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목차
7장 죽음을 돕는 자
8장 정염
9장 소리소문없이
10장 가을 그리고 겨울
11장 여름에 만난 남자
12장 영원한 안녕
7장. 죽음을 돕는 자
남자는 형제 중에 가장 뛰어났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원귀를 불귀의 땅으로 보내는 것도, 살아생전 저지른 죄를 심판하는 것도, 명부를 관리하는 사자의 우두머리가 되어 다스리는 것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시샘이 강한 그의 형제들마저 그의 재능에 대해서는 눈 가리고 아웅 하진 못했다. 하지만 아비는 그를 도리어 불귀의 땅에서 가장 먼 곳에 두었다. 명부를 관리하는 것도, 심판하는 것도, 불귀의 땅을 다스리는 것도 모두 그의 몫이 아니었다.
큰누이가 불귀의 땅을 다스리는 일을 맡는다고 들었을 때,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비에게 질문이란 것을 했다. 그전까지 그는 아비가 시키는 일에는 무엇이든 군말 없이 해내는 자였다. 그리고 그는 아비와의 독대에서 생에 전반에 걸친 의문을 얻게 된다.
‘고독을 모르는 자가 어찌 불귀의 땅을 다스리며, 정과 연민을 모르는 자가 어찌 남을 심판할 수 있으며, 제 아랫것인 사자를 관리할 수 있단 말인가. 너는 나의 자식 중에 가장 뛰어나나, 무엇이 중요한지는 가장 모르는 자다.’
그는 그 대답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했다. 불귀의 땅과 산 자의 땅,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에 걸터앉은 그에게 가끔 불귀의 객도 아니고, 산 자라고 하기에도 골치 아픈 이들이 나타났다. 그의 임무는 선택을 종용하지 않는 것, 그저 객이 원하는 방향을 결정하면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을 끓여야겠다.”
문밖에서 기척을 내는 수하에게 물러가라고 성을 내자 네발 달린 짐승의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을 푼 그는 편히 침대 밑에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침대 위에는 열이 올라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여자가 누워 있었다. 송정인. 곱고 어리고 외로운 여자였다. 처음 여자의 이름을 들었을 적에 그는 아비와의 일을 회상했다.
‘네게도 너만의 정인이 있을 거다. 없다고 자신하지 마라.’
나이가 몇인지 세 보지도 않은 그를 애 취급하면서 정작 어린애보다 울리기 쉬운 여자. 다가오지 말라는 둥 꼬시지 말라는 둥 하더니 눈으로는 저의 모든 걸 바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여자.
연민, 정, 그리고 고독이 무언지 저 여자는 죄 알고 있었다. 까마득한 세월을 이 경계에 머물며 그도 그 셋을 알게 됐으나, 셋을 한꺼번에 한 사람에게 느껴 본 적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송정인이 입을 벌려서 한숨을 내쉬면 그의 가슴에 생겨난 정이 비바람을 맞았고, 송정인이 가진 외로움은 그와 닮아 있어서 연민을 느꼈고, 송정인이 떠나고 싶은 기색을 내비치면 그는 전보다 수십 배는 고독해졌다.
“네가 잠드니 고독하다는 걸 알아?”
그의 손이 정인의 뺨에 닿으니 그녀는 시원한 것에 닿은 것처럼 배시시 웃었다. 처음엔 그 정을 갈구하는 눈이 연약해 보여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한데 어느 날 거울 속 자신도 그녀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쳤다. 자신에게서 정인을 보았다. 정인은 그와 닮았다. 그럼에도 정인은 사람을 믿었다. 사람이 싫다고 하면서 그에게 웃어 준다. 그건 사람이 싫은 게 아니었다.
그는 침대 밑에 둔 얼음물에 마른 수건을 적셨다. 정인의 몸은 날이 갈수록 허약해질 터다. 경계에 있는 자들이 흔히 겪는 일이었다. 한데도 정인은 꿋꿋이 버티려고, 저 경계 밖으로 나가 보려고 못내 미련 남은 사람처럼 기웃기웃거렸다. 객의 바람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그는 정인의 미련이 거슬렸다. 그가 사족을 못 쓰는 것들은 모래처럼 손을 빠져나갔었기에 이번만큼은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며 자기 자신을 꾸짖고 달래었다.
“너는 아니겠지.”
찬물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자 그녀가 스르르 눈을 떴다. 정신이 없을 텐데도 그를 보고서 옹알거렸다.
“사조야…….”
저 간악한 목소리로 그가 버티고 선 뿌리를 뽑아서 흔드는 기분이었다. 열로 뜨끈한 그녀의 입술을 훔치니 다시 고롱거리며 눈을 감았다. 이름만 부르고 떠나 버린 님이 야속해 울어도 이미 수마에 빠져 버린 것을 어쩌나.
“한참 어린 게.”
그는 침대에 팔을 괴고 엎드려 그녀의 잠든 모습을 눈알 닳도록 지켜보았다. 정인이 몸을 틀었을 때 팔에 차 있는 팔찌가 반항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어떤 의지는 너무 지나쳐 한 사람의 생을 바꿀 정도가 된다. 무당의 의지는 대단치 않았지만 저 팔찌를 선물한 자의 바람이 정인의 삶을 이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뭍으로 가 봤자 그녀는 연이 없는 외딴섬이라서 고독해질 뿐이었다. 원래는 끊어졌어야 할 삶을 억지로 잇고 이으니, 살아도 받을 게 없는 그녀의 주변엔 허울 좋은 껍데기만 바글바글할 터였다.
침대에 상반신만 올리고 정인을 간호하던 그가 지친 눈을 잠시 감는다는 핑계로 그녀의 옆자리에 누웠다. 새벽녘의 냄새를 마시면서 첫 숨을 텄을 때였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팔을 베고 누워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것을 대하듯 숭배하는 눈길이 그를 감쌌다. 목에 붉은색 애정 두드러기가 났다. 심장은 그녀를 우러러보기 시작하였으나 그의 정인은 몸이 아픈 관계로 금세 눈을 감았다. 그의 하루는 정인의 미소로 밝아지고 어두워졌다. 요 며칠은 정인이 아픈 바람에 내내 어둠이었다.
어쩌면 그의 아비는 이런 것까지 본 것이 아닐까. 그는 지나치게 정이 없거나 지나치게 정을 품었다. 그런 사람은 불귀의 땅을 다스릴 자격이 없다고 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조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