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헤엄
어렸을 때 나는 건강하지 못했다. 아니, 몸은 건강한데 주변이 건강하지 않았다. 우리 친할아버지 말고 다른 가족, 특히 부모가 나를 양육하지 않으려고 한 것부터 조짐이 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손길이 없으면 꾀죄죄하게 변한다. 외모가 아니라 마음까지도 꾀죄죄해진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있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대신한다고 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분들은 대체로 어린아이의 감성을 노인의 애환보다 아래로 보기 때문에 서로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와 비슷하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 양육자인 경우를 봤을 때는 그랬다.
우리 할아버지는 정인이가 숙제를 자주 빼먹는다는 담임의 전화도 쩔쩔매며 받고선 노인네는 아무것도 모르니 학교에서 지도 편달 자알 부탁해 달라고 말하는 분이었다. 전쟁 통에 국민학교도 못 마친 할아버지의 인생에서 선생이란 자들은 감히 맞먹어 볼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할아버지가 맞먹을 수 있는 건 단골 시장 상인들과 손녀인 나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스팸 없으면 밥 안 먹는다는 내 투정을 유치원 졸업 때까진 들어주었고, 설령 내가 친구를 때린다고 하더라도 상대 부모에게 굽신거리기나 했지 나를 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하다고 느낀 것은 할아버지가 정해 놓은 기준에서 벗어나면 옆집에서 아동 학대로 신고하겠다며 찾아올 정도로 혼이 났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간식이나 무료 반찬을 나누어 준다고 하면 주말마다 예배를 드리러 갔고, 신년이 오면 가까운 절에 찾아가 봉양도 드렸다. 무당집에 가 점을 볼 정도로 미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손녀 기가 약하다고 장례식도 안 가시는 분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한푼 두푼 모은 집까지 팔아서 한 도인에게 팔찌를 사 온 것은 꽤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릴 때 완치가 어렵고 희귀해서 나라에 지원이 안 나오는 전염병에 걸려서 죽을 뻔하고, 그때 당시 병원비로 돈을 물 쓰듯 쓴 데다가 아빠의 경마장 도박까지 겹쳐 부모님 사이가 나빠졌다고 들었다. 기적처럼 깨끗이 나은 후로도 거의 달마다 교통사고에, 물놀이 사고에, 유치원에서 나들이만 갔다 온다고 하면 팔이든 다리든 어디 하나 부러지고 오는 게 예삿일이었다. 할아버지가 술에 취했을 때 하는 말론 고 조그마한 게 죽기로 작정한 애처럼 울지도 않았다고 했다. 생살에 바늘을 꿰매는데 울지도 않더라고. 하도 당해서, 익숙해져서, 곧 애가 할머니를 따라갈 것만 같더라고.
할아버지는 내 생에 최초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노른자 땅을 팔고 작은 아파트에 세를 얻어서 들어가게 됐더라도, 사람 살리는 팔찌가 그럼 저렴하겠냐던 도인에게 사기를 당한 거라고 하더라도, 사조의 말대로 명이 짧다는 팔자를 어떻게든 늘려 준 건 할아버지였다. 이 팔찌를 차고 다니는 걸 볼 때마다 할아버지는 보약이 따로 없다며 흐뭇해하곤 했었다.
할아버지가 효도 한 번 못 한 손녀에게 바라는 유일한 소원이 팔찌 차기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마침 잠금장치도 고장이 나서 내가 마음먹고 빼지 않으면 빠지지도 않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며칠 안 돼서 고장이 난 것도 손녀만 두고 떠나느라 발길이 늦어진 당신의 짓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약발도 떨어졌나 보다. 나는 섬에 갇혔다. 무인도가 아닌 게 어디냐고 그랬는데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남자랑 사니까 무인도가 맞는 거다. 그런데도 매일매일이 저주스럽기는커녕 웃음만 나고 그런다. 이게 할아버지가 걱정하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아이의 태도였을지 않을까.
나는 와 볼 테면 와 보라는 오기를 갖고서 일어났다. 좀이 쑤셔 아침을 먹고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오늘은 별난 이 섬을 안고 있는 바다 구경에 나섰다. 들어가 봤자 발목에서 파도가 알짱거릴 만큼 얕은 바다. 그러나 걸어 들어갈수록 나를 익사시킬 게 분명한 그 바다를 걷고 싶었다.
잘 만들어진 해안 길에 앉아서 바라만 보지 않았다. 까만 돌을 짚고, 또 짚고서 내려가 직접 물결이 철썩철썩 나를 때리는 곳까지 나와 봤다. 이쪽이 동쪽인지 남쪽인지 헷갈리지만 어디로든 헤엄치면 어디엔가 닿는 건 확실했다. 한 발, 한 발 내디뎌서 바닷속으로 걸어가면 언젠가 섬이 아닌 땅에 닿을 수 있을까. 발목까지 오던 바다가 종아리를 넘나들자 두려움에 가득 찬 숨이 배 아래서 터져 나왔다. 수영은 할 줄 모르지만, 설사 수영할 줄 알더라도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건 프로 선수가 아니고서야 어려웠다. 하얀 거품을 문 파도가 나를 봐주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고 가게.”
저 바다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돌아가지도 못하는 이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서 웃는 사람이 있었다. 바위 위에 앉아 협상하는 사람처럼 손깍지도 끼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정말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기저기서 홍길동처럼 나타났다. 내 정신 건강엔 벅찬 그를 바닷가에 두고서 나아가려고 하는데 저놈이 또 나를 동네 강아지 부르듯 불렀다.
“거긴 파도가 세서.”
“…….”
“얕은 데로 알려 줄까 말까.”
어차피 옷 버리기 싫어서 수영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사조가 저렇게 나와 앉아 너 저까지 들어가지도 못하잖아, 하면서 웃음거리로 만드는 게 약이 올랐다. 여기 섬에 갇힌 사람들은 다 잡아먹었나 보지. 배가 고픈데 내가 넘어오지 않아서 신경질이 나나 보지. 그러니 저렇게 자꾸 나와서 나를 긁고 놀리고 그러는 데에 재미 붙이는 거지.
“나 수영하는 거 아니야.”
“그래 보인다.”
“네가 사람 아니라고 그랬지.”
짠 냄새 물씬 풍기는 작은 섬. 공 굴리듯 돌을 차고 있는 사조에게선 이 섬에 대한 자부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첫 만남부터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쪽으로 정상이 아닐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바닷바람에 떠밀려와 뺨에 붙는 머리칼을 쳐내며 그를 바라봤다.
사조의 눈동자는 햇볕에 탄 색깔 같았다. 모르고 보면 나를 쳐다보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그의 시선이 어디쯤 있는지 모호했다.
“그럼 귀신이야?”
나를 보고 있는 게 정답인가 보다.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사조가 제 입술을 혀로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안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것일 테지만 들썩거리는 어깨로 인해 나한테 다 들켰다. 저렇게 대놓고 비웃는 것을 보니 귀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대낮에 귀신이 돌아다닐 리 없지.”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얼굴에는 웃음이 널려져 있었다. 내가 자기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도 사조는 묵묵부답이었다. 그게 더 나를 무섭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럴 리…… 없지? 그지?”
대답을 듣기 위해, 그의 표정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눈을 찡그렸으나 보이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장난을 치고 싶은 그의 표정이었다. 쟤가 강심장인지 성격이 특이한 건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나 외계인이 친근한 존재로 묘사되는 거고, 현실의 일반 사람은 미지의 존재를 만나게 되면 까무러치거나 신고를 했다. 그런데 저렇게 빙구 같은 웃음을 하고 앉아 있으니까 죽고 사는 문제를 걱정한 내가 시시해졌다.
“됐어. 말하지 마.”
낮에 귀신들이 뭐 하고 다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었다. 귀신이 될 바엔 깔끔히 소멸할 테니 그네들의 사정을 알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그냥 그런 존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내 마음이 편했다. 요즘 몸이 허약해지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이상한 것을 봤던 거라고 술자리용 안주로나 쓰고 싶었다.
“발목 시원해?”
더 갈 거 아니면 해가 지기 전에 나오라는 뜻이었다. 배가 당길 정도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돌멩이로 저글링 하며 노는 사조의 뺨이 우물거리는 게 껌을 씹고 있나 보다. 무표정한 얼굴로 돌멩이를 못살게 굴다가 내가 저를 쳐다보면 빠릿빠릿 알아차리고 나와 눈을 마주쳐 왔다. 마치 우연인 것처럼,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햇볕을 피하는 것처럼 눈이 휘어지게 웃는 그가 나는 진심으로 미웠다.
“정말 사람 아니면, 할 수 있는 거라도 있어?”
머리가 나쁘거나 농담하는 것이 아닐지, 하는 희망도 놓지 않은 채였다. 저게 섬에 어벙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해서 사기라도 치려는 건 아니겠지. 정신도 깰 겸 바다에서 물을 첨벙첨벙 튀기며 돌아다녔다. 말없이 수제비 뜨기를 하던 사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했음 싶은데.”
“미안해. 못 들었어.”
바닷물 철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묻혔다. 그 와중에 사과가 입에 붙어서 미안하다고 말한 자신이 한심했다. 돌돌 말아 걷은 바지를 내리며 그에게로 걸어갔다. 이 거리면 목소리가 들리겠다고 확신할 즈음 멈추어 섰다. 돌멩이 하나를 높이 던졌다가 받으며 노는 사조가 재촉하듯 말했다.
“무얼 했음 싶으냐고.”
“내가 말 하면 다 해 볼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그래.”
거짓말일 가능성에 믿음을 건 나는 사조의 당당함이 불안했다. 기대감이 차오른 그의 눈에는 거짓말하는 사람 특유의 과장이 없었다.
“그럼 나 날려 봐.”
“날려? 어디로.”
“여기 말고 큰 섬으로.”
사조에게 그 정도 능력이 있다면 순간 이동도 무리는 아닐 터다. 그의 힘이 실현된다면 나는 이 섬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거고, 그가 그럴 능력이 없다면 깔깔 비웃고 문제 해결이었다. 내 의도를 읽은 것처럼 피식 웃은 사조가 쥐고 있던 까만 돌멩이를 바다에 던졌다. 계주 달리기에서 심판이 공포탄을 쓰는 자세처럼 그가 손 하나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까딱까딱 흔들었다. 비장하게 손가락을 흔들기에 나를 저 섬 저편으로 보내 버릴 줄 알았다. 그런데 바람만 좀 강하게 불 뿐 달리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어렸을 때 계주 달리기를 하다가 내 속도에 내가 못 이겨서 앞으로 고꾸라지는 경우가 있었다. 긴장하고 달리느라 다리가 오징어처럼 꼬이는지도 모르는 그런 때 말이다. N극과 S극의 만남도 이렇게 극적이진 않을 것이다. 계주 선수도 아닌데 혼자 자빠지기 직전이라 눈을 질끈 감았다. 단단한 바위의 질감이 허벅지를 눌렀다. 유원지에서 바이킹을 타고 난 후처럼 빙빙 도는 시선이 차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분명 사조하고 나와의 거리는 꽤 됐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몇 번 까딱거리며 부른다고 내가 달려갔을 리도 없었다. 그러니 사조의 허벅지 위에 내가 앉아 있는 건 정신 착란의 한 종류가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된다. 그는 꿈이 아니라는 듯이 손수 내 뺨을 손가락으로 잡아서 약간 흔들었다.
“낮부터 남사스럽긴 하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허리를 안은 손은 지근거리고 있었다. 내 배를 아닌 척하면서 쓸어 만지는 손바닥을 어제 같이 때려줄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사람의 몸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줬으니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종지부 찍고 만 것이었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애정을 주고 나를 잡아먹고 싶어 한다는 게. 팔자타령을 하는 게 아니라 하다 하다 이런 일까지 있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토끼처럼 빨개진 눈가에 입만 웃는 것인데 사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 게 밥에 고추장 비벼 먹는 것처럼 대수로운 일로 보였다. 삶에 우환이 낀 것은 나뿐인 거겠지. 그는 눈물 한 방울 없는 눈가를 제 손등으로 꾹 눌러 닦았다.
“음, 바다 맛.”
쥐어 짜내듯 눈물을 묻힌 그가 제 손등에 묻은 걸 혀로 맛봤다.
“맛있어?”
“입맛에 맞어.”
무슨 정신으로 그를 밀치고 바닷게처럼 왔다리 갔다리 하며 그 큰 바위들을 기어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바다에서 벗어나 해안 길에 들어섰을 때에도 나는 그가 쫓아오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연신 뒤돌아보았다. 그는 도망갈 테면 가라는 듯이 바위에 앉아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다리를 펴고 앉아 내가 가는 길을 눈으로만 보고 있었다. 사조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아 쟤도 쫓아오지 못하겠다 싶을 즈음에 앞을 봤다. 이 섬은 작기도 작아서 도망갈 데라곤 없었다. 급한 대로 눈에서라도 멀어지고 싶었으나 길이 꺾이는 구간에 들어서자마자 말짱 도루묵이 됐다.
“늦다, 늦어.”
초코아이스크림을 든 사조가 내가 가야 할 길에 앉아 있었다. 뛰어야 벼룩인데 고생 많았다는 듯이 아이스크림 봉지를 뜯었다. 사조가 막대기 두 개를 손에 잡고 일어섰다. 그를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손부채질하며 열을 식혔다. 이 날씨에 용케 녹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온 사조가 내게 수작을 걸었다.
“잘라 봐.”
뻔히 두 손이 있으면서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게 순수한 의도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 같은 바보는 유혹에 빠져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잡고 반으로 갈랐다. 그날이 그날이듯 불공평하게 나뉜 아이스크림의 작은 부분을 그가 가져갔다.
“달아서 싫다며.”
“멋대로 말에 살을 붙이는 건 어디서 배운 것일까. 나는 달다고 했을 뿐인데.”
그는 녹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잡아서 내 입 쪽으로 가져다 댔다.
“안 먹고 싶은데.”
그러나 사조가 손을 떼자마자 내 손이 의지를 벗어나 입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투명한 실을 묶어 내 손을 조종하는 느낌이었다. 범인일 게 분명한 사조를 바라보자 시치미를 뚝 뗐다. 아이스크림을 한 입 깨물고 나서야 내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졌다. 사조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산책하듯 나를 끌고 갔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에 집중하는 사람들처럼 말없이 걸어갔다. 여름을 맞아 제 푸르름을 뽐내는 섬의 풀들이 부러웠다. 나는 빈 나무 막대기만 입에 물고 있는 사조를 흘긋 바라봤다.
“나도 배울 수 있어?”
“응?”
얼씨구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사조가 사레들린 소리를 냈다.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다 가리고 끅끅거리며 웃었다. 그래, 너는 웃어라, 하며 나는 아이스크림을 또 한 입 깨물어 먹었다.
“너는 항상 그렇게 웃어.”
웃음을 다시 입가에 담아 둔 사조가 물고 있던 나무 막대기를 빼면서 눈을 찡긋거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얼굴에 말이 술술 나왔다.
“고개 숙이고, 손으로 가리고, 딴 데 보고. 내가 너 웃는 얼굴 보는 게 싫은 것처럼.”
사조는 혹시라도 웃는 얼굴을 보일까 봐 아주 작정하고 가렸다. 나와 눈을 마주칠 때에는 정 없게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소리까지 낼 정도의 큰 웃음을 정면으로 본 적은 없었다. 내 말에 생각이 깊어진 사조는 나무 막대기를 연필 돌리듯이 돌리다가 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건 생각지도…….”
갑자기 끊긴 말의 뒷부분이 궁금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앞서서 걸어가는 사조가 본인도 이해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지적이네. 그러게, 이상한 새끼다. 그치?”
사이 좋게 걸을 수 있음에도 나는 따라잡지 않고 그의 뒤에 있기를 고집했다. 나무 막대기를 입에 넣고 여름 풍경에 녹아든 뒷모습은 너무하게 예뻤다. 사진을 찍는 게 아니고서야 사람은 자신의 뒷모습이 어떤지 거의 모르고 산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걸음 습관이나 태를 내가 향유하는 것이었다. 순전히 내 음흉한 욕심이다.
사조 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어떨까. 다정한 친구이자 연인일 테고 노인네 같은 말투도 어느새 같이 쓰고 있을지 모른다. 이별하게 되더라도 잊지 못할 남자일 터였다. 특별하고 즐거운 사람은 연애할 때나 좋지, 이별할 때는 그만큼 슬픔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정인아.”
사조가 걸음이 늦는 나를 냉큼 오라며 불렀다. 그의 발꿈치에 맺혀 있던 시선이 위로 떴다. 제 앞에 오기까지 기다리는 사조가 나무 막대기를 한 손으로 구겼다.
“언제 오나 하였더니 또 머리 굴리고 있구나.”
“무슨 머리를 굴려, 내가…….”
“한눈팔면 엉뚱한 데로 가는 게 네 매력이긴 하지.”
그의 말에는 깃털이 달려 있었다. 혀로 간질간질 내 몸을 쓰레질하며 간지럽혔다. 낳아 준 아버지도 아니면서 나를 그렇게 보는 건 반칙이었다. 간지러워서 웃다가 죽는 사람도 있었다.
“이리 와. 옆구리 시려.”
“네 옆구리가 시려운 게 나랑 뭔 상관이라구…….”
“멀찍이 서서 중얼중얼.”
또 사조의 손가락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으나 이 얌체 같은 것은 동의 없이 나를 제 옆자리로 끌었다. 바람에 멱살이 잡혀 끌려간 것도 모자라 어깨에 팔을 두르려고 하기에 배 째라며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팔이 푹 꺼져 버린 나의 몸을 따라오지 못할 때 앞으로 돌진했다. 내 어깨를 팔걸이로 쓰려던 사조의 손이 바람만 쥐었다.
“어디 갔나, 이 사람.”
“팔 무거워.”
“그럼 손만 하면.”
사조가 말로 할 때 오라며 손가락으로 내 쪽을 가리켰다. 웃으면서 도망가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는 손을 내렸다.
“안 할 테니 바람 쐬며 걷자.”
“왜 대답 안 해?”
“무엇을.”
“나도 배울 수 있냐고 물었잖아.”
흣, 사조가 콧바람으로 대답했다. 사람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들으면 저런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나는 진지했다. 배워서 서커스에서 날려보자는 것도 아니고, 위기에 처한 시민을 돕는 히어로가 되고픈 것도 아니었다. 저걸 배우면 송정인이라는 사람이 가진 특별함이 생길 것 같았다.
“배우고 싶다는 허당은 네가 처음이어서. 나도 배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는걸.”
“내가 할 줄 알면 남도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거지. 모르는 것보단 마음이 없는 거야.”
“그러해? 내 마음이 어떤데.”
“좋아해.”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는 말이 있듯이 더 이어질 말이 있었다. 그런데 뱉고 나니 다시 무르기 싫은 그 영악한 마음은 말을 수거하지 않고 일이 일어나는 양상을 지켜보았다. 사조의 얼굴에 당황한 빛 한 점이 스며든 게 그리 보기에 좋았다. 바다가 이 섬을 덮어도 담백하게 짐을 챙겨 떠날 것 같은 애가 내 고백에 동요했다. 말실수에서 태어난 고백이라는 것을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할 정도로 그의 목덜미가 붉어져 있었다. 보는 내 마음이 다 무력해졌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좋아한다고……. 내 얼굴 보면서.”
정작 이 이야기를 해 주었어야 할 예전 남자 친구한테는 찍소리도 못하고 사조에게 따지는 것을 보니 사람은 본능적으로 만만한 사람을 알아보나 보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하는 이유도 사조라면 나보다 더하니까 말이다. 더 이상 옆으로 오라고 안 하는 사조를 해안 길에 버렸다.
몸에 열이 많아 더위 타는 애가 바다를 보는 데에 시간을 썼다. 생각할 거리가 한둘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사조를 만나기 전까지 사유하는 것은 사람의 전유물인 줄 알았다.
사조의 옆모습은 아름다웠다. 머리를 짧게 깎으니 남자다운 얼굴선이 드러나 후회막심이었다. 특유의 무심한 눈매, 고집 있어 보이는 입매. 머리칼이 커튼처럼 가려 두게 두지 무슨 부귀영화를 얻겠다고 짧게 치라는 말을 했단 말인가. 사조는 당돌한 고백에 얻어맞은 양 붉어진 목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한테 그런 말을 들은 게 참 당황스러웠겠지. 사람이 아니라고도 말했는데, 저 생각 없는 것, 하면서.
사조의 생각은 보이지 않는 소금으로 변해 바다에 내려앉을 터다. 그걸 건져서 쪽지 열어 보듯이 하나씩 열어 보고 싶었다. 그 안에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 적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죽었다 깨나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더 깊은 생각에, 더 깊은 마음에 빠지기 전에 황급히 등을 돌려 해안 길을 걸었다. 헤엄이라도 쳐서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갈수록 병의 증세가 다양했다.
༺♥༻
집에 오면 청소기로 먼지랑 생각을 빨아들이고 속옷 빨래까지 할 계획이었다. 씻고 나와서 부엌에서 좋은 냄새가 나길래 가 보았더니 문제의 그것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끓인 김치찌개 냄새를 똑같이 재현해 낸 그것. 파란 대문집 귀신이 끓인 그 김치찌개가 사조의 집 부엌에 있었다.
잘하면 할아버지의 주특기인 곰탕까지 나오겠다. 냄새는 끝내줬지만 그 여자 때문에 생고생을 했는데 굶고 말지, 그걸 순순히 떠다 먹을 일은 없었다.
사조는 내가 손발을 씻고 나온 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모양이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기 직전 내 방에 잘 자라는 의미로 노크를 하고 간 것까지 알고 있었다. 자는 사람 심란하게 해서 좋을 게 뭐냐고 구시렁거린 걸 사조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그 김치찌개를 사조가 어떻게 구해 온 것일까. 그 여자네 집에서 끓이고 있던 것을 가지고 왔나. 그럼 그 사람도 사조처럼 사람이 아니되 귀신은 아닌 그런 것인가.
사조가 마루와 부엌 불을 다 끄고 올라간 모양이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김치찌개를 보자마자 무서워 불이란 불은 다 켜 두고 들어왔는데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끄고 들어가 버린 게 야속했다. 사조 걔도 이 섬의 실체를 알면서 눈 하나 꿈쩍 않는 걸 보니 마음이 단단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이었다. 무당을 불러 굿이라도 해야 할까 싶은 현상을 헛것이라고 표현하지를 않나. 강도가 들어오든 말든 현관문에 아무 장치도 안 달아 두지를 않나. 대담한 사조, 어여쁜 사조,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사조 생각만 하고 있는 내가 싫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입으로만 욀 뿐, 결국 나는 온 마음과 머리를 다해 사조의 흔적을 줍고 있었다.
눈물 적신 베개를 베고 선잠에 들었다. 세 시간을 뒤척거리다가 얻은 귀한 잠을 방해하는 소음이 있었다. 라라라라, 여자애 콧노래 소리가 신경질이 나서 이불을 발로 깠다. 잠결에 저지른 짓인데 콧노래가 멈추니까 이거 효과 있구나 싶어 꿈에서 우쭐거렸다.
그러나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콧노래는 잠이 없었다. 노래방에 간 음치가 마이크를 들고 100점이 나올 때까지 안 내려놓겠다며 황소고집으로 밀고 나가는 느낌이었다. 회사 회식 자리에 참석했냐며, 그만하고 잠 좀 자자며 칭얼거렸다.
콧노래가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이 됐을 정도에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 방에서 콧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사조가 복도에서 흥얼거린다’뿐인데 여자에다가 어린애 목소리니까 사조일 리는 없고, 딱 들어맞는 건 귀신밖에 없었다. 귀신의 귀에 들어갈까 봐 조심스레 돌아누워 가슴께를 눌렀다. 이 방은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한다. 사조의 이름과 얼굴이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하지만 울면서 사조를 찾기엔 내 담이 약했다. 저 어린 분이 볼일을 끝내고 방에서 조용히 나가 주었으면 싶었다.
스윽, 스윽, 머리를 빗는 소리가 났다. 가끔 키득거리며 중얼거리는 언어는 외국어같이 들렸다. 씨름 선수 같은 여자에, 외국말 하는 어린애까지 국제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찔끔 흐르는 눈물을 베개로 훔치고 있을 때 머리 빗는 소리가 끝이 났다. 쳐다보는 것이 실례가 될까 싶어서 십 분간 시체 흉내를 냈다.
발목이 간질거렸다. 단순히 벌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내 발목을 조몰락대는 것은 나뭇잎처럼 자그마한 손가락 다섯 개였다. 발목이 위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조금만 버티면 간다는 생각에 존댓말까지 썼는데 연놈들이 기어코 매를 벌었다. 윗몸 일으키기 하듯 배에 힘을 주고 일어나 베개를 높이 들었다. 가려운 발목에 내려치고, 내려치고, 미친 사람처럼 악을 질렀다.
“가! 저리 가!”
맷집 약한 귀신이 기어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자마자 벽에 등을 붙였다. 전등이 고장 난 것처럼 와들거릴 때 감이 왔다. 약이 다 된 게 아니라 귀신이 스위치에 붙어서 손으로 켰다 껐다 하는 것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스위치가 있는 쪽을 노려봤다. 다행히 그때의 그 험상궂은 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위치는 처참한 몰골로 고장이 나 있었다. 전깃불이 튀는 걸 보고 귀신 손에 죽기 전에 감전돼 죽을까 겁이 났다.
예방책으로 귀신의 잔영을 지우고자 베개를 스위치에 내리쳐 대니 불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죽은 자는 산 자를 해치지 못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버튼 떨어진 스위치를 베개로 패다시피 했다. 잠에서 덜 깬 탓에 용감했던 것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케첩 같은 피를 입가에 묻히고 나타나는 귀신이 덜 무섭겠다. 이렇게 나는 몰라요, 하면서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게 훨씬 끔찍했다. 스위치를 때리는 베개가 헐렁헐렁했다. 전등은 불이 들어왔지만 전보다 약해졌고, 스위치는 수명이 다해서 보내줘야 할 듯싶었다. 하얀 베개 솜이 나풀나풀 날아다니고 있었다. 두 번만 무력으로 퇴마했다간 스트레스받아 머리털 뽑히겠다. 나는 장렬히 전사한 베개를 안고 벽에 기대 누웠다.
“사조, 사조야.”
시간은 새벽 세 시. 이 층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 그 남자의 이름을 부르니 부적 같아서 든든했다. 알고 지내는 귀신 같은 남자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왜 불러.”
“아악!”
벼락처럼 번쩍 나타나 창문에 앉아 있는 그에게 터진 베개를 던졌다. 솜이 빠져 맥아리 없는 베개가 사조의 발밑으로 고꾸라졌다. 사조는 방안을 휩쓸고 다니는 하얀 솜을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며 놀라고 있었다. 실컷 구경을 마친 그의 눈이 진이 빠질 대로 빠진 나에게 닿았다.
“하여간 마음에 들어, 정인이. 싸워 이겨 볼 요량이었어?”
“알아? 무슨 일, 있었는지.”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울컥 억울함이 올라왔다. 빨리 가 버리라며 싹싹 빌던 치욕스러운 시간에, 해코지를 당할까 봐 얌전히 노시다 가라고 방까지 빌려주었다. 할아버지 귀신이 나와서 정인이 잘 지내냐고 물으면 좀 좋냔 말이다. 그러니 그에게 달려간 것은 아마 나의 투정일 터다. 사람 냄새가 나는 그의 품이 말도 못 하게 그리웠다. 창틀에 앉아 다리를 흔들던 사조는 내가 달려오는 걸 보자마자 눈빛을 바꾸었다. 창틀에서 툭 내려와 팔을 벌리고 기다렸다. 폭 들어가 안겨 그의 허리를 팔로 묶었다. 하지만 포옹으로는 안심이 되지를 않아 그의 가슴팍을 손수건으로 썼다.
“들었으면 바로 내려와야지!”
왜 혼자 싸우게 두었냐고 그의 품에서 항의했다. 이름 불렀다고 내려와 준 것만 해도 고맙긴 한데, 이왕이면 스위치로 장난칠 때 내려와 주지 무얼 했냐고 닦달했다.
“그러려고 했지. 한데 하도 용맹해 보여 무섭더라고.”
“용맹?”
“베개로 막 이렇게, 이렇게.”
스위치는 갔지, 베개는 새로 구해야 할 판이지, 그런데 손을 야구공 잡듯이 잡고 휘두르는 사조한텐 점잖고 말쑥한 면이라곤 없었다. 살고자 용을 쓰는 내 몸짓을 그렇게밖에 보지 못한 사조의 눈을 찌르고 싶었으나, 사람의 품이 필요한 단계라서 조숙한 척했다. 사조를 보니 걱정이 휘발돼서 울음도 나오다가 말았다. 그는 내 반응이 떨떠름 하자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넣었다.
“응…….”
불편하다는 뜻으로 그의 팔목 위에 손을 얹었다. 사조는 내 뒤통수에 코를 박고 거친 숨을 쉬었다. 밤에 머리를 감아서 큰 상관은 없었지만, 잇달아 부풀고 사그라드는 그의 가슴 때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자세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머리칼에 붙어 있던 그의 숨이 아래로 내려가 나의 뒷목으로 넘어갔다. 숨이 목에 붙어 내 살을 베어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봐도 접착제 붙인 양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씻었다지만 이 정도 킁킁대면 불쾌한 냄새라도 맡지 않을까 싶어 걱정일 때 그가 속삭였다.
“왜 이리 냄새가 좋지.”
터져 나온 솜이 구름처럼 드리운 방안. 의욕 없이 뻗은 나와 그런 나를 받치고 앉아서 뺨과 목덜미를 수시로 오가며 냄새를 맡는 사조. 그는 왜 좋은 냄새가 나냐며 유난 떨지만 그건 순 그의 식욕 때문이었다.
“왜 그런 줄 알아?”
사람이 변고를 겪고 난 다음에는 깡 같은 것이 생기나 보다. 귀신과 대거리하기는커녕 오줌 싸지 않으면 용하다고 했던 내가 베개로 육탄전까지 벌였으니 말이다. 네 말은 어쩔 땐 영문 모르겠다는 사조의 손등을 도닥였다.
“넌 날 잡아먹고 싶어 하잖아. 그러니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 하하!”
나름 잔머리를 굴려 한 말을 듣자마자 사조의 허리가 무너졌다. 내 등에 얼굴을 파묻고 웃고 또 웃었다. 들어 본 사조의 웃음소리 중에 가장 크고 쾌활한 웃음소리였다. 사조의 웃음 포인트는 독특했다. 그 웃음소리를 내 귀에 딱지 앉도록 흘리던 사조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웃음을 빠짐없이 받아 낸 내 등은 뜨끈뜨끈했다. 숨어 사는 심장은 그의 웃음을 직격타로 맞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보면 웃음은 적고 생각이 많은 남자였다. 하지만 기분을 맞추어 주는 것처럼 장난을 걸 때도 있고, 일부러 웃음을 띤 얼굴일 때도 있었다. 설령 그게 어떤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사조의 무심한 배려가 좋았다. 그에 대해 저장할 거리가 어느새 이만큼 늘었다는 게 설명할 수 없는 벅참과 두려움을 불렀다. 이미 이만큼으로도 그는 내 인생에 또 다른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다. 과연 그와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끝내게 될까. 그를 위해 마련해 둔 공간은 내 손으로 싸잡아 폐기하고 싶을 만큼 두려운 공간이 될까.
“사조야.”
기분 좋아서 가르릉 우는 고양이처럼 등에 입술을 대고 웃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솔직해도 되는 시간이었다. 내 마음을 보여도 아침이면 모른 척, 그런 일이 있었냐고 기억 안 나는 척할 수가 있었다.
“이 섬에서 내가 나가든, 같이 나가서 헤어지게 되든. 하나만……. 부탁하고 싶은 거 있어.”
머리카락을 빗겨 주기 시작하는 그의 손가락을 느끼면서 하지 않아도 될 상상의 나래를 폈다. 사조의 정체가 정확히 무언지 몰라서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딸을 낳아도 머리를 예쁘게 묶어 줄 수 있는 아빠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너무 나쁘게만 헤어지지 말자. 그리고 나한테 너무 나쁜 사람만 되지 마. 정말 상처 주고 싶은 말이 생각나도 한 번은 삼켜 주고, 정말 같이 있고 싶지 않아도 딴 곳만 보지 말고, 내가 이상하거나 싫은 모습 보여도 너무 면박 주지 말고. 나는 집에 가서 혼자 자책하고 후회 많이 해. 네가 말 안 해도 알거든.”
“음…….”
사조가 듣기 싫은 양 안는 바람에 입안으로 말이 들어갔다. 머리 위에 턱을 댄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새벽 공기를 갈랐다.
“용기 낸 것치고 양이 적다.”
“내용이?”
“더 말해 보아. 잠도 다 깬 마당에.”
사조가 판을 깔아 줘도 발가락만 옴지락거렸다. 나는 흔히 연애의 수명을 좌지우지한다고 말하는 밀고 당기기를 못 하는 사람이었다. 미는 것은 어떻게 하고, 당기는 것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서로가 없으면 죽고 못 사는 로맨틱한 사랑을 하고 싶은 철부지일 뿐이었다. 다만 그런 쪽으로 사랑에 길을 들여 유통기한을 늘린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사랑, 우정, 신의, 어느 것으로 시작하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끝이 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그 끝이 다가오면 정중히 지금 헤어져 달라고 말해 주면 좋겠다. 그럼 나도 지레짐작으로 사랑의 끝을 생각하며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되니까. 내가 알기에 사람은 언제나 그 시점에서 망가졌다. 한때 사랑했던 내가 덜 망가지게, 그렇게 약속해 주면 좋겠는데. 사조가 나를 여자로 사랑할 거란 생각은 안 한다. 얘도 외로웠겠지. 먼 훗날 외로움을 졸업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런 것은 내게 알리지 말고 관계의 끝이 왔음을 조용히 전달하길 바랄 뿐이었다.
“정인이, 너는.”
“응…….”
“머리통은 작은데 생각이 많구나.”
“그런 말 많이 들어.”
“그런 사람이 대개 불행하던데.”
말에 틀림이 없어 그의 수에 말려들고 만다. 그는 숨통을 터 주는 것처럼 안은 손을 풀었다. 큰일 났다. 저 빨간 입술을 갖지 않으면 심보가 고약해질 것 같았다. 가까스로 눈을 돌려 그의 턱 부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불쌍하고, 그래서 잘해 주는 거야? 이상한 섬에 갇히고 그 전엔 외롭게 산 것처럼 보이니까?”
“정인이. 동정은 싫은가 보네.”
“응. 창피해.”
“무엇이 창피해.”
“몰라……. 그냥. 저 사람이 날 불쌍해한다는 게 창피해.”
동정이 싫은 이유는 명확하고 단순했다. 내가 사람에게 갖고 싶은 것은 나를 불쌍해하는 게 아니라 사랑, 부러움, 감사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남에게 못나 보이고 불쌍해 보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빌빌대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거다.
“정인아.”
“응.”
“너를 우습고 하찮게 보는 것이 아니야.”
“그래? 그런데 거짓말 같애.”
“나의 동정은, 그저 너의 일에 내 가슴도 아프다는 거거든.”
땅굴 파기 단골인 나는 그가 해석한 동정의 다른 의미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시선을 받기 위해 눈을 들었을 때 직감했다. 어쩌지.
“사조야. 내가 이것보다 예쁜 걸 발견할 수 있을까.”
그 말에 웃은 사조가 내 손을 제 뺨에 가져갔다. 보드라운 뺨을 내 손으로 스윽스윽 쓸어내리게 한다. 내가 무얼 보고 예쁘다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사조는 자신만만했다.
“너도 지금에서야 찾아 놓고. 이보다 더 예쁜 걸 찾으려는 건 욕심이 지나치지.”
“너…… 여자 많이 만나 봤지.”
사조는 하늘에 맹세코 결백하다며 순진한 표정으로 무장했다.
“증거 없이 자백부터 하라 그러다니. 머리통만 작은 게 아니라 배포도 작구나.”
“맞으면서.”
“아니거든요.”
“맞잖아. 나는 딱 보면 알아.”
“하면 너는?”
사조는 웃을 때 이와 볼 사이에 예쁜 동굴이 생겼다. 그의 허벅지를 의자 삼아 앉아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떡 하나 줄 것을 열 개, 스무 개도 더 주고 싶었다. 여기서 더 나아갔다간 그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지도 몰랐다. 그의 얼굴에 예쁜 부위란 부위는 인감도장이라도 찍어서 내 거라고 표시하고팠다. 이 고운 남자를 아무도 못 보게, 나만 보게. 그의 귓불을 손가락으로 집게처럼 집고 문질렀다. 사조는 눈을 가느스름히 떴다.
“아, 비겁한 여인이구나. 나만 추궁하고선 자기는 대답 없이.”
내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는 게 문제였다. 그의 숨에서 좋은 냄새가 풍기지 않았더라면, 새벽을 핑계로 그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더 인내할 수 있었을 텐데. 야비하고 이기적인 여자가 되려던 술수는 내팽개치고 그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방학 내내 벼르던 일기 숙제를 끝낸 것처럼 무기력의 강점기에서 독립했다. 마음이 사랑을 원하시는 만큼 퍼 가라고 헤프게 굴었다. 왜일까. 왜 너였을까. 회피하지 못하게 그의 뺨을 잡았다. 자기가 자신하던 대로 그의 뺨은 말랑하고 보드라웠다. 그의 뺨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으니 다음 일은 쉬웠다. 눈두덩이, 눈썹, 코끝, 어디 하나 섭섭하지 않게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규칙 따윈 없었다. 순서 없이 입에 닿는 대로 가져다 대고 눌렀다. 모처럼 사조는 요조한 숙녀 같이 얌전했다. 내가 뒤로 넘어지지 않게 허리를 잡아 주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해.”
숨을 정리하는 잠깐을 못 참고 나에게 느긋이 명했다. 당연히 자기가 맡아 둔 것을 받는 듯한 그의 태도가 재밌었지만, 허리를 받친 그의 손이 전율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목이 익은 것처럼 붉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 입맞춤을 후회하지 않았다. 알았다. 사조가 왜 좋은지. 그는 허투루 행동하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퍼부어 준 것을 모른 척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아끼는 건 마지막에 먹듯이 비로소 그의 입술로 눈이 갔다. 그러나 입술에 붙자마자 사조의 손이 내 머리를 잡았다. 눈을 내리깔고 어수룩한 척하던 그가 돌변했다. 뒤통수를 잡고 압박하듯 눌렀다. 나는 얼을 타지 않고 입맞춤하기 편하도록 그의 목을 안았다.
첫 키스를 할 때 종소리가 들리고 사탕 맛이 난다는 말은 들어보긴 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첫 키스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꾸며 낸 것에 불과했다. 이건 그저 남녀가 잠자리 단계로 진입하기 직전의 행위일 뿐이며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와의 입맞춤에서는 어떠한 맛이 났다. 담백하게 나의 혀를 얽는 그의 배려와 머리를 누르는 손에서 느껴지는 집요함, 입술이 떨어질 때 그의 숨에서 맡아지는 청량함까지.
미각, 후각, 청각, 옷 아래 감추어진 몸을 만지며 느끼는 촉각. 입맞춤이 감각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맛을 깨웠다.
그만큼 좋았다. 입맞춤의 끝을 예감했을 땐 안타까워 주먹을 쥐었다. 끝나고 나서도 여운을 간직하기 위해서 그의 가슴에 안겼다. 산소가 부족했는지 머릿골이 당겼다.
“우리 잘래.”
자기는 자자고 서너 번이나 했으면서 움찔 놀라는 게 고단수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 당장 그를 가져도 좋지만 시기가 일렀다. 입맞춤만으로 충만한 시기를 오래도록 누리고 싶은 건 남자에겐 비극이지만 여자에겐 로망이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발인 날부터 나를 괴롭힌 악몽을 이겨 보고 싶었다.
일어나 침대 위에 있는 이불을 포대 자루처럼 끌어 내렸다. 창틀에 젖힌 머리를 기대고 앉아 멍한 그에게 손을 뻗었다. 머뭇머뭇 손을 잡은 사조를 데리고 솜이 어지러이 깔린 방바닥에 누웠다.
따라 누워 준 사조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사조는 제 팔을 희생해서 땅에 누우려는 내 머리를 베도록 해 주었다. 단단히 경직된 그의 팔은 훌륭한 베개였다. 나는 어딘지 얼이 빠져 보이는 사조의 눈두덩이 위에 손을 올렸다.
“잘 자, 사조야.”
두 번 두드리는 노크로 나의 밤을 열원하는 남자. 그의 매끄러운 뺨에 입술을 비볐다. 쪽쪽, 두 번을 입 맞추고 그의 팔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원래 이토록 따듯하고 좋은 게 사랑이었나. 울면서 아프고, 안달 나고, 그런 게 사랑인 줄 알았는데. 좋다. 정말로.
정자세로 누워 있던 사조는 삼십 분이 지나고서는 내 쪽으로 돌아눕고, 또 삼십 분이 지나서는 나를 안고서 꿈틀댔다. 나는 벌어진 그의 입술을 엄지로 닫아 준 후에 본 뒤 잠들 수 있었다. 사조도 나도 남하고 같이 자는 게 어색한 사람처럼 몸을 옆으로 앞으로 뒤집었다. 나는 사조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났지만 다시 수마에 빠지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잠으로 도망쳐서라도 영원히 멈추고 싶은 순간이었다. 삶이 눈감아 준, 달콤한 낮잠이었다.
༺♥༻
이상한 만남이 잦았다. 아침에 일어나든,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든, 밤에 헛것을 보든, 잠을 잘 때든, 조그맣게 사조의 이름을 부르면 어디서든 그가 나타났다. 심지어 내가 부르지 않아도 삼분 대기조처럼 나타나는 그는 나와 하루를 함께 하려 했다. 저녁으로 죽을 끓여 보겠다는 사조를 두고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세수를 하기 위해 세면대에 물을 틀고 고개를 숙였다. 싸한 느낌이 엄습했다. 분명 나는 세면대 아래로 고개를 숙였는데 힐긋 눈을 들어 본 거울 속 나는 목을 뻣뻣이 들고 있었다. 똑바로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내리깔고 물을 틀어 놓았다. 뒷골이 싸했다. 거울에서 손이 뻗어 나와 머리를 물에 담글 것 같았다. 저것들이 해를 끼친 적은 없지만 대화가 안 통하기에 변수가 있을 수 있었다. 물을 끄고 조용히 생각에 잠긴 척하다가 침을 꿀떡 삼켰다.
“수건 좀 줘.”
사조는 애당초 내 뒤에 있던 것처럼 아주 빠른 답을 돌려줬다. 건네받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나는 주걱을 들고 대기하는 사조 때문에 웃음 마를 날이 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줄 경비원도 왔으니 용기를 갖고 거울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여자가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사조는 내 시선을 따라서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서 눈길이 합쳐지고 서로의 얼굴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뜯어 보기 시작했다. 나는 거울 속에 있는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나 미쳤나 봐. 아예 돌았는지 이제는 혼자 있으면 자꾸 헛것이 보여.”
“어쩌나.”
“왜? 큰일 난 거야.”
“죽이 다 탔다.”
거울 속에서 빠져나와 실제의 그를 바라봤다. 사조는 죽이 묻어 있는 주걱을 숙제 검사 맡기 싫은 아이처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주걱을 빼앗듯이 가져갔다. 사조는 음식 같은 것을 할 줄 모른다. 저번에 내게 끓여 준 보말죽은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요리 금지.”
나는 사조의 손을 잡고서 욕실을 빠져나갔다. 사조의 손을 잡고 있으면 그 어떤 괴상망측한 것이 다가와도 무섭지 않았다. 웃는 얼굴로 부엌에 도착한 뒤 냉장고를 열어 간단하게 저녁에 쓸 재료를 꺼냈다. 자취할 땐 불을 올리고 재료를 다듬는 일이 지겨웠는데 사조와 둘이서 차리는 밥상은 기대가 됐다. 사조는 내 옆에 서서 서툰 칼질을 하다가 혼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반복 노동인 양파를 까기나 마늘 다듬기를 주력으로 하고, 그동안 나는 간을 보고 재료를 볶고 물을 끓였다.
완성된 김치찌개를 가운데에 두고 밥을 푼 뒤 우리에게 빠져서는 안 되는 소주를 꺼냈다. 잔은 필요치 않았다. 필요한 것은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평상과 막 지은 밥이 올라간 밥상, 덥지 않은 여름밤의 바람뿐.
처음 내 방에서 함께 잔 날 이후로 우리는 하루도 빼지 않고 이 루트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조는 상을 가운데에 두고 앉으면 술을 주고받기 힘들다는 이유로 나란히 앉자고 했다. 밥상마다 술이 끼게 된 건 뭍에서 마시는 것보다 달아서였다. 식혜에 소주를 탄 것처럼 쭉쭉 들어가는 맛이 좋아서 한 병, 두 병 비우다 보니 술이 늘었다. 하지만 사조는 일정 이상 먹으면 그만두라며 옆에서 감시하듯 쳐다보곤 했다. 취하면 내가 일찍 잠든다는 이유였다.
“욕심을 부리면 쓰나.”
그를 놀리고픈 마음에 일부러 더 마시는 척 연기했다. 고만 놀리라고 성질 낼 줄 알았던 사조의 얼굴에 순박한 웃음꽃이 피었다. 귀에 속닥거릴 것처럼 고개를 꺾은 그의 목적지가 변경됐다. 뺨을 누르고 사라지는 입술이 술을 더 마시지 못하게 했다.
“자, 여기. 여기 있어, 가져가.”
그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하나도 부끄럽지 않지만 그가 나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부끄러웠다. 됐으니 가져가라고 술을 내밀자 그는 병째로 받아 가 제 입술에 댔다. 키스한 사이라고, 더러울 거 하나 없다며 내가 마신 술병을 당연한 듯이 마시는 건 심하게 설레는 일이었다. 나는 밥상, 바다, 섬의 주황빛 조명을 무시하고 그만을 바라봤다. 여기 있는 무엇도 사조보다 눈을 끄는 것은 없었다. 나보다 술을 두 배로 마신 사조는 엄지로 입술을 닦고 밥상에 빈 병을 올려 뒀다.
어느새 서로서로 네 손등을 덮겠다고 식탁 밑에서 싸우고 있었다. 나는 큼지막한 그의 손등이 내 손등을 덮는 게 치졸하다고 생각했다. 손을 빼서 그의 손등 위에 올리면 그의 장난기가 발동한다. 평소에는 허술하고 단순한 남자가 어떻게 알아차리고 손을 빼서 내 손등 위를 차지했다.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아래서는 열심히 싸웠다. 그 손놀음은 그가 손을 쥐며 힘을 쓸 때 끝이 났다. 아무리 요령 피워도 빠지지 않자 나는 그에게 손 하나를 맡긴 셈 치기로 했다.
“힘을 쓰고 그러는 건 치사해.”
“이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사조는 새 소주병을 까서 내게 건넸다. 나는 파도가 치는 까만 밤바다 속을 상상하며 술을 넘겼다. 송정인 팔자 폈다. 먹고 살 걱정, 사랑에 대한 걱정, 외로움에 대한 자질구레한 생각들을 뭍에 버려두고 섬에 들어와 니나노 하며 풍수를 읊고 산다. 과연 이대로 섬사람으로 살아도 되느냐는 질문은 식상했다. 섬과 뭍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삶에 익숙해져서 언젠가는 그 소중함을 까먹고 하찮게 여기면 어쩔지, 그게 걱정이었다.
“사조야.”
나 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던 그가 힘을 푼 눈으로 왜 부르냐고 물었다. 이미 섬의 자유에 익숙해져 있을 그는 이런 내 걱정 따윈 아마 사소한 것이겠지.
“너는 여기를 벗어나서 살아 보고픈 생각은 없었어?”
쓰라린 기억을 삼킨 것처럼 사조의 웃음도 쓰라려졌다. 사조는 술병을 흔들어 마지막 한 방울을 마신 뒤 오늘의 음주를 끝냈다. 쓸쓸한 삶에 순응하는 그의 마음이 궁금했다.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나간다고 하더라도. 나가서 무얼 해, 내가.”
“이 섬은 너무 작잖아. 지겹지 않아? 바깥서 보고 싶은 사람도 없는 거야?”
“저 바깥은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내가 보고 싶은 사람도 없는 산 자의 세상에 지나지 않아.”
“그럼 내가 나간다고 하면?”
이 섬은 사조를 가두어 두기에 너무 작았다. 나는 그를 데리고 섬 밖으로 나가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이 평온한 일상을 저 뭍에서도 누려 보고 싶었다. 그건 그가 없으면 불가능할 일처럼 느껴졌다.
“나가고 싶어?”
내 열에 뜬 표정을 본 사조가 조금은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
“나가 봤자 뭐 하나. 우리 정인이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나가면, 내가 너한테 그런 사람이 되는 거잖아. 이 섬을 나가서 보고 싶을 사람.”
문제투성이인 이 섬에 행복을 물어다 준 것은 사조였다. 오지랖이라고 불러도 할 말 없지만 나는 그 보답으로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을 사조에게 안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조는 삐뚜름한 미소로 나를 책망했다.
“나가지 마.”
“왜 그랬음 해?”
“인정해. 처음엔 네가 그리 썩 마음에 들진 않았어.”
그의 고백은 거짓과 경계 사이에 숨은 내 마음을 우려냈다. 그의 눈빛과 소주병을 쥐고 있는 손을 보며 그의 진심은 대략 이렇겠구나 하고 어림잡았다. 섣부른 의견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진실을 전하고 싶은 듯싶었다. 그가 담담한 만큼 나도 담담히 나의 의견을 내놓았다.
“조금 날카로워 보이긴 했어.”
“한데 이젠 네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그러려는데 열이 난다.”
“어떻게 열이 나?”
“이곳저곳, 열이 나.”
사조는 웃기만 하는 내 손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저 원하는 걸 내달라고 하는 느낌이라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정인이, 섬이 작아서 재미가 덜한가 보다.”
“그것도 그거지만 짜장면이 먹고 싶어.”
별안간 술병을 내려놓은 사조가 주머니를 뒤졌다. 뒤적거린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작은 메모지와 볼펜이었다. 어찌 보면 시시하다고 할 수 있는 메모지와 볼펜이 내 차지가 됐다. 술기운이 돌아서 글씨는 잘 못 쓰겠다고 사양하려 하는 순간 사조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달콤한 술과 사조의 향기가 모여서 내 코로 들어왔다.
“펼쳐 봐.”
메모지 한 장을 넘기자 백지가 나왔다. 사조가 볼펜을 쥔 내 손을 감쌌다. 함께 볼펜으로 백지 위에 선을 그어 채워 가기 시작했다. 맨 처음은 사각형을 그렸다. 그에 의해 그려진 네모난 박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기대며 물어왔다.
“바라는 대로 그려 봐.”
“그럼 이대로 지어 주려고?”
“밑져야 본전 아닌가.”
그의 말대로 밑져야 본전. 내가 먹고 싶은 짜장면 가게 하나를 그려 주는 게 무슨 손해일까. 이번에는 직접 볼펜을 고쳐 쥐고 내 기억을 토대로 그렸다. 할아버지와 장이 설 때 갈 때마다 갔었던 중화루를 짜장면 가게 간판으로 달았다. 그 앞에 웃기게 생긴 풍선 인형도 세워 두고, 짜장면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칸이 부족해 삐져나왔음에도 그려 넣었다. 섬에 없으니 이렇게라도 그려서 세워 주겠다는 그의 마음이 기특했다. 어느덧 나는 그리움에 사무쳐 그 짜장면 가게를 그리고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곱빼기 시켜서 나 많이 주고 당신은 요만큼 드시고 그랬다? 할아버지가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알고……. 나는 내가 크면 짜장면 가게 차리겠다고 할아버지한테 그랬는데. 알고 보니 우리 할아버지 위가 안 좋아서 밀가루를 소화 잘 못 시켰다고 그러더라고. 그런데도 내가 좋아하니까 항상 시장 보고서 여기서 짜장면 시켜 줬어.”
아이스크림 많은 쪽을 양보하는 건 할아버지를 보고 배운 것이었다. 언젠가 우리 할아버지처럼 나를 위해 많은 쪽을 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며 바랐지만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할아버지의 손녀여서 그런지 큰 걸 나누어 주는 쪽이 생리적으로 편했다.
짜장면집 말고도 단골인 시장 가게에 대한 설명을 묵묵히 듣던 사조가 그림 그린 메모지를 가져갔다. 꿀단지 모시듯 제 호주머니에 넣어 두고 사조는 정 피곤하면 어깨를 베라고 했다. 빈말이 아닌 양 내가 편히 벨 수 있도록 어깨를 뒤로 빼주었다. 사조보다 술에 약했기 때문에 막판 가서는 나 혼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할아버지 보고 싶다.”
여기서 영영 살게 될까. 언제 너하고 나는 이 생활에 질리게 될까. 분위기 깨는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섬에 어떻게든 있어야 하는 사조의 사정이 있을 터였다. 같이 있어 주기를 바라는 사조의 요청을 거부하는 건 받은 게 있는데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사조가 이 섬을 떠나지 못할 만한 사정이 무엇일까. 무엇이 사조를 여기에 묶어 두고 있는 걸까. 질문할 게 많았지만 오늘은 그저 바람에 흘려보낸다. 그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바깥에서 아무도 찾을 사람이 없는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니, 오늘 하루쯤은 그냥 흘려보내면 어떨까.
༺♥༻
평상 위에서 잠든 나를 안고서 사조가 집 안으로 들어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정확히 장면이 기억이 난다기보다 사조에게 안긴 느낌이 몸에 남았다. 아침에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취한 나를 들어서 옮겼군, 했다. 내가 놀란 것은 웬만해선 이름만 부르면 삼 초 안에 찾을 수 있던 사조가 행방불명됐다는 것이었다.
“사조야.”
평소에는 제 이름을 똥개 이름처럼 부른다고 실실 웃으며 창틀에 앉아 있거나 내 뒤에 서 있거나 하는데, 오늘은 고래고래 불렀음에도 사조가 나타나지 않았다. 숙취가 심한 것인가 하는 걱정에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마루로 나가 보았다. 그 어설픈 솜씨로 아침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부엌에도, 이 층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조야.”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것 같아 계단에 서서 영희야 놀자 급으로 지겹게 불러 댔지만 이 층은 잠잠했다. 깨우러 가야 되나 싶어서 계단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였다. 이 층은 사조의 사적인 공간이라고 뇌에 각인됐는지 덥석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점심이 넘어서까지 아래층으로 내려올 생각을 안 하자 밥을 먹이기 위해서라도 사조를 깨워야겠다는 생각이 우세했다.
어제 섬을 나가보는 게 어떠냐고 말해서 빈정이 상한 걸 수도 있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 사조의 방에 노크를 했다. 어떤 사람은 깨자마자 토악질해야 술이 깨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콩나물국이나 우유 같은 특정한 음식을 먹어야 속이 풀렸다. 사조처럼 술 마신 다음 날 잠으로 푸는 사람도 더러 있을 터였다. 반응이 없으면 내려가서 물에다 밥이나 말아 먹을까 했는데 문고리가 요상하게 돌아가 있었다.
급하게 나가느라 문도 안 닫고 간 느낌이 팍팍 풍겼다. 사고인 것처럼 가볍게 문을 밀쳤다. 사조의 방에는 그때 옷을 빌리러 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넣어 안을 살펴보았다. 사조는 그 안에도 없었다. 남의 방을 훔쳐보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실례이지만 사조는 일 층에서 나와 지내는 바람에 이곳에는 자주 들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옷방처럼 사용하기만 했지 잠을 잔 흔적은 없었다.
구경을 끝내고 나가려는데 자개 옷장에 익숙한 물건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냉장고에 자석을 붙여 놓은 것처럼 단도로 옷장에 고정해 둔 메모지가 있었다. 어제 술에 취했을 때 그와 그린 짜장면 가게 그림이었다. 사조의 별난 취향은 둘째치고 비싸 뵈는 옷장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아무리 고정시킬 물건이 없다지만 칼로 옷장에 꽂아 고정해 두어야만 했나 싶었다. 저번에 슬쩍 보니 이불 넣어 두는 옷장은 아닌 듯한데.
사람의 호기심은 나아가면 나아갔지 물러서는 법을 몰랐다. 방까지 들어온 김에 옷장을 구경하는 게 큰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단도가 박힌 옷장 안에는 겨울옷이라도 정리해 두었나 싶었지만 그는 항상 심플한 옷만을 입고 다녔다.
긴 바지에 하얀 반팔 티, 아니면 까만 러닝, 그것도 아니면 깜장 반바지 같은 편한 옷을 즐겨 입었다. 겨울옷이 부피가 있긴 하지만 옷장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패션에 관심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한쪽 옷장 문을 열고 나머지 옷장 문도 열었다. 호기심을 채우는 데에 급급해 일을 저질렀지만 시체라도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겁이 났다.
하지만 사조가 옷장 안에 모셔 둔 것은 시체도, 금은보화도 아니었다. 고고한 은색 빛으로 어두운 옷장 안을 밝히고 있는 장검이었다. 손잡이부터 잡아서 꺼내 보려 했지만 사람이 손으로 들 수 없을 정도의 무거운 장검이라 포기하는 게 신상에 좋았다. 주인인 사조가 매일매일 닦아 두었는지 검에 윤기가 흘렀다.
국립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검을 사조가 장롱 안에 모셔 두고 있는 게 신기했다. 검을 보관해 놓는 걸이에 걸어 둔 것으로 보아 전시용보단 사조 본인이 쓰던 것인 듯싶었다. 검의 손잡이 있는 곳 바로 밑에 음각으로 새긴 한자가 있었다. 한자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지만 초등학교 때 한자 교실에 다닌 경력 덕으로 한 글자 아는 게 있었다.
“죽을 사(死)자…….”
나머지 한 글자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이것이 사조의 물건이라면 자기의 이름을 새겨 두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사조의 이름도 사, 라는 글자가 들어갔다.
“이름에 이런 한자도 쓰나.”
손잡이가 삐뚤어진 검을 걸이 위에서 돌려놓고 있을 때 무명천으로 가려져 있던 한복이 왼팔에 걸렸다. 사극에 나오는 한복이라고 하기엔 소매가 길고 치마 같은 것도 달려 있었다. 푸른 저고리와 검은색 아랫바지, 본 적 없는 갓 모양의 기이한 모자까지. 알록달록한 구슬을 달아 화려함을 강조한 모자는 옛날 사람들이 쓰고 다녔을 법한 정통 한복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이 모든 게 사조의 물건이란 말이지.
나는 옷장 문을 닫고 단검에 찍혀 있는 메모지를 한참 바라봤다. 도대체 이건 무슨 의미일까. 솔직히 말해서 좋은 의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검으로 꽂아 넣는 행위는 복을 기원한다기보단 주술이나 저주에 어울렸다. 어제 섬 밖으로 나가자고 한 것에 떫은 태도를 보인 것이 이것 때문이었나. 그 떠날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게 몹시 궁금해졌다.
더 캐물었다간 사조의 미움을 살 것 같아 여기서 본 건 우선 비밀에 부쳐 두기로 했다. 한복과 장검이 든 옷장을 닫고 사조의 방을 빠져나갔다. 들어갔던 흔적이 남지 않도록 일 층으로 조심조심 내려갔다. 날이 훤히 밝았는데 아직 자고 있을 린 없을 것 같았다. 사조는 아침잠이 없어 새벽같이 일어나는 성격이었다. 아마 바깥에서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하고 있겠지.
머리를 질끈 묶고 슬리퍼를 신고서 밖을 나갔다. 어제 우리가 술을 마신 평상은 이미 깔끔하게 치워진 후였다. 내가 매일 먹고 치우지도 않고 먼저 쓰러지는 게 귀찮아서 도망간 건가. 당연히 나와야 할 사람이 나오지 않으니 쌓여 가는 건 걱정과 후회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섬에서 나는 사조가 없으면 말짱 꽝을 넘어서 사망 직전으로 갈 것이었다. 그런데도 사조가 옆에 있으니 얼마쯤 태평하게 생각한 경향이 있었다. 당장 사조가 없으면 밥이든 식재료든 어떻게 해결해야 하고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 섬에는 나를 노리는 사람이 아닌 것들이 있었다.
“사조야!”
아침이라서 어디 갔나 보다, 하며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사조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산책로까지 한 바퀴 돌았다. 수영하는가 싶어서 바다가 있는 쪽을 유심히 봤다가 해안 길 중간에 다다랐을 때, 촉이 좋지 않아 다시 뒤돌아 뛰었다. 아랫동네 쪽으로 내려가자. 사조가 거기서 일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
이건 불공평했다. 나는 사조가 사라지면 찾을 수 없는데 사조는 내가 어디에 있든 나타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기 직전 아랫동네가 있는 언덕으로 바로 꺾어져 내려갔다. 해가 지기 전까지 찾아보아야겠다. 해가 지기 전까지 아랫동네 곳곳을 돌아보고 해가 지면 바다 앞에 앉아 있자.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 볼 만하던 섬이 사조가 없단 이유로 무도하고 처량한 곳이 돼 버렸다.
앞길이 막막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아랫동네의 전경도 다시 보니 폐가가 밀집된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밤마다 평상에 누워 빈집에 켜지는 주황 전등을 바라볼 생각을 하면 그것만큼 진 빠지고 쓸쓸한 것도 없었다. 사조는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이미 나에게 그 이상의 의미였다.
“사조야!”
사조가 아이스크림을 꺼내 오곤 했던 슈퍼 처마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영영 이 아랫동네와 친해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낡긴 했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머리칼을 쭈뼛 세울 만큼 무시무시한 것들로 다가왔다. 구를 기세로 언덕을 뛰어 내려간 나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멈추어 섰다. 점심도 안 먹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바람에 머리가 꼬여 버렸다. 두통이 일고 배가 홀쭉해졌다.
현기증이 이는 느낌에 웩웩하며 숨만 토해 내고 있을 때 까만색 운동화가 발치에 닿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사조가 보였다. 다리의 힘이 풀림과 동시에 사조가 쓰러지는 내 팔을 잡아채었다. 그가 일으키는 힘으로 겨우 버티고 선 나는 눈이 이글거렸다.
“어디 갔었어?”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다 둘러볼 수 있는 이만한 작은 섬에 무슨 일이 있어서 아침 댓바람부터 나갔느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일이 있으면 쪽지를 써야지 뒀다가 국 끓여 먹을 일 있나. 이 섬에 혼자 버려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어디에 있다고 불러도 재깍재깍 안 나타난단 말인가. 할 말, 못 할 말 다 했다간 속된 말로 관계가 쫑이 날까 봐 노려만 보았다. 사조가 저가 입은 하얀 반팔셔츠의 밑을 잡아 펄럭거리며 더위를 날리는 게 보였다. 아침부터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평상시와 달리 단정한 그의 차림을 보면서 의혹을 숨기지 못했다. 편한 티와 바지를 고집하던 그가 다려 입은 정장 느낌을 내려 했다. 사조는 초췌한 모습으로 온 섬을 뛰어다닌 내게 미안한 것처럼 손목을 잡고서 걸었다.
“미안, 미안. 오랜만에 힘을 쓰는 바람에 귀가 어두워졌어.”
무슨 힘을? 사조의 배경에 대해 지식이 짧은 나는 그가 막노동일을 하고 왔다는 것처럼 들렸다. 나를 버려두고 간 게 아니란 것을 알자마자 분노가 땅으로 꺼져 버렸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내가 그에게 가졌던 감정은 화가 아니라 그저 그가 사라졌을까 봐 생긴 걱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조는 기분 좋은 일이 있는 사람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항구에 가까워질 즈음 나는 바뀐 거리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이게, 이게 뭐야…….”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손목 잡혀 따르고 있던 나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작아서 볼 게 없다고 깔본 섬은 하룻밤 새에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내 눈길을 끈 것은 항구 바로 옆에 생긴 짜장면 가게였다. 중화루라는 간판이 붙은 그 가게는 내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와 가서 먹었던 그 춘장 냄새 밴 짜장면집과 똑같이 생겼다. 항구로 들어가기 전에 뺨을 세게 꼬집었다. 굼뜬 내 손을 놓고 달려간 사조는 천진무구한 아이처럼 웃으며 짜장면집 앞에 섰다. 두 팔을 높이 벌린 사조가 행사하러 나온 직원인 양 짜잔, 했다.
“어떠해?”
단도 속에 꽂아 놓았던 메모지. 거기에 그렸던 그림이 현실로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아는 시장 속 중화루는 망해 버려서 내가 중학생이 됐을 즈음에는 건물이 허물어진 자리에 네일 샵이 들어왔다. 술이 덜 깼나 싶어 눈을 비볐다. 새로 생긴 중화루를 맹하게 보고만 있자 사조가 와다다 달려와 내 손목을 끌었다. 제 일처럼 기뻐하는 사조는 내가 별다른 표현 없이 간판만 쳐다보고 있는데도 옆에서 알짱거리며 좋아 죽는 티를 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저녁을 여기서 먹을까. 아님 내일 점심을 여기서 해치울까.”
“아, 그러니까…….”
사람이 상식 밖의 일을 겪으면 왜 실어증에 걸리는지 알겠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시멘트로 바른 벽까지 그때의 느낌과 똑같았다. 내 기억에서 뽑아온 것처럼 허름한 빨간색 간판을 보자 발끝이 간지러웠다. 믿기지 않아서 발가락에 소름이 돋았다.
그뿐만 아니라 중화루 말고도 여러 가게가 항구 쪽에 더 몰려 있었다. 역시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듯이 자전거 수십 대를 놓아 둔 카페가 하나 보였다. 선셋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는 바다 쪽을 향해 큼직한 창을 내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꾸며 둔 카페는 나무색의 간판과 하얀 페인트칠로 고상하면서 자연스러운 느낌을 강조했는데,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예쁜 카페를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 낸 것도 놀랍지만 물고기 간판, 분홍 간판, 정체 모를 여러 가게는 무얼 파는지 적어 두지도 않았다. 사조는 허청거리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히죽 웃었다.
“구경하는 데 돈 안 들어.”
아무리 사조가 체력이 대단하다고 한들 이 모든 건물의 골조를 세우고, 시멘트를 붓고, 간판까지 제작한 뒤 안에 물건까지 들여놓으려면 못해도 일 년은 걸릴 듯싶었다. 나는 사조가 이리 오라며 이끄는 손길에 끌려 분홍 간판이 있는 가게로 갔다. 항구 앞에 쪼르르 생긴 가게 중에 가장 색감이 화려한 가게는 유리창 안을 보았을 때 비로소 가게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코딱지만 한 글씨로 레이디의 어쩌고 저쩌고라고 적어 두고 여성 의류를 팔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마네킹이 입은 옷의 색감이 화사하다고 말한 게 다였다. 사조는 몸을 주체 못 하고 들어가자며 안달이었다.
“얼른.”
“들어가도 돼?”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여기서 무얼 해.”
“아니, 뭔가.”
너한테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한들 옷은 어디서 구했으며, 거리 디자인부터 가게 내부 디자인까지 도심 번화가에 견주어도 될 것들인데 섬 밖으로 한 번도 안 나가 본 것 아니었냐고 따져 묻고팠다. 하지만 한판 붙어서 따져 보기도 전에 사조가 옷 가게로 들어가 쇼핑을 했다. 가게 안에는 내 취향인 옷도 있고, 전혀 입어 본 적 없는 옷도 있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원피스를 골라 온 사조가 내게 입어 보라며 들이밀었다. 편한 옷을 좋아하는 내가 손을 내젓기도 전에 사조는 시무룩해졌다. 하는 수 없이 요청에 못 이겨 그 원피스를 들고 거울 앞까지 걸어갔다. 거울 뒤에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까지 있는 걸 보아하니 본격적으로 어느 매장을 베껴 만든 모양이었다. 그는 매대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고르고 있었다. 나보다 저가 더 신이 난 것 같았다. 그의 팔에 다음으로 입어 볼 옷이 줄줄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도망치듯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의 쇼핑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바지와 티를 벗고 원피스를 아래서부터 입었다.
볼 때는 짧아 보였는데 막상 입으니 허벅지를 완전히 덮는 길이의 원피스였다. 생각보다 하늘색 체크 무늬 패턴이 수수한 느낌이 있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즈음 에러 사항 한 가지를 발견했다. 지퍼와 허리를 묶는 끈이 등 쪽에 있었다. 혼자서 원맨쇼를 해봐도 지퍼가 중간까지 가다가 말았다.
타이밍 좋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탈의실 바깥에 사조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엉거주춤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 앞엔 옷을 피난 짐 싸듯 싸 들고 온 사조가 서 있었다.
“그거 다 못 입어.”
그런데 사조가 이상했다. 저가 고른 원피스로 갈아입은 나를 보면서 예쁘다며, 제 안목이 뛰어나다며 기뻐할 줄 알았는데 외려 차분해진 사조는 고개를 기울여 내 다리 쪽을 보았다.
“짧기도 하구나.”
“이상해? 네가 골랐잖아.”
“그러니 말이야.”
이상한 말을 하는 사조의 손이라도 필요했기에 나는 등을 돌렸다.
“이것부터 닫아 줄래?”
지퍼를 채운 뒤 아래는 리본으로 묶어야 하는 복잡한 구조였다. 사조는 주춤거리지 않고 탈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사조의 숨이 닿는 맨살이 부끄러웠다. 커다란 손이 허리 부근에 있는 리본으로 향했다. 탈의실 안에 있는 거울로 사조가 보였다. 리본을 묶고 있는 사조의 내리깐 눈이 집중하고 있었다. 진즉에 셔츠와 까만 정장 바지를 입지 그랬냐며 타박하고 싶을 정도로 그의 노련하고 권태로운 분위기에 그림처럼 어울렸다. 탈의실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기다란 애가 손가락만 좀스럽게 움직였다. 리본에서 시간을 꽤 잡아먹고 있어 노출되어 있는 등 쪽이 부담스러웠다.
“멀었어?”
탈의실에 들어온 후부터 말이 줄었다. 얼마 걸린다는 대답도 하지 않은 사조가 리본 줄을 느리게 잡아당기자 허리끈이 뱃살을 조였다. 임무를 완수하고 이번엔 위쪽 지퍼로 손을 옮긴 그가 무심코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어깨부터 가슴까지 빠르게 훑어내렸다. 거울로 그의 시선을 지켜본 나는 나도 모르게 옷을 위로 끌어올렸다.
그때 사조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갑자기 침묵의 사나이가 된 그가 겨우 지퍼를 올려 등을 가려 주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런 옷 입지 않는다고 중얼대며 달아오른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사조가 고개를 약간씩 숙였다. 지퍼 올리는 일이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세월아 네월아 했다. 거의 잠그기 직전에 사라진 사조의 얼굴은 내 등에 목적을 두었다. 한창 신경이 곤두서있어 예민해진 등으로 그의 입술이 붙었다.
사조의 입술은 신사적으로 얌전하지 않았다. 지퍼를 올리다가 만 사조의 입술은 점점 도를 넘어 혀까지 사용했다. 애무에 몰두한 그의 눈이 거울 속에 찍혔다. 시선을 의식한 그의 눈이 내 등 뒤로 사라졌다. 등을 깨무는 입술 때문에 머릿속 의혹이 흐지부지해졌다. 날름, 혀로 쓸어 보고는 끈적거리게 입술을 비비는 그의 상체가 위로 올라올 즈음 활짝 벌어져 있던 지퍼도 잠겼다. 그러나 입술만은 떨어지지 않고 내 목까지 올라왔다. 허리를 세게 안다가 그의 팔에 걸어 둔 옷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사조는 아랑곳 않고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 것에만 마음이 쏠렸다. 목 부근을 배회하는 입술은 정복의 증거를 남기려는 것처럼 그악스러웠다.
“지퍼만, 올려 달라고 그랬는데.”
“응?”
목이 잠긴 사조가 찬물 맞은 얼굴로 떨어졌다. 자기가 해 놓고도 믿기지 않은 양 입술이 남긴 자국을 보는 눈은 아까와 딴사람 같았다. 그를 탈의실에 더는 둘 수 없어서 등을 돌려 커튼을 걷어둔 뒤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흐리던 명랑함이 돌아온 사조가 발밑에 떨어진 옷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하!”
허리를 안고 애무할 때와 딴판이었다. 철부지 사내애처럼 웃은 사조가 제 손바닥에 웃음을 가두었다. 숨을 헐떡일 때까지 웃던 사조는 얼굴이 당기는 것처럼 마른 손으로 제 뺨을 마사지했다. 사조는 이렇다 할 변명 없이 나가보겠노라 말하고 탈의실의 문을 열었다. 사조와 둘이 쓰기에 비좁은 탈의실 안은 환기할 곳이 없어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탈의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너른 바다가 보이는 창을 보며 땀을 닦았다. 냉방 빵빵한 에어컨이 그리웠다.
“그런데 나 좀 안 어울리지 않아?”
아까 저 안에서 물었어야 할 질문을 지금에서야 하고 있었다. 떨어진 옷을 건성건성 줍는 사조는 내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눈이 발에 달리지 않고서야.”
“어울린다는……. 뜻이지?”
“말하기 입 아프다.”
어딘지 쑥스러운 기색이 확연한 그는 옷을 아무렇게나 매장 의자에 올려 두고 가게를 나섰다. 바닷가 쪽으로 걷는 그의 앞으로 바람이 부는지 하얀 셔츠가 후르르 날리고 있었다. 신경질이 나는 기색이 역력한 그가 제 머리를 거칠게 쓸면서 옷 가게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사조는 모를 것이다. 그때 우리가 눈을 마주친 순간에 모든 질문과 의혹은 무의미해졌다는걸. 바람, 태양, 바닷가, 그리고 하얀 셔츠. 설령 그가 나를 떠나간다고 하더라도 죽는 날까지 청승맞게 갖고 있을 기억이라는 걸. 사조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도 모르면서 빨리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저것도 봐야지.”
자랑스럽고 뿌듯한 얼굴로 가리키고 있는 카페보다 사조가 좋았다. 섬이 작고 할 게 없어서 내가 나가고 싶은지 아는 줄로 알았나 보다. 뭍으로 가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듣자마자 이 작은 섬에 즐길 거리를 만들어 둔 걸 보면 그의 마음이 불안했었나 보다.
나는 마네킹에 걸려 있는 밀짚모자를 쓰윽 훔치고 밖으로 나왔다. 카페 쪽으로 시선이 돌아가 있는 사조가 메뉴가 무엇이 있는지, 의자 모양이 얼마나 다양한지 설명했다. 여기도 들리고 저기도 들리자며 맑고 환한 사조의 뒤로 쓱 피했다. 웃음기 걸려 있던 사조의 눈이 의아함으로 변하려는 차였다. 뒤에 숨기고 있던 모자를 꺼내어 그의 머리에 푹 씌웠다. 다만 사조의 키가 커서 머리까지는 닿지 못하고 그의 얼굴에 가져다 박은 꼴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당한 기습에도 침착함을 유지한 사조는 찡그리며 모자를 걷어 내었다. 나는 카페가 아닌 중화루 쪽으로 뒷걸음질하듯 걸었다.
“나 배고프거든?”
사조는 밀짚모자로 심장 부근을 가리고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마네킹에 걸려 있는 모자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보다 사조에게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사조는 카페를 한번 흘깃 돌아보고 중화루 쪽으로 천천히 발을 뗐다.
“빨리 걸어와.”
감상하듯이 나를 보며 걷고 있는 사조에게 손짓했다. 처음에는 무시하듯이 바다 쪽으로 눈을 굴린 사조는 준비 운동 삼아 기지개를 켠 뒤 중화루 쪽으로 뛰어왔다. 깜짝 놀란 괜히 그에게 잡히기 싫은 술래처럼 뛰었다.
바람이 부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원피스 덕에 산뜻했다. 뒤를 돌아보니 사조는 충분히 나를 잡을 수 있는 거리임에도 일부러 느리게 뛰고 있었다. 그가 나를 봐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 걸음도 자연히 늦어졌다. 중화루 앞에 도착한 나는 옛 추억 그대로인 출입문을 보자 아랫목에 누운 것처럼 노곤했다. 사장님 실수로 열쇠 구멍에 칠해진 하얀 페인트까지 완벽히 재현해 냈다는 게 대단했다. 내가 들어가지 않고 멍하니 있자 뒤따라온 사조가 자연스럽게 허리를 껴안았다.
“아니 먹을 거면 말고.”
쪽쪽, 머리통에 입을 맞추고는 저기 카페나 가자며 불량배처럼 조곤조곤 졸랐다. 왜 또 변덕을 부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중화루로 들어가고 싶었다.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기대감을 안고서 중화루의 문을 열었다. 익숙한 식초 냄새, 반질반질한 식탁과 의자를 보고서 맥이 탁 풀렸다. 기름이 자글자글 끓는 소리와 닦은 건지 만 건지 의심이 가는 누런 계산대도 변함없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자주 앉던 자리로 걸어가 의자를 꺼냈다. 따라온 사조가 할아버지의 자리에 앉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단무지 그릇도 옛날 느낌이 나는 것을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에어컨 대신 달달달 소리를 내는 선풍기까지 발견했을 때는 신기한 걸 넘어서 도대체 어떻게 이걸 구현한 것인지에 대해 궁금할 따름이었다. 달라진 건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게 장날 도떼기시장이 아닌 바닷가란 거였다. 중화루 건너편에 있었던 채소 가게 풍경이 눈에 선했다. 사조는 예의상 가져다 둔 메뉴판을 무신경한 눈빛으로 훑어보고 내게 건넸다.
“말만 해.”
무슨 메뉴를 먹든 상관없다는 태도였지만 내가 중화루에서 먹고 싶은 메뉴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짜장면.”
중화루의 상징인 뜨끈한 국화차를 잔에 따르고 있던 사조는 메뉴를 고르자마자 부산스레 움직였다. 부엌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무심결에 옷장 속 한복과 장검이 떠올랐다. 중화루를 섬에 세운 건 나를 위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경외심보단 사람으로서의 경계심이 먼저였다. 사조가 이 섬에서 무얼 하고 사는지, 왜 여기에 사는지, 귀신 연놈들과는 무슨 사이인 건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잘 보이려고 갖은 애를 쓰는 사조에게 내 질문이 상처를 줄까 봐 겁이 났다. 거짓말을 하느니 입을 다물겠다는 성격의 사조는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도리어 처음엔 별로라고 그랬었다. 그럼 왜일까. 첫인상이 별로인 사람에게 집과 음식을 내어 줄 이유가 있나. 이 섬에 불시착하듯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잘해 주는 건가.
생각은 답을 내려 주지 않는다. 추측 또 추측일 뿐이었다. 머리를 환기하기 위해 사조가 따라 준 차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사조의 말재간에 놀아나다가 보면 어느덧 하루가 다 간다. 요즘은 같이 손을 잡고 자기까지 해서 도무지 혼자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사조는 누구일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에게 물어보면 간단한 질문일 테지만 사람의 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사조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에 대답을 어물쩍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능력을 가르쳐 달라는 내 질문도 우스워하며 잊은 눈치였다. 가끔 산 자니, 죽은 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는 유들유들한 말솜씨로 질문의 난관을 넘어가곤 했었다.
그때 익숙한 짜장면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짜장면 한 그릇을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인데도 그의 쟁반에는 짜장면 두 그릇과 탕수육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나의 착각이 아니라 사심 없이 놓고 봐도 사조는 요리를 못했다. 계란 후라이 하나만 시켜도 태워 먹는 수준이니까. 우리 할아버지도 요리는 못 하셨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부엌에는 아무도 없는데 사조는 어디서 짜장면을 가져온 것일까. 저렇게 노르스름하게 잘 튀긴 탕수육은? 이것도 능력의 일환인가 싶었다.
처음에는 그저 느낌만 냈다고 생각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조의 능력으로 어떻게 가게만 만들어 냈구나 싶었지만 내 앞에 놓인 짜장면은 완두콩의 개수까지 어릴 적 먹었던 그 짜장면과 똑같았다. 젓가락을 들어 윤기가 나는 짜장면을 춘장 소스와 비볐다. 면과 소스가 어우러지는 소리가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맛있게 들렸다. 윤기가 흐르는 짜장면을 한 입 들어 입안으로 넣자마자 감탄사가 터졌다. 어떻게 이 맛을 재현했을까. 짜장면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맛있나 보다. 울려고 그러네.”
피식 웃은 사조도 짜장면을 다 섞은 뒤 후르릅 먹었다. 이런 맛이었군, 하는 감흥 없는 표정이 아주 맛있는 건 아니고 중간 정도는 하는 모양이었다. 단무지를 내 그릇에 올려 주고 조금 있다간 소스에 찍은 탕수육 하나를 올려 주었다. 같이 곁들여 먹으라는 듯이 젓가락으로 탕수육을 가리킨 사조가 다시 자기 짜장면에 집중했다. 체하지 말고 천천히 먹으라던 우리 할아버지 모습과 겹쳐 보여서 코끝이 찡했다.
“맛이 그저 그래?”
“아니…….”
“응?”
사조는 그릇의 반을 비워 가는데 나는 반 이상이 남았다. 못 먹고 미적거리는 나를 보며 사조가 찻물을 벌컥 마셨다. 티슈를 뽑아 제 입을 닦은 사조는 부엌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가슴이 덜컥했다. 아무도 없는 게 부엌을 노려보는 사조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화가 나 보이는 사조의 손목을 슬며시 잡자 급격히 물컹해진 시선이 나에게 돌아왔다.
“맛있어. 할아버지 생각나서 그래.”
납득이 간 것인지 다시 젓가락을 들었으나 아까만치 시원스레 먹지는 않았다. 사조의 잔에 차를 따라 주고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가슴에 걸린 의문과 추억이 많아 더 넘어가지 않았다.
“고마워, 이렇게 좋아하는 것도 찾아다 주고.”
간 보는 수준으로 짧게 면을 끊어 먹던 사조가 그 말에 힐긋 나를 보았다. 사조는 찻물로 말끔히 입안을 헹군 뒤 미소 지었다. 아, 쟤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었구나. 어젯밤 나한테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계획해 놓았는데. 가게고, 옷이고, 이 짜장면이고, 일일이 생각해 두었을 텐데 반응이 미적지근해서 서운한 거였구나. 나는 탕수육 하나를 집어서 그의 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사조가 눈짓으로 그 탕수육이 뭐냐고 묻는 것 같아 간드러진 목소리를 꾸며냈다.
“옛날에 할아버지가 시장통에 있는 장난감 가게를 데려갔거든. 어린이날이라고. 그런데 거기서 제일 비싼 바비 인형을 사 주시는 거야.”
내가 준 탕수육을 입안에 쏙 집어넣은 사조가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배불러 먹기 싫어 보였는데도 내가 주니 먹는 모습이 착해서 좋았다. 나는 웃으며 그의 그릇에 다시 탕수육을 올려 뒀다.
“내가 친구들 거를 부럽게 보고 있었나 봐. 그래서 돈을 모아 두었다가 사 주신 건데, 너무, 너무, 정말 그 자리에서 뛰고 싶을 만큼 너무 좋아서 집에 가면 무슨 옷을 입혀 주고 머리도 바꾸어 주고 그렇게 계획하면서 걸어갔거든. 그랬는데 나중에 할아버지가 실망한 눈으로 나한테 ‘더 비싼 걸 사 줄 걸 그랬나?’ 그랬어. 알고 보니까 내가 말이 없어서 할아버지는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나 봐. 그게 아닌데.”
말을 꺼낸 의도를 짐작하는 듯이 내가 준 탕수육만 골라 먹은 사조가 뒷목을 쓰다듬으며 끄덕였다.
“고마워, 사조야. 내가 그 짜장면집 이야기를 꺼냈을 때 너처럼 반응해 주는 사람은 없었어. 이렇게 데려와 준 사람도 없었고. 아, 네가 사람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나 정말 기뻐.”
한마디 한마디 귀담아들은 사조의 목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조는 참 알기가 쉬운 애였다. 미소는 입술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눈에도 미소가 살아서 아무리 찻잔으로 가리려고 해 봤자 아는 수가 있었다. 웃음이 터질락 말락 한 얼굴로 차를 마신 사조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남한테 해 주고도 제가 더 좋아하는 것을 보니 사조는 심성이 고왔다.
“짜장면은 네가 만든 거야?”
“짜장 태울 일 있나.”
“그럼 누가?”
사조는 단박에 아니라고 말한 뒤 날씨가 좋은데 혹시 그거 아냐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관심을 끌려 했다. 부엌에 누가 있는 것처럼 그쪽으로 스리슬쩍 눈 돌리는 걸 목격했다. 나는 침을 삼키고 부엌을 한 번, 사조를 한 번 바쁘게 눈길을 오가며 쳐다보았다. 낯선 기분이 들어 사조의 손을 굳세게 잡았다. 사조는 안심시키듯 내 손을 마주 잡고 나갈 준비를 했다.
“커피 타 줄까.”
식후 커피나 하자고, 의자를 넣고 일어나 사조와 밖으로 나갔다. 왠지 사조 없이는 절대 들르지 않을 것 같은 중화루 간판에 시선이 머물렀다. 날이 어제보다 습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니 징글징글한 먹구름이 껴 있었다. 섬이 그간 격조했지 하며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날씨를 확인한 후 사조는 커피숍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나는 여기에 있으라는 듯이 사조가 손을 올렸다. 이 거리에선 사조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 쪽에 선 것까지만 보였다.
오 분도 되지 않아 사조는 항구에 있는 작은 정자로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아랫동네에 사람이 살았다면 정자는 발 디딜 틈 없는 만남의 장소였을 것이다. 정자로 걸어가 앉은 나는 사조가 내민 커피를 조심스레 받았다. 커피는 따뜻한 캐러멜 마키아토였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커피였다. 비취색 바다를 보면서 캐러멜 마키아토를 마시는 건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 커피도 사조가 만든 것은 확실히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한 입 나누어 줘.”
그의 귀여운 표현에 피식 웃은 나는 커피를 그에게 내밀었다. 사조의 것은 커피가 아닌 과일 주스처럼 보였다. 나는 사조와 컵을 교환하고 한 모금 맛을 보았다. 설탕이 잔뜩 들어간 토마토 주스였다. 캐러멜 마키아토보다는 사조의 토마토 주스가 더 입맛에 맞았다. 사조는 내 커피를 개미 눈물만큼 맛보고는 쓰면서 달다고 했다. 그러곤 돌려준다는 말 없이 제가 홀짝이며 마셨다. 우리는 서로의 취향을 바꾸어 맛보았다. 토마토 주스는 사조의 것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태어나 내가 먹어 본 어떤 과일 주스보다 달고 시원했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기세가 강해지고 있었다. 섬의 지랄 맞은 날씨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정도로 무뎌진 나는 빨대로 토마토 주스를 쪽 빨아먹었다. 사조는 돌아앉아 검은 먹구름에 지배당한 바다를 감상했다. 섬 하나 보이지 않는 깔끔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여기에 온 지 얼마나 지났는지를 생각했다. 몇 달이 몇 년 같았다.
주황색 샌들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맺혔다. 샌들 안으로 들어온 빗방울이 발등을 채 지나기도 전에 구멍 난 하늘에서 폭우가 내려왔다. 오늘만 기다린 것처럼 내리는 비 때문에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바람에 물이 섞였다. 사조는 비가 오든 말든 내가 준 커피를 맛있게 빨아 먹으며 정자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사조가 좋아하는 것. 술, 풍선껌, 그리고 캐러멜 마키아토도 추가되었다. 아이스크림은 달다고 질색하듯이 먹으면서 캐러멜시럽은 괜찮은가 보다. 나도 귤의 신맛은 참을 수 있는데 자두의 신맛은 참을 수 없었다. 사조의 혀도 단맛의 기준이 종목마다 다른가 보다. 저를 보며 키득거리니 사조가 왜 웃냐고 물었다. 이유를 알려 주기 싫어 모른 척을 하자 바로 보복이 돌아왔다.
“앗, 차가.”
발을 이용해 빗물을 쓸어서 내 발목 쪽으로 튀겼다. 샌들이 젖자마자 닿자마자 손에 든 토마토 주스를 내려놓았다. 웃음이 그득 올라와 있는 그의 눈가가 너도 해 볼 테냐고 묻고 있었다. 어른인 나는 유치한 장난에 가담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철부지 사조는 계속해서 신발로 빗물을 모아 튀기며 장난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 그를 째려보았다.
“차가워. 하지 마.”
“바다가 좋으냐 내가 좋으냐.”
“아, 유치해.”
“주스 사 준 건 나인데.”
당하고만 있을 순 없어 그에게 굳은 표정으로 한 번만 더 하면 바다에 빠트린다고 경고했다. 사조는 항복의 의미로 내가 준 밀짚모자를 팔에 안고 있었다. 사조는 싫은 것, 좋은 것, 그 두 가지에 대한 감정 표현이 탁월했다.
“사조는 평생 이 섬에서 살 거야?”
사조가 빈 컵을 빨대로 빨자 찌르륵 찌르륵 소리가 났다. 그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렇겠지.”
“예전부터 그랬어?”
“그랬지.”
“그래서 너도 외로웠구나.”
“염려 마. 이제 나랑 같이 살 사람도 생겼으니.”
명확히 나를 겨냥하고 한 말이었다. 저와 같이 사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으니 말이다. 섬 밖으로 나간다고 사조만 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럼 사조와 이곳에서 천년만년 살아 볼까. 한 번만 더 사랑이란 것을 믿어 볼까. 그러나 선뜻 같이 지지고 볶고 살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빨대를 잘근잘근 씹은 사조는 참을성이 없는 사람처럼 발로 내 샌들을 톡 건드렸다.
“같이 살 사람.”
혹여나 자기가 한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일까 봐 내 발을 찔러 알려 주는 것이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가 하는 말의 뜻을 대부분 정확히 집어내고 있었다. 사조는 저러다 잘리겠지 싶은 기세로 빨대를 씹고 있었다. 빨대로 목을 잘못 찌를까 봐 걱정됐다. 사조에게 다 마신 커피를 내놓으라고 손바닥을 펼쳤다.
“건강에 안 좋아. 그거 씹지 마.”
“같이 안 살으려고?”
사조가 섬뜩한 눈을 하고 되물었다. 그는 입에서 천천히 빨대가 꽂힌 커피를 빼내었다. 정자에 꽂을 듯이 컵을 놓은 그가 손을 모으고 다리 한쪽을 폈다. 정자 바깥으로 내놓은 발 하나를 앞뒤로 흔들며 불안을 표현하고 있었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 작정하고 있겠다는 뜻을 읽었다. 나는 부담을 느꼈다. 터놓고 말해서 그와 늙어 죽을 때까지 섬사람으로 산다는 게 잘 그려지지 않았다. 사조와 보내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지만 평생을 산다는 말에 거부감이 드는 건 왜일까. 왜 뭍으로 그를 데리고 나가 보고 싶을까. 단순히 뭍의 생활이 편리하고 그리워서, 이곳이 물리고 지겨워져서 그런 게 아니었다. 본능이 나를 뭍으로 이끌고 있었다.
“섬이 작긴 하지?”
내 의중을 읽어 보려는 것처럼 나온 사조의 질문에 한숨을 내쉬었다.
“섬 크게 만들려고?”
“못 할 것도 없는 일이라.”
“그러지 마. 지금이 좋아.”
“한데 미적미적 대답을 미루잖아.”
나는 사조를 가만 바라보았다. 나만 답을 정하라고 하는 건 분통스러웠다.
“짜장면, 네가 만든 게 아니라면 누가 만든 거야?”
“알고파?”
“응.”
“겁도 없기는.”
사조와 섬. 사조가 나는 사람들 눈 피해서 집 짓고 살기만 하는 거라고, 그 귀신 연놈과 관련 없다고 분명히 해 두면 될 일이었다. 사조는 내가 보는 것들을 헛것이라고 칭한 적이 있었다. 그도 이 섬에 무엇이 있는지 손바닥 보듯 안다는 뜻이었다. 마음에도 섬에도 비가 내렸다. 토마토 주스를 먹지 말 걸 그랬다. 얼음이 든 주스를 먹으니 뼈에 찬바람이 드나드는 기분이었다. 사조는 빗줄기가 굵어지자 말을 아끼더니, 정자에서 일어나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가는 바다 같은 빗줄기 속으로 들어갔다. 하늘색의 원피스는 빗물이 닿자마자 볼품없이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사조는 비바람이 들이치는 순간에도 곁눈질로 나를 확인했다. 눈이 노골적으로 나를 훑어보는 통에 나는 입안에 비가 들어오는지 마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조의 눈길이 머무는 자리마다 애정의 꽃이 피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떠난다고 생각했을 때 열이 난다고 그랬다. 그는 온몸이 기르지 못할 꽃으로 뒤덮이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건 사조의 태도였다. 사조가 나보고 가지 말라고 해도 이미 나는 이 섬에 묶인 신세였다. 말이 좋아서 여행객이지 돈 한 푼 안 내고 사조의 집에서 먹고 자고 노는 중이었다. 얘가 노력하지 않아도 배가 뜨지 않아 어차피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조는 내가 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처럼, 맘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그날에 사조랑 헤어질 수 있는 건가.
항구를 벗어나자 사정은 조금 더 나았다. 항구 근처에서 폭발적으로 퍼붓던 비는 아랫동네로 오자마자 기운 빠진 것처럼 빗줄기가 약해졌다. 아랫마을의 주황빛이 감도는 전구가 언덕길에서 넘어지지 않게 도왔다. 사조는 방심하다간 미끄러질 수 있다며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빗물이 사조의 셔츠를 투명한 빛깔로 바꿨다. 그게 야해 보였다.
사조는 빗물이 들어오니 입을 잠깐 닫자고 했다. 우리는 폐가가 된 집 몇 채를 지나고, 간식을 제공해 주는 슈퍼를 지나고, 나무만 듬성듬성 있는 길을 지나서 드디어 우리의 서식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조와 담을 넘을 즈음 앓아누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체력장 전교 5등에 빛나는 내가 비 좀 맞았다고 재채기를 했다.
눈알이 뜨뜻했다. 현관문을 연 사조가 신발장에 무릎을 꿇었다. 내 샌들을 벗겨 주고 제가 먼저 일이 난 것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장이 내 몸보다 차가웠다. 목구멍에 가래 낀 것처럼 숨소리가 가르랑거렸다. 머리, 손, 발, 귀까지 쉬어야 한다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건강 빼면 시체였던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뼈에 금이 가곤 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신발장에 기대 서 있을 때 수건을 들고나온 사조가 들어와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쌀 포대 안듯 내 몸을 든 사조는 빗물이 범벅이 되는데도 나를 마루에 들였다. 그 잠깐 사이 보일러를 떼서 따듯해진 바닥에 누웠다. 사조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줬음에도 불편한 데는 없냐고 물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싸맨 뒤 손, 발, 등을 잊지 않고 닦아 주었다. 제 몸은 돌 볼 생각 안 하는 가엾은 그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물기 없이 꼼꼼하게 닦아 주는 사조를 사진 찍듯이 눈에 저장해 두었다. 그는 미리 꺼내 둔 새 수건으로 갈아서 얼굴을 닦아 주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안 닦게?”
사조라면 괜찮지 않을까. 이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든. 웬만한 남자보다 의리 있지 않을까. 뺨을 닦던 손이 원피스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뜨거운 숨이 내뱉어지면서 그의 눈길을 이끌었다. 그가 수건을 툭, 떨어트렸다. 후끈한 엄지가 내 입술을 만졌다. 오늘 알았다. 사조의 외로움이 나의 외로움만큼이나 혐오스러웠다. 나는 그리 대단한 여자는 못 되지만 그의 외로움을 발로 뻥 차 주고 싶었다. 나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행복해하는 얼굴. 외로움이 진저리나 애정을 원하는 눈빛. 이것이 오래도록 지켜졌으면 좋겠다.
나는 사조의 허벅지 옆으로 떨어진 수건을 주웠다. 빗물이 흐르는 그의 목에 수건을 가져다 대었다. 겁도 없기는. 사조는 그렇게 말했다.
사조를 받아들이면 나는 살아온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섬사람으로, 그의 것으로 살 터였다. 그것은 나를 완전히 파괴할 수도, 나를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졌다. 허락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뜻이었다.
젖어서 그의 살갗을 비추는 셔츠 단추에 손가락을 걸었다. 투박한 숨을 내쉬는 사조의 눈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만했다. 사조의 손은 조심스럽게 리본을 넘보았다. 그가 줄을 잡아당기자 허리를 조이던 끈이 풀어졌다. 나는 오로지 하얀 단추에 집중했다. 조개껍데기로 만든 것처럼 오색찬란한 단추를 푸르고, 푸르고, 또 풀었다. 빗물 머금은 사조의 탄탄한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건…….”
그의 가슴 아래에 한자로 새긴 문신이 보였다. 상형 문자처럼 생긴 그것은 사조의 아름다운 몸에 난 흉 같았다.
“이건 무슨 뜻이야.”
사조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네 번째 아들이란 뜻.”
사조도 그런 게 있구나. 어머니라는 게, 아버지라는 게, 형제라는 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아서 잊고 있었다. 흉악스러운 문신을 손바닥으로 가리자 사노는 눈을 감았다. 사조의 몸이 금세 뜨거워졌다. 손목에 달린 팔찌가 짤랑, 하고 존재를 과시했다. 사조가 등에 있는 지퍼를 지이이익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피스는 간신히 내 몸에 얹어 있는 수준이었다. 셔츠 단추를 모두 푸른 사조의 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조의 입술이 다가와 내 입술에 인사했다. 부드럽고, 말캉하고, 따듯하고, 절대 내게 위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안정적인 입맞춤이었다. 젖어 있는 그의 바지 위로 저절로 손이 떠났다.
사조의 부드러운 손이 턱을 잡았다.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한 손 덕분에 나는 북받치는 욕정을 사조의 입안으로 전할 수 있었다. 원피스가 흘러내려 골반에 걸쳐질 즈음 서로 맨 가슴을 맞대고 뭉개고 있었다.
납작하게 눌린 가슴을 보자 귀가 난로를 쬔 것처럼 뜨뜻했다. 사조가 열이 올라 빠질 것 같은 눈두덩을 혀로 핥았다. 사조의 입술이 그가 잡아서 들어 올린 내 손목으로 내려갔다. 팔찌를 찬 손목에 그가 연신 입을 맞추었다. 정신이 조금만 덜 몽롱했더라면 그의 눈이 얼마큼 옅은 갈색인지 질리도록 보았을 텐데. 혼절하는 사람처럼 몸이 갸우뚱 쓰러지자 사조가 재빠르게 허리를 잡아 안았다.
“왜 이러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섰으니. 너는 이제 택해야 해.”
그의 말에 스멀스멀 감기던 눈을 떴다. 무의식 속에 빠져 그의 말을 분석했다.
“어여뻐라.”
사조는 예뻐서 몸살 나 죽겠다, 같은 말을 했다. 턱을 잡아 올린 사조가 입술을 한번 깨물고 놓아주었다. 나는 그의 입술에서 벗어나는 순간 정신이 깼다.
“내가 죽는다는 소리로 들려.”
“당연히 죽은 자는 죽은 것이지.”
사조는 죽음은 별 게 아니라며, 불귀의 땅엔 금이 많다며, 영양제 판매원처럼 장점만 나열했다. 사조는 내 턱을 쥐고서 제가 하고픈 만큼 키스했다. 뺨 언덕 아래로 흘러간 눈물이 마룻바닥을 적셨다. 무섭지는 않은데 무서웠다.
“이것.”
사조는 옥색의 팔찌를 사나운 눈빛으로 긁었다. 할아버지가 채워 주실 때의 빛깔보다 탁해졌다. 사조는 보기만 해도 가슴 아픈 할아버지의 선물을 긁어내고 싶어 했다. 더는 보지도 말라는 듯이 팔찌를 손으로 감싸 감췄다. 형형한 갈색의 호수가 여기로 빠져 볼 테냐며 물었다. 혀로 내 아랫입술을 쭉쭉 빨았다. 추르릅, 남사스러운 소리가 마루에 납작 엎드려 기어 다니다가 귓가로 들어왔다.
“이것만 내게 넘기면 돼.”
“팔찌를, 너한테 주라고?”
“기특하게도. 그래 줄 것이지?”
나는 턱을 돌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사조는 손에 쥘 게 없어지자 미소를 사그라뜨렸다.
“안 돼.”
“정인아.”
그는 말귀 어두운 사람 흉내를 내며 손바닥으로 열을 쟀다. 아래 속옷만 입은 나는 마룻바닥 위에서 꿈틀거렸다. 사조는 열을 잰 손바닥을 금방 떼었다.
“열난다.”
사조는 웃통을 가릴 생각도 않고 침대 위에 있는 이불을 챙겨 나왔다. 팔뚝과 등에 붙은 근육이 아름다워 시선이 따라갔다.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구석에 누웠다. 하지만 사조는 토라진 몸짓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베개까지 가져와 머리 밑에 놓아주었다. 베개를 반듯하게 베고 누워 팔을 축 늘어뜨렸다. 사조는 똑같이 생긴 베개를 꺼내와 내 옆에 두었다.
불을 끄고 돌아온 사조는 맨 가슴을 유혹적으로 노출했다. 몸하고 마음을 함께 범하려는 고단수였다. 사조의 손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바닥은 찬지, 따듯한지 수시로 확인했다.
“일어나면 약 먹자.”
산 자. 죽은 자. 그럼 사조는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따듯했다. 혈색도 좋고 살가죽도 푸르뎅뎅하지 않다. 사조는 궁금한 게 많아서 먹고픈 것도 많겠다며 억지로 뜬 나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어둠이 찾아왔다. 사조의 손이 등을 도닥여 주며 수마를 불러왔다.
“안 돼…….”
“말은 자고 일어나 해.”
그럼 너는 내가 죽었으면 하는 거야? 왜 내가 살지 않고 죽었으면 해? 죽어보는 게 어떻냐는 남자. 상냥하게 죽음을 이야기하는 남자. 나는 나를 재워 주는 그의 솜씨에 맞서지 못했다. 열이 많은 그의 몸은 떨어진 체온을 올리는 데에 효과가 있었다. 죽는 게 낫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잠을 청했다.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이 물정 어두운 것.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