문제였다. 물 한 통을 다 비우고 나서야 손 놓은 사조를 혼이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칠칠맞지 못하게 그의 입가에 초코아이스크림이 묻어 있었다. 나는 생수 한 병 쏟아부은 손을 그의 입가에 댔다. 텅 빈 물병을 바라보던 사조의 눈길이 다가오고 있는 손으로 순식간에 옮겨 갔다. 감도 좋고 예민한 남자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손가락은 그의 입가를 사심 없이 벅벅 문질렀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조가 괘씸했다. 봐주지 않고 세게 문질렀더니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이미 다 닦고 없어진 것을 알까 모를까. 빤히 지켜만 보던 사조가 입술을 움직여 내 손가락에 촉, 입을 맞췄다.

“바보 아니야?”

호의로 닦아 주었다며 손만 떼면 될 것을, 그냥 두기엔 얄미운 그의 머리를 한번 세게 밀었다. 장난기 많은 오뚝이처럼 넘어지다가 머리를 똑바로 세운 사조의 입이 무슨 폭탄을 제조할까 겁났다. 달리기에 취미도 없으면서 따라오지 말라는 양 그를 견제하며 달렸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서 말도 못 붙일 만큼 멀리멀리 달아나려고 했다.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굼벵이 단짝처럼 산 탓에 몸이 맛이 갔나 보다. 뛰어 봤자 벼룩이라더니 사조에게서 얼마 도망치지도 못하고 체력이 바닥을 보였다. 그래도 이만큼 거리를 벌려 놓았으면 혼자 산책하는 건 따 놓은 당상이라고 뿌듯해할 때였다.

“다 뛰었냐.”

사조는 뜀박질하지 않고 쉬엄쉬엄 걸어서 나를 바짝 쫓아왔다. 뒤에서 용쓰는 나를 재밌게 구경했을 거란 생각에 뺨이 화끈했다. 낯을 들기 부끄러워 걸음을 재촉하는데 어느새 따라와 나란히 선 그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이름, 가르쳐 주지.”

그의 투정 깃든 목소리를 듣고 나는 티 안 나게 슬쩍 웃었다. 그러고 보니 초면에 내 이름도 안 가르쳐 줬다. 조르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좋아서 못 들은 척 바다를 보았다. 그러자 더위에 온도가 올라간 손가락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살짝 잡아당기니 그 사이로 바닷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내 것은 알면서. 치사하잖아.”

왼편에 난 길로 뒤도 안 보고 뛰어가면 5분 안에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손힘으로 옷자락 잡은 손을 바들거리며 떨어트렸다. 그의 손이 없어져 느끼는 허전함은 외로운 마음이 우려낸 거짓 감정일 것이다.

“정인.”

“…….”

“송정인.”

내 이름에 대한 사조의 소감은 사양하고 싶었다. 뛰어서 5분 안짝으로 집에 가려고 하는데 암만 뛰어도 그를 따돌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벌어진 거리를 따라잡는데 숨 한 번 거칠게 쉬는 법이 없을까. 온몸에 진땀이 흘러서 뛰는 것을 포기하고 앞만 보며 걸었다. 두세 발자국쯤 뒤에서 걷던 그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도 감추기에 얼마나 대단한 이름인가 했더니.”

대단해서 감춘 게 아니라, 이름을 알려 줘야겠다는 상식을 잊을 정도로 그와의 시간에 몰두 되어 있던 것이었다.

“어여뻐서 채갈까 봐 안 가르쳐 준 거냐?”

우는 아이 입에 사탕 물려 주면서 놀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담담하게 맞장구쳐 줘야 하는데. 아니면 담담하게 바라보기라도 해야 어디 가서 그 여자 참 순진하더라는 소리는 안 들을 터였다. 안 봐도 얼굴이 새빨개져 있을 나는 뭐가 그리 당당하다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기까지 했다. 피할 리 없는 그가 내 눈에 뜬 감정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의 손이 눈가에 닿자마자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툭하면 우는구나.”

“하지, 마.”

“무엇을?”

“만지지 말랬잖아, 내가. 그러지 말랬잖아.”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내 삶을 휘젓고 떠난 다른 남자들에게 야단이어야 할 화를 그에게 내고 있었다. 어차피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나중 가면 부담스럽다고 버릴 거면서 안 그래도 숨이 간당간당 붙은 사람을 심심풀이 땅콩 대하듯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함이 그의 잘못이었다.

“왜들 그렇게 배려심이 없는지 모르겠어.”

이 후덥지근한 여름날에 혼자 열변을 토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만도 한데, 자세나 표정이나 변함없이 의젓한 사조는 나를 가늠하듯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느낌에 됐다며 힘을 빼자 그가 포기 않고 따라붙었다.

“바쁘다, 바빠.”

말 좀 그만 걸었으면.

“정인아.”

이쯤이면 이상한 여자려니 하고 가만둘 법도 할 텐데 사조는 무엇에 꽂혔는지 나를 따라다니며 이름을 불러 댔다. 재미로 이름을 말하는 그의 입술이 짜증스럽고 원망스러웠다. 더는 그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데, 저를 싫어해서 밀어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이라서 더 그랬다. 그는 저가 순정입네 하는 남자들과 똑같이 배려심이 없었다. 자기가 책임져 주지 못할 것에는 티끌만 한 관심도 주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5분 걸릴 거리를 10분을 걸어 돌아와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침대에 눕자마자 그가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층으로 올라갈 줄 알았던 발소리가 회전하여 복도로 들어온 느낌은 단순히 느낌이 아니었다. 미닫이문에 드리운 사조의 그림자는 심장이 진정하는 데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밥은.”

나는 그에게 보이지 않을 것을 앎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혼자 먹기 싫은데. 그래도 안 나올래.”

이번에는 아예 베개로 귀를 막고 대답하지 않았다. 밥 먹자고 추근대던 그가 떠나가는 게 보였다. 후, 하, 심호흡하면서 이 층으로 올라가는 그의 발소리가 끊기지 않길 바랐다. 키도 큰 만큼 무게도 보통 이상일 텐데 발소리는 새털처럼 가벼운 게 신기했다. 하기야 연애는 죽어도 안 한다면서 남의 발소리를 분석하고 있는 내가 더 신기한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아이스크림이 씻겨 나가 솜이불처럼 보송해진 손을 베개에 닦았다. 그가 입을 맞춘 손가락도 괜히 훔쳐 온 금덩이처럼 쓰다듬어 보고 싶을 것 같아 이불 밑에 넣어 두었다. 그 손으로 심장을 누르고 있으니 진정이 안 되겠지 싶었다.

모든 게 처음이라서, 이런 걸 겪어 본 게 처음이라서 놀란 게 분명했다. 하늘 아래 같은 사람은 없으니 사조가 해 주는 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걸 테지만, 수개월 지나 껍데기 벗겨 보면 그놈이 그놈일 것이었다. 사조가 특별한 게 아니라 처음이 특별한 거라고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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