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정염 (8/12)

8장. 정염

할아버지의 꿈을 꿨다. 돌아가시고 몇 개월째 꿈에 나타나지 않아서 저세상에서 화투 치는 재미가 그리 좋으냐며 할아버지에게 손 편지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녀를 혼자 남겨 두고 떠나갔으면서, 막상 하늘나라로 가니까 걱정은 한 개도 안 되고 좋은가 보다, 하는 생각에 수목장을 한 소나무 앞에 가서도 생떼를 부렸었다. 그러나 엉덩이 무거운 할아버지는 꿈에 한 번도 나타나 주지 않았다. 손녀가 잘사는 모습을 보여드리지도 못하고 너부시 주저앉으니 꼴 보기 싫은 것일까. 그런데 할아버지는 심술 난 청개구리처럼 마음이 편하고 행복한 지금에서야 나타나 나를 원망하였다.

할아버지가 심심하면 잉어 먹이를 주러 가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할아버지 혼자 벤치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사 망하든 말든 무심한 눈으로 벤치에 앉아 시간을 죽이던 할아버지가 나를 발견했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간 나는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겁이 났다.

‘할아버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할아버지가 노여워하실 때는 팔찌를 빼고 다닐 때와 내가 시건방지게 굴 때뿐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매만 안 들었다 뿐이지 어떤 얼굴보다 노엽고 어떤 얼굴보다 슬퍼 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나타나서 나한테 하는 얘기가 고작 역정을 내는 거라니. 나는 잘 지내니 너도 잘 지내라는 말을 기대했던 나는 서럽게 우는데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나보다 슬픈 곡소리를 내며 우는 게 아닌가.

‘아이고, 정인아…….’

할아버지가 가슴 치며 대성통곡하는 건 처음 보았다. 말수 없고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양반이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 손녀 한번 안아 보자고 웃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다가가 울고 있는 할아버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할아버지는 노여움이 풀린 것처럼 앙상한 손으로 내 팔을 꼭 잡았다.

공원의 벤치, 나무, 연못에 샛노란 물감이 칠해져 사라지고 있었다. 볼을 무는 입술을 느끼고 눈을 팍 뜬 순간에 할아버지는 먼지가 되어 포스스 날아갔다. 떠나간 할아버지 대신 보이는 것은 뺨을 꼬집고 있는 사조의 손이었다.

“지금이 몇 시…….”

그런데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머리가 아파서 입을 다물었다. 숙취가 심한 날에 겪는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사조가 천천히 나의 허리를 잡고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혹시 실수는 안 했나 싶어 마지막으로 저장된 기억에 해상도를 올렸다. 사조와 비를 맞고 뛰어 들어와 웃옷을 벗고, 키스를 하고, 죽음과 삶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었다. 자세한 대화 내용은 기억에 없었다. 그때 미열이 있는 것 같더니만 며칠 골골거린 모양이었다. 중간중간 눈을 뜰 때마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던 사조가 기억났다.

“나 간호해 줬구나.”

할아버지에 대한 꿈을 얘기하면서 위로를 받고 싶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의 눈을 보자 그 얘기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밤새 열 식히느라고 동동거린 사람한테 꿈 얘기까지 들어보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사조는 땀에 젖은 내 이마를 쓸어 주면서 열을 쟀다. 남을 간호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물수건 쥐고 옆자리서 곤히 자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뭉클했다.

“열은 갔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러냐는 할아버지의 곡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영험한 힘이 있는 사조에게 묻고픈 마음은 굴뚝이었다. 꿈에서 할아버지를 봤어. 나를 보고 우시더라. 그게 진짜일까, 아님, 그리움이 만들어 낸 허깨비일까.

“송정인.”

“…….”

“정인아.”

나를 부르는 사조의 목소리에 손끝이 대답하듯 움츠러들었다. 나는 꿈에 동요하고 있었다. 사조는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에 빠진 나의 손을 들고서 입을 맞췄다. 나는 그의 손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맞잡은 엄지에 힘을 주었다. 사조는 내 뺨에 입술을 두고 나지막이 말했다.

“더 자고 싶음 그래도 되고.”

자는 것은 이제 질렸다. 더욱이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파서 더는 잠에 들고 싶지 않았다.

“잠 말고. 배가 고파.”

배고프다는 말에 사조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갔다. 사조가 나가서 있는 동안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그마한 얼음 조각이 떠다니는 물그릇과 적셔져 있는 수건 수십 개가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꼴은 거치 왕초였다. 사조의 하얀 러닝을 얻어서 원피스처럼 입고 있었다. 바지도 사조의 것인지 반바지임에도 내 종아리의 반을 가렸다.

허리 고무줄이 조여지질 않아 허리춤을 잡고서 침대에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때마침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사조가 나타났다. 사조는 바지 허리를 잡고 어정쩡하게 선 나를 보고 송곳니를 보일 만큼 기뻐했다. 괜히 놀림거리가 된 기분이라 민망해진 나는 도로 침대에 앉았다.

“허리가 조금 커.”

“조금? 조금이 아니던데.”

사조는 실실 웃으며 허리에 껴서 갖고 온 작은 상을 폈다. 죽그릇에는 숟가락이 수직으로 꽂혀 있었다. 그는 바닥에 상을 펴고 그 앞에 앉았다. 죽을 식히려는 듯 숟갈을 뜨고 후후 입바람을 분 그가 먹어 보라며 가져왔다.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한 입을 받아먹었는데 죽이 달았다. 맛있어서 단 것이 아니었다. 실수로 설탕을 다 때려 부은 맛이었다. 사조가 손수 끓였구나. 나는 입술을 가리고 죽을 겨우 삼켜 내었다. 밑에서 다음 숟갈을 푸는 사조는 아닌 척하면서 귀를 쫑긋하는 게 보였다. 내가 어떤 맛이 나는지 말해 주기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비록 죽의 맛은 특이했지만 배가 채워지는 느낌은 확실히 좋았다. 나는 말없이 계속 죽만 푸었다가 떨어트리기를 반복하고 있는 사조에게 입을 벌렸다.

“빨리 더 줘. 배고파.”

처진 고개를 든 사조가 기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사조는 한꺼번에 많이 담으려고 노력하며 숟가락을 이리저리 놀렸다. 죽을 한가득 쌓은 숟가락을 내게 내밀었다. 아무런 내색 없이 그 죽을 받아먹었다. 맛보다는 사조의 정성이 기특했다. 사조가 끓인 티가 나지 않았다면 조금만 받아먹고 말았을 터다. 죽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생판 모르는 남이 끓인 죽을 먹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죽 그릇을 반이나 비우고서 사조는 내게 물 한 컵을 건넸다. 죽의 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는지 컨디션은 금방 회복했다. 일어나서 짐가방 쪽으로 걸어가 그 안에 든 편한 바지 하나를 꺼냈다. 위에는 몰라도 아래는 확실히 갈아입어야지. 안 그러면 사조의 앞에서 바지가 흘러내리는 불상사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가방 지퍼를 닫고 뒤 돌은 나는 나를 깨운 노란 물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아침이라서 해가 들어오는 게 아니라 반대로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빛에 눈이 부셔서 잠이 깬 모양이었다. 비에 깨끗이 씻겨낸 맑은 공기가 폐부로 들어왔다. 아랫동네 너머로 사라지는 노을이 오늘따라 반가웠다.

“사조야.”

나는 나가지 않고 죽을 숟가락으로 뒤적거리고 있는 사조를 보았다.

“왜 불러.”

“나 바지 갈아입고 싶은데 나가 줄래.”

갑자기 사조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제 눈을 가렸다. 보지 않겠다는 뜻임은 알지만 입꼬리 올라간 그의 입술이 음흉했다. 이미 속옷까지 보인 사이에서 나가라고 앙탈 부리는 것도 귀찮았다. 커튼 뒤로 들어가 그의 바지를 벗고 가져온 바지로 갈아입었다. 안 보겠다는 약속을 잘 지킨 사조는 바지를 갈아입고 커튼 뒤에서 나오자마자 눈 가린 손등을 내렸다. 윗도리는 그의 커다란 러닝에 아래는 짧은 반바지라서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개운하게 반신욕을 하고 싶었다.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방문을 열려고 한 순간이었다. 몸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열어 둔 문이 바람에 놀란 것처럼 쾅 닫혔다. 눈앞에서 문이 닫혀 깜짝 놀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죽이 묻은 숟가락을 핥고 있던 사조가 음산하게 물었다.

“더 안 먹고?”

“다…… 먹었어.”

“지금은 어디 가려고.”

“욕실.”

보고하듯이 말을 마치자 매정하게 닫힌 문이 사과하듯 열렸다. 심술을 다 부린 것인지 사조는 핥고 있던 숟가락을 죽 그릇에 넣고 상을 들었다. 나와 동행하려는 것처럼 따라오는 사조의 극성에 밀려 복도로 나갔다. 욕실은 부엌과 반대편에 있었다. 기우겠지 싶어 천천히 욕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쾅, 상을 놓는 소리가 들리고 몇 초 안 돼서 사조가 졸졸 따라왔다.

“아, 화장실 급해?”

설마 내가 씻는 데까지 따라올까 싶어 돌려 말하였더니 사조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욕실 문을 활짝 열어 두고 그 앞에 기대어 섰다. 팔짱을 끼고 나를 감시하는 게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나는 세면대에 물까지 틀고서 가만히 있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지만 싫은 소리를 하기엔 애정을 녹아 바른 눈빛이었다. 언제 저렇게 뜨거워졌지. 사람이 사람을 눈으로 쓰다듬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듯해서 마음이 아리다는 말이 이런 거였다.

물을 잠그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사조가 팔짱을 풀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나가자는 뜻으로 고개를 바깥으로 돌린 사조에게 나는 젖은 손을 털었다. 물기가 날아가 뺨에 다다닥 붙어도 사조는 찡그리지 않았다.

“물에 빠져 죽을 일 없으니까 나가 있어도 돼.”

사조는 싫다는 뜻으로 다시 팔짱을 끼고 욕실 타일에 기대었다. 누구를 닮았는지 말 안 듣는 벽창호였다.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한 나는 물을 틀고 비누에 거품을 낸 뒤 얼굴을 꼼꼼하게 세안했다. 물수건으로 자주 얼굴을 닦아 주어서 그런지 찜찜한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찬물로 씻어야 머리가 개운해졌다. 목까지 찬물로 닦고서 칫솔에 치약을 묻힌 뒤 치카치카 소리를 낼 때도 사조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입안을 물로 여러 번 헹구고 뒤돌았을 때 나는 깜짝 놀라 세면대를 짚었다. 벽에 있던 사조가 기척 없이 이동해 뒤에 서 있었다.

“자.”

“고마워.”

수건에 얼굴을 폭 묻을 때 사조가 머리통에 입술을 얹고 쪽쪽 소리를 냈다. 때를 가리지 못하고 까부는 그의 입술을 깨물어 주고 싶었다. 내 입술이 부르튼 원흉인 사조는 눈치코치도 모르고 나가자며 손을 당겼다.

다 쓴 수건을 빨래통에 넣고 부엌으로 갔는데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나는 저번에 슈퍼에 가서 사조가 사 온 라면을 기억해 냈다.

“라면 먹고 싶다. 그치, 사조야.”

사조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 손을 놓았다. 그가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는 게 보였다. 나는 사조가 치우지 않은 죽 그릇을 개수대 옆에 올려 두고 행주로 작은 상을 닦았다. 사조는 라면을 처음 끓여 보는지 사용 설명서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삐딱하게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서서 책을 읽는 것처럼 라면 끓이는 방법을 읽고 있는 게 앙증맞았다. 수저를 미리 깔아 두려고 했던 나는 사조의 옆으로 갔다. 물은 끓고 있는데 사조는 아직 라면 봉지도 까지 않은 상태였다. 집중하고 있는 그의 미간이 귀여워서 나는 살며시 허리를 안았다.

“라면 빨리 안 끓이면 상해.”

사조는 흔들림 없는 나의 시선을 보고 당황해했다.

“상한다고?”

“우리 둘이 상한 라면 먹고 배탈 나면 이번엔 누가 간호해. 내가 끓일게.”

사조는 내 말의 진위를 가리려는 것처럼 눈을 굴리다가, 같이 배탈이 나는 건 싫은지 내게 라면 봉지를 넘겼다. 나는 받자마자 봉지를 까고 면을 넣었다. 사조의 표정을 보니 눈이 조금 커졌다. 가스레인지에 키만 닿으면 끓일 수 있는 게 라면이었다. 저 나이 먹고 라면 한번 안 끓여 본 사조가 귀여웠다. 눈을 반짝이며 내 뒤에 선 그가 레시피를 눈으로 훔치고 있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면을 풀며 그에게 말했다.

“하는 거 잘 봐.”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천천히 젓가락을 놀려 면을 풀어낸 냄비에 수프 가루를 넣었다. 매콤한 냄새가 퍼지자 죽만 든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목 뒤편에서 그가 냄새를 맡는 게 느껴졌다. 라면을 어떻게 끓이는지 관심 있다기보단 내 목에서 나는 비누 향을 맡는 듯했다. 라면이 어느 정도 익을 동안 사조는 내 등에 업힌 사람처럼 어깨를 감싸 안은 뒤 조용히 있었다.

“안 먹고 싶어?”

라면이 익어 가스 불을 끈 뒤에도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라면 든 냄비를 들고 협박하자 사조는 나 대신 라면 냄비를 받아 받침 위에 올려 두고 밥상을 번쩍 들었다. 가다가 엎지 말라고 잔소리한 뒤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싱크대에서 손을 간단히 씻고서 나도 부엌을 나갔다. 예상대로 평상에 상을 둔 사조가 내가 앉을 자리에 떨어진 나뭇잎을 손으로 떨어냈다. 그러고는 자기는 내 자리 건너편에 앉는다.

그릇하고 젓가락, 숟가락이 모두 한 사람 것밖에 없었다. 사조는 죽을 끓이다 하도 간을 봐서 입맛이 없다고 했다. 그가 닦아 준 자리에 앉아 라면을 뜨는데 사조가 냄비를 내 쪽으로 가까이 밀어주었다. 호호, 불면서 면을 건져 먹는데 감탄이 흘렀다. 나는 라면 국물을 숟가락에 뜨고 꼬부랑 면을 얹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한 입 먹어 봐.”

사조는 거부하지 않았다. 자기도 궁금했던 모양인지 내가 내민 라면을 빠르게 한 입 뺏어 먹었다. 오물오물 씹은 그의 눈이 한 바퀴 굴러 내게 닿았다. 애늙은이 같은 입맛에도 통과인 눈치였다. 만족스럽게 올라가는 그의 눈썹을 보자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맛있지.”

“먹을 만하다.”

“맛있어서 눈도 이만해지고선.”

라면을 후르릅 먹은 뒤 나를 지켜보고 앉아 있는 사조에게 또 먹고프면 말하라고 했다. 내일은 일어나서 사조하고 카페도 가고 같이 자전거도 타야겠다. 한창 심심했을 그를 떠올리니 가여운 면이 있었다.

“라면 끓이는 거 쉽지. 사용 설명서 그대로 하면 돼. 초등학생도 끓일 수 있어. 글을 읽는 걸 모르는 건 아니잖아.”

“한글을 읽는 건 오랜만이라서.”

“아……. 한글을 읽는 게 오랜만이라고?”

“한자가 나아.”

젓가락에 집힌 라면이 스르르 빠져나가 국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라면 봉지 뒤에 적힌 끓이는 방법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게 한글이 익숙지 않아서였다. 나는 그에게 손바닥을 펼쳐서 보였다.

“여기다가 가나다라마바사, 써 봐.”

장난기 가득해진 얼굴로 돌아온 사조가 제 손바닥을 펼쳤다. 나를 따라 하듯 상 가운데에 손을 두었다. 어림잡아 나의 두 배로 보이는 큰 손이 상의 반을 차지했다. 사조는 상에 엎드린 채로 시원하게 웃었다.

“여기에 네 이름 써 봐.”

“성까지 붙여서?”

“아니. 정인, 그것만.”

손바닥에 이름을 써달라는 요구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천천히 정인, 이라고 적었다. 그는 내가 정인이라고 적자마자 웃음을 진하게 머금었다. 이번엔 내 펴진 손바닥에 그의 손가락이 놀러 왔다. 나는 혹시나 라면이 그에게 쏟아질까 봐 거의 다 먹은 라면을 한쪽으로 치웠다. 상은 그의 상반신이 거의 점령하게 되었다. 그가 천천히 내 손바닥에 무엇을 적었다. 내가 알려준 정인을 적는 게 아니었다. ㅅ, ㅏ, ㄹ, ㅏ……. 적힌 글자를 속으로 따라 읽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완성된 단어가 손바닥에 새겨진 듯 저릿저릿했다. 그 저린 감각은 팔을 타고 올라와 심장에 무리를 줬다. 나는 수줍은 얼굴을 한 그를 바라보았다. 속눈썹 아래에서 사는 갈색 호수는 생기가 가득했다. 사조는 미소를 꺼트리고 내 반응을 살폈다.

“아는 글자가 몇 개 없어서.”

하여간 엄살이 심했다. 한글에 익숙하지 않다 뿐이지 그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글자가 담긴 손바닥을 쥐었다가 폈다. 그 단어가 발이 달려 도망이라도 갈까 봐 주먹을 쥐었다.

사조가 편하게 두 다리를 펴자 평상의 반이 가득 차 비좁아 보였다. 사조의 발이 내 발등을 찔렀다. 내 다리 옆에 나란히 제 다리를 붙여 둔다. 나는 평상 바깥에 두었던 다리 하나를 평상 위에 올려 두다가, 장난을 걸듯이 그의 다리 위에 올려 두었다. 어느덧 우리는 어린애들이 게임을 하는 것처럼 쭉 편 다리를 교차해 둔 상태로 있었다. 그의 다리에 갇혀 있는 내 다리 하나가 평소보다 가느다래 보였다. 사조는 조용한 눈빛으로 내 다리에 손을 댔다. 갑자기 다리 두 개를 모은 사조가 내 종아리에 손바닥을 올렸다. 사조는 책상다리 자세를 하고 앉아 내 종아리를 아프지 않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알이 뭉친 다리를 그가 만지작거리자 부드러운 떡처럼 변해 갔다. 마사지 솜씨가 뛰어난 사조는 돈을 받고 일하는 양 아주 열심히 주물렀다. 그사이 나는 사조를 살펴봤다. 짧게 친 머리가 벌써 바람에 쓸릴 정도로 길었다. 남자들은 머리가 빨리 자라 이발소에 가는 주기가 여자보다 짧다고 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처럼 쓰러지는 그의 머리칼을 보며 나는 여름이 어느덧 절정에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늦봄이 막 끝날 즈음에 들어왔는데 시간은 우리의 눈을 속이고 빠르게 가버렸다. 이 절정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는 가을이 올 테지. 사조의 손이 조몰락대는 건 다리가 아니라 내 마음일 것이다. 나는 그의 예쁜 이마를 가리려는 머리카락을 슬쩍 넘겼다. 그러자 공들여 다리를 주무르고 있던 그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사조야. 나 어제 꿈꿨다.”

사조는 뜻밖의 소리를 들은 양손이 느려졌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하나, 둘 사그라들고 버석한 눈동자만이 다음으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고작 꿈이라는 단어에 예민해진 그의 목소리가 낮은 울림을 냈다.

“꿈에서 누구라도 본 모양이지.”

“할아버지.”

“뭐라시든.”

“그냥, 잘 지내냐고.”

내가 별말 하지 않았음에도 사조는 꿈을 꾸게 만든 장본인을 찾아가 멱을 따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이래서 꿈 얘기하는 게 싫었나.

“고만 주물러, 이제.”

사조는 종아리는 다 주무른 모양인지 발목으로 옮겨 가 살금살금 힘으로 풀어 주었다.

“참 가느다랗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이걸로 어찌 걸어 다니는지.”

사조는 벼르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종아리부터 발목까지 풀코스로 진행한 자원봉사가 끝이 났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세상에 침범할 수 없어. 그러하니 그것은 네 할아비가 아니라 추억을 되짚은 것이겠지.”

“그렇구나…….”

그때는 정말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사조의 말이 다 믿어지지 않았다. 거짓말 못 하는 사람은 확 티가 났다. 매사 당당하고 거리낄 것 없던 그가 외운 것처럼 웃지 않고 줄줄이 말하는 게 이상했다. 오히려 사조의 말을 들으니 그게 허깨비가 아니고 할아버지일 거란 생각이 견고해졌다.

“그건 언제 풀려고.”

사조는 이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팔찌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행동이 수상했다. 첫날부터 팔찌를 차고 씻느냐며 말을 건넸던 그가 떠올랐다. 그날은 경황이 없어 이상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넘겼다. 팔찌, 팔찌 하니까 어제 대화 일부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뭣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팔찌를 벗으라고 했다. 사조의 행동, 말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의 감정을 재조립하기엔 충분했다. 사조는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다리를 훅 잡아당겼다. 몸이 끌려가고 끌려가 사조의 앞이었다. 사조는 내 다리를 제 허벅지에 걸치고서 양말 벗기는 시늉을 했다.

“왜 답이 없을까. 사람이 아닌데도 불안하네.”

“생각하고 있어.”

사조는 팔목을 훽 잡아서 들어 올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적의를 담아 팔찌를 손톱으로 찌직, 찌직 긁었다. 얼른 확답을 받고 싶은 사람처럼 팔찌를 고문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손에서 거칠게 팔을 빼내었다. 사조는 표정이 없는 내가 불안한 것인지 내 눈과 팔찌를 번갈아 보았다. 그게 얄밉다기보다 안쓰러워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가엽다고 해서 아무런 말이나 막 던지고 약속해 둘 순 없었다.

“그럼 내 질문에 대답해 줄래.”

내가 묻는 말에만 잘 대답해 준다면 그의 의견도 못 들어줄 것은 없었다. 그러나 사조는 아예 제 얼굴을 내 머리칼에 숨겨 버렸다. 가슴을 크게 부풀었다가 꺼트리며 샴푸 향을 맡다 죽을 것처럼 숨을 쉬었다. 나는 사조의 처진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만약 내가 이 팔찌를 없애지 않으면, 그럼 너랑 같이 못 있는 거야?”

“안 그럴 거잖아. 하면 묻는 게 아니지.”

그러더니 사조는 갑자기 제 눈을 가렸다. 입을 벌린 다음 억지 하품하는 소리를 내었다. 사조는 연기를 마치고 나를 떼어놓았다. 그의 품에서 떼어 내어진 나는 이 여름에 한기 같은 것을 느꼈다. 어리고 작을 땐 응석을 받아주다가 몸집이 커지자 유기돼 돌봄 받지 못하는 똥개 같았다. 사조는 평상에서 내려가려는 것처럼 신을 신었다.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기지개를 켠 사조는 여름밤이 날아가 버릴 만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갈 적에 상 치우지 말고 들어가.”

사조가 느린 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쾅, 닫지는 않고 들어갔으니 다행인 걸까. 상을 치우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슬리퍼에 발을 구겨 넣고 상을 들었다. 내가 먹은 것도 치우지 못할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정말로 나약한 것은, 내가 몇 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상처받고 들어가 버린 사조였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 상을 잠시 땅에 두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안쪽에는 열어 준 사람이 없는 것을 보아 이것도 사조의 능력일 터다. 처음에는 입이 떡 벌어지게 신기했는데 이제는 저게 또 힘을 썼구나 하는 걸 보니 나도 적응된 모양이었다. 상을 들고 슬리퍼를 벗기 위해 발목을 요란하게 털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이 층으로 안 가고 계단에서 죽치고 있는 사조가 보였다.

“거기서 뭐 해. 피곤하다면서.”

사조는 불만 많은 얼굴로 앉아서 밥상을 노려보았다. 싸울 것처럼 분위기가 팽팽하기에 밥상을 쾅 내려놓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남에게 눈총을 쏘는 건 못 배운 사람이나 하는 짓이었다. 내가 잘못한 게 무어냐고,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못하면서 팔찌를 벗기려 드는 네가 더 수상한 거 아냐고 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때 밥상이 얼음에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스스로 부엌에 밀려들어 갔다. 제 식대로 밥상을 치운 사조는 삐쳐서 입술을 실룩거렸다.

“말을 상당히 안 듣는구나, 정인이 너는.”

“힘든 일도 아니잖아.”

“삼 분만 여기에 있다가 나가려 했는데. 성격도 급해선.”

두 팔을 벌리는 건 화해하자는 제스처였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이기적인 남자라며 밥상 들고 오는 내내 투덜거린 게 미안했다. 삐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사조는 내가 다가오자 벌린 팔로 허리를 안았다.

“가는데 붙잡지를 않아.”

예전부터 쭉 그래 왔다. 남이 내게 실망하거나 화를 내면 지레 겁을 먹다가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관계를 끝냈다. 그러다가 놓친 인연이 많았다. 나약한 것은 화해를 어떻게 신청해야 할지 모르는 내가 아닐까. 사조의 머리칼 만지면서 골몰히 생각에 빠졌다. 조용히 머리를 내주던 사조는 이김에 섭섭 보따리를 풀어 버렸다.

“잠도 따로 자는 게 낫겠어? 이것도 안 붙잡으려나.”

사조는 여러모로 특별했다. 거기서 잡아야 하는 거였구나, 하며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자꾸 헛물만 켜는 나는 연애를 물로 했나 보다. 나는 무엇이든 닿지 않곤 견딜 수 없었다. 사조의 뺨을 붙잡고 고개를 배슷이 기울이며 숙였다. 때마침 머리끈이 풀어지면서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사조와 입을 맞추며 그의 숨을 마시고 뱉었다. 눈을 뜨는데 계단 위쪽에 낯선 인영이 보였다. 얼굴이 돌아간 여자가 시뻘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빨리 뛸수록 입맞춤은 격렬했다. 헛것, 허깨비, 눈을 뜨지 않고 그 두 단어만 부적처럼 중얼거렸다.

사조의 품은 바다처럼 넓어서 나 하나쯤은 숨겨줄 수 있었다. 눈빛으로 밥상을 부엌에 밀어 넣는 남자가 있는데 무서울 게 있겠냐며 호랑이 등에 탄 여우 노릇을 톡톡히 했다. 사조 품으로 숨는 전략이 먹힌 모양인지 다시 눈을 떴을 땐 계단만 보였다. 사조 덕에 손 안 대고 코를 푼 셈이었다.

그때 사조가 방으로 데려다주겠다며 몸을 안아 들었다. 따로 잘 생각도 없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밤을 따로 보내는 게 무서웠다. 사조의 허리를 껴안고 방으로 들어와 나가지 못하게 문을 닫았다.

“이불을 빨았었나?”

몸을 움직여 생각을 없애려고 했다. 베개와 겹쳐서 갠 이불을 꺼내 턱턱 털어 대자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우리 둘은 하루 종일 같이 있어서 이불을 빨 틈 같은 게 없었다. 불길한 기운이 솔솔 나는 이불을 침대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안 눕게?”

“눕기 싫어.”

그러자 사조는 시범 보이듯이 침대에 앉은 자세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사조의 허벅지 위에 앉아 그를 껴안고 있었다. 얼굴이 조금만 더 두꺼웠으면 이불을 버리자며 어리광 피웠을 것이다. 포옹을 푼 사조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침대에 눕히려 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의 목을 세게 껴안았다. 당황한 웃음이 방에 퍼졌다. 그의 허벅지에 아래를 밀착시키고 있던 나는 금방 사태를 파악했다. 고개를 떼고 다시 바라보니 사조는 천장을 응시 중이었다. 죽기 살기로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저를 쳐다보는 것도 부끄러운지 손으로 꼼지락꼼지락 베갯잇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언제 열어 두었는지 모를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비 냄새가 떠다녔다. 바다가 되고 싶어 자꾸 땅을 찾는 빗방울이 장작불 지피는 소리를 따라 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얘도 사람이든 아니든 남자이고 수컷인데.

다리 사이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서로 눈 둘 곳을 몰랐다. 어색해서 코를 쓱 만지며 안은 손을 풀었다. 사조는 떨어져 나가 제 허벅지에 얌전히 앉아 있는 나를 모른 체했다. 나는 전에 없는 요조숙녀처럼 다리를 모으고 앉아 먼 산을 바라봤다. 십 분이 지났을 즈음 사조는 침을 느리게 삼킨 뒤 해결책을 놓았다.

“입이나 맞추자.”

“흐.”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촌스러운 그의 유혹에 웃음이 터졌다. 사조는 분위기 깨지 말라며 내 뺨을 꼬집었다.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정색한 뒤 그의 부풀어 있는 앞섶을 곁눈으로 보았다. 사조는 내 입술을, 나는 그의 앞섶을. 그의 말대로 입이나 맞추고 싶지만 각자 동상이몽인지라 분위기가 안 잡혔다. 솔직히 나는 남녀 간의 정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입맞춤을, 입맞춤보다는 포옹을 좋아했다. 끝까지 가면 더 이상 그 관계에는 남은 게 없는 느낌이었다. 볼 장 다 봤으니 손을 잡아도 밍숭맹숭해질 테고, 무얼 해도 그 애의 초라한 알몸부터 생각나서 마음이 예전만큼 좋지 않았다. 사조와는 지금도 좋은데, 여기서 더 관계를 나갔다가 이 좋은 것을 망치게 될까 봐. 가지 말라고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에서 얼른 가 버리라고 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 봐.

“나 희롱하니 좋아?”

뜬금없는 말이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이 꺼벙한 여자가 왜 남의 중요 부위를 침 떨어지게 보고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두 손을 공손히 모으자 사조가 나를 침대에 내려 두고 이불로 제 허벅다리를 가렸다. 성큼 옆으로 가서 사조가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사조는 손가락을 까딱여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곤히 자려는 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나는 베개를 가져와 그의 옆자리에 누웠다. 사조는 눈을 감고서도 볼 것은 다 보는 모양인지 누운 내 몸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우리는 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사조가 내 몸 위에 팔을 올렸다. 처음에는 팔만, 그다음엔 몸까지 끌어가고, 그다음엔 오장육부가 터지게 끌어안았다. 코에 땀이 맺혀 팔뚝 위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사조는 내 머리에 제 턱을 놓으며 말했다.

“이제야 좀 잘 맛이 나네.”

눈 떠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냥 좋았다가 마냥 싫었다가 잘잘못을 따지면서 보냈다. 며칠을 앓아누웠다고 들었다. 그 며칠, 내 곁을 하루도 안 빼놓고 간호해 주었을 사조였다. 지금까지 못난 놈들을 만난 것은 사조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게 섣부른 오판일 수 있지만 그는 배경이나 얼굴을 제쳐 두고도 나의 기억 속 유일무이한 남자였다. 섬에 도착해 사조를 만나 슬프고 괴로울 때가 아주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팔찌에 관한 말만 빼면 사조에 대해서는 불만스러운 게 하나 없었다. 이 섬의 산 자든 죽은 자든 견딜 만하지만 할아버지의 꿈 같은 것이 사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경고장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그의 품에 이렇게 밤새 안겨 있으면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와 어쩔 텐가 싶은 마음만 들게 했다. 사조는 그만큼 해롭고 나빴다. 사조가 잠이 안 오는지 머리칼을 실타래처럼 손가락에 둘둘 감았다. 새우잠자느라 구부러진 등으로 들어온 손이 밑가슴을 부드럽게 만지며 건너뛰었다. 내 몸을 닳아 빠지게 만지는 손길에 정염이 묻어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웃기는 송정인. 여태껏 사랑 한 번 받으려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줬으면서 왜 사조에게는 이렇게 비싼 척을 할까.

“잠들었지?”

목소리에 들어 있는 아쉬움은 그의 손에서도 나타났다. 유난히 내 등을 쓰다듬는 손이 속옷이 걸리는 부분에서 멈칫멈칫했다.

그의 가운뎃손가락이 속옷 후크에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문대기를 한참. 잠든 척을 끝내고 그의 팔뚝에 입을 맞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사조는 내 등을 횡보하던 손을 빼내었다. 허리에 감았던 손을 풀고서 밀려나듯이 그의 배가 있는 쪽으로 손을 떨어트렸다. 사조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결심을 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제일 좋아하는 사람, 이 정도면 나를 조금 아프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이 드는 사람. 그러니 사조에게 모질게 굴어서 어쩌려고, 아껴서 누구 주려고 그러나. 긴장한 사조는 손이 그의 배로 떨어질 때부터 전신에 힘을 넣었다. 반면 눈과 입은 웃고 있었다. 마음먹은 나조차 망설일 만큼, 그의 두 눈엔 괴이한 빛이 번들거렸다.

“안 자고 있었네.”

“하나, 하나만 물어보고 싶어.”

그냥 말하면 될 것을 일부러 그에게 말하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 괜히 이 말을 붙이고, 저 말을 붙였다. 사조는 너그러이 미소 띤 얼굴로 내 말을 기다렸다. 제 팔을 베고 누운 사조는 기다림이 기꺼운 것처럼 팔뚝에 얼굴을 비비적, 비비적거리며 무언갈 참는 듯했다.

“보고 별로여도, 하고 별로여도, 별로라고 말하지 않기.”

그런 쪽으로는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 자신이 없었다. 하기 전까지 눈빛이 반짝반짝하던 남자들이 잠자리 후부턴 하나같이 성의가 없어지고 말이 없어지는 걸로 봐선 내가 못 해도 조금 못하는 게 아닌 눈치였다. 사조는 그 말을 듣고도 히죽 웃었다. 갑자기 윗몸 일으키기 하는 자세로 상반신을 세웠다. 불을 켜기 위해 그러는 걸까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사조의 상반신은 점점 아래로 갔다. 그의 입술이 가슴을 지날 때는 나도 몰래 숨을 참았고, 그의 입술이 배꼽 근처를 지날 때는 무서웠고, 그의 몸이 이불 속으로 사라진 뒤에는 짧은 반바지 길이가 걱정됐다. 그나마 비가 와서, 불을 끄고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불 꺼진 전등에 위안 삼으며 손가락을 물고 있을 때 반바지가 훅,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끌려 내려간 바지가 발목을 빠져나갔다. 나는 일단 이불에서 나오라며 그를 찾았다. 그런데 이불을 살짝 들추어 봐도 사조의 얼굴은 내 다리 사이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워하고 있을 때 사조가 다리 사이에 입술을 박았다.

“읏.”

속옷도 벗기지 않고선 망측한 일부터 저질렀다. 이게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맞나 불안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조는 속옷에 몰두한 사람처럼 빨기 시작했다. 후릅, 하는 면이 젖어 들어가는 소리가 내게 참신한 수치스러움을 안겼다. 사조의 혀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속옷을 실컷 빨고 난 사조는 그 가운데 부분만 핥고 또 핥았다. 젖은 속옷이 착 붙은 음부를 한입에 삼켜 빨 때는 나도 모르게 이불을 걷어 그의 머리를 밀쳤다.

“음, 아…….”

부끄럽고 생소한 마음에 거부하자 그의 손가락이 속옷 사이로 들어왔다. 그의 양 검지가 내 속옷에 끼워져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사조의 손가락에 잡혀간 속옷은 허벅지 아래로 내려갔다. 속옷이 벗겨 내진 자리에는 뜨거운 시선이 고였다.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이글거리는 시선에 아래가 익었다. 그때 이불로 어깨를 덮고 있던 사조가 벗겨 낸 속옷을 갖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그의 혀가 밑에 닿았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데, 내 분홍색 속옷을 들고 있는 사조를 보는 건 상당한 정신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마음이 널을 뛰면서 정말 이래도 되는 거냐고 묻고 있는 차에 그보다 더한 것을 보았다. 사조의 빨간 혀가 분홍 속옷의 안쪽을 핥았다. 음부를 가려주는 가장 중요한 부위에 그의 혀가 닿았다. 사조는 나와 눈을 떼지 않고서 그 짓을 당당하게도 했다. 아까 내 브래지어 끈을 조심스레 매만지던 남자와 다른 남자 같았다. 긴 혀가 분홍색 속옷에 영역 표시라도 하는 양, 젖어 가는 걸 똑똑히 보도록 시망스럽게 핥았다. 이내 만족할 만큼 속옷을 핥은 사조가 허리를 굽혔다. 벗긴 속옷을 던지지 않고 가져오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침대 위쪽으로 슬금슬금 올라갔지만 사조에게 종아리를 잡혔다. 그에게 끌려 내려가 당한 일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너…….”

사조는 내게 다시 속옷을 입혀 주려 했다. ‘너 변태야?’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으나 이 분위기상 한 마디라도 잘못 얹었다간 사달이 날 것만 같았다. 힘들이지 않게 손으로 둔부를 들어주며 제가 물고 빤 속옷을 다시 입혔다. 물에 담갔다 뺀 느낌의 속옷을 입느니 벗는 게 낫다 싶을 때, 사조의 얼굴이 다리 사이로 돌아갔다.

쭈읍, 쭈읍, 핥는 소리는 면과 부드러운 아랫살이 함께 잡혀가는 소리였다. 고개까지 꺾으며 맛있게 핥는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다. 빗소리가 바람을 동원하여 야단법석인 탓에 이건 꿈일 거라고 도피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제가 잔뜩 핥은 속옷을 입힌 뒤 그곳에 혀를 뭉갰다.

“흣, 아, 아으…….”

민망한 점은 갈수록 그의 혀만이 속옷을 적시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그의 살갑고 매끄러운 혀와 여리고 여린 아랫살이 만나는 중간을 면 소재의 속옷이 막고 있었다. 속옷에 물 자국이 날 정도로 젖는 게 과연 그가 빨고 있기 때문일까. 저 혼자 독박 쓸 일이 아니라는 건 사조도 눈치를 채는 것 같았다. 그의 혀가 슬슬 다른 곳을 넘보았다. 그는 젖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든 속옷 위에 입맞춤을 했다. 짧고 간결한 입맞춤이었다. 나의 무릎이 방어하듯 모아진 순간 그의 무람한 손길에 속옷이 또 내려갔다.

“이제, 우리 다른 거 하자.”

“응?”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낫겠다는 말이었지만 사조는 다르게 해석했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속옷을 빠르게 벗겼다.

“엿기름 달이는 냄새가 난다.”

물기가 묻어나는 속옷을 빼앗자마자 나타난 음부는 내 뺨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한 번도, 누구도 나와 밤을 보낼 때 엿기름 냄새가 난다는 둥 하며 수치심을 자극한 적이 없었다. 눈이 돈 사조는 반가운 미소로 내 음부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쪽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 나가는 입술이 전보다 뜨거웠다. 그의 입술을 막아 주는 천 쪼가리가 없었다. 부담스럽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조의 입술이 움찔거릴 때면 예민한 음부는 그 모든 동작을 반영하듯 촉촉하게 울었다. 내가 예민스러운 게 아니라 저 남자가 야한 것이었다. 사조는 입을 벌려 혀를 내보냈다. 장대 같은 혀가 음부의 살을 가르고 추웁, 소리를 낼 때마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 느낌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까 속옷으로 가리고 있을 때보다 더욱 신중히 나의 아래를 핥았다. 사조의 혀가 갈수록 노골적이고 못돼지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손가락까지 사용해 음부를 벌려보고, 그 안에 내벽을 훑기 위해 혀를 넣는다. 비로소 나는 사조의 음험한 행동이 피에 도는 본능이란 걸 알았다.

“하, 읏!”

혀를 단순히 넣는 게 아니다. 제가 손으로 벌려서 안을 확인한 뒤 날름날름 핥는 게 문제였다. 그의 엄지는 선을 넘어서 그 위에 있는 작은 살점까지 부드럽게 문질렀다. 사조의 입가가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젖어 가고 있었다. 어쩔 때는 그의 입이 닿을 때마다 음부가 흘린 물을 일부러 묻힌다는 의심까지 들었다. 입술을 가져다 대고 후르릅, 마시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의 혀가 노골적으로 한곳을 파내듯이 혀를 굴리는 느낌이 들 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 밤 빗소리와 어우러진 그의 모습이 내 눈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달빛을 받아 하얀 넓적다리, 그리고 눈길을 주자 더욱 혀를 길게 빼는 그의 모습이 상종 못 할 사기꾼 같았다. 그는 다리 사이에서 눈웃음을 그리며 음부에 넣은 혀를 깊게 넣더니 아이스크림 파먹듯이 그 안쪽을 핥고 있었다. 조급해지는 느낌은 나만 드는 모양이다. 사조가 엄지로 누르던 작은 살점을 주책맞게 양방향으로 비볐다.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 으아, 하지, 마.”

사조는 하지 말라는 말에 반대로 하는 걸 좋아했다. 혀를 넣은 걸로도 모자라서 놀고 있는 다른 쪽의 손을 가져왔다. 와중에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분석하는 사이에 손이 들어왔다. 혀보다 더 딱딱하고 거북한 것이 음부 안에 들어온 순간, 최후의 수단으로 허벅지를 붙였다. 그래 봤자 나의 허벅지 가장 가까운 곳에는 그의 얼굴이, 몸이 있었다. 아무리 모으고 오므려도 사조에게 가로막혀 체력이 빠질 즈음엔 무릎을 세운 자세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 으…….”

손가락 하나가 여물은 음부의 살을 헤집으며 들어왔다. 알 길이 없으나 보통 손가락이 거기까지 들어오는 것인가. 삼엄한 밀림을 헤쳐 가듯이 나의 내벽을 건드리며 들어왔다. 초면인 손가락의 행패에 눈물이 났다. 무섭고,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나는 것이면 차라리 좋을 것이다. 기분이 좋았다. 무서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의 손가락이 제집 마당인 듯 염치없게 굴수록 음부가 달아오르는 속도도 빨라져 갔다.

“응, 아으…….”

하지 말라던 나의 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취를 감추었다. 무리 없이 손가락 하나를 더 넣은 사조가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아랫살을 눌렀다. 사조의 혀만큼이나 막무가내인 손가락은 자기가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을지를 가늠해 보고 쑥 빠졌다. 그 사이 손 지문이 남을 만큼 만져 대는 나의 작은 살점이 바람에 스치기만 해도 우는 것을 아나 모르겠다. 차라리 음부나 아랫살을 빨면 빨았지, 고 작은 음핵을 괴롭히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엄지로 음핵을 문질문질하고 있는 사조에게 빌다시피 말했다.

“응, 그만…….”

그러자 사조는 돈을 세는 것처럼 제 엄지를 한 번 빨은 뒤 부은 음핵 위를 내리눌렀다. 아까보다 더 독하게, 더 빠르게 문지르는 그의 손길에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멍한 눈길로 바라보자 사조는 혀를 내밀어 음핵 위로 가져갔다. 쭈욱, 빨아들이며 입을 사용했다. 동시에 손가락 두 개가 아랫살에 푹 박혔다.

“흐!”

나는 늪에 빠진 발을 빼려는 것처럼 사조의 머리를 밀었다. 그의 웃음에서 퍼진 진동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이건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으나 사조의 혀는 작디작은 그것을 어찌나 괴롭히듯 빠는지 정신이 혼미했다. 추읍, 소리에 둔부를 조였다. 그의 손가락은 아랫살에서 물을 퍼가듯이 휘어졌다.

“아, 으, 아!”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은 이미 배경음같이 무색해졌다. 사조는 음핵과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음부를 오가며 입을 맞췄다. 손가락을 넣은 곳에서 물을 퍼내고, 혀로는 작정 없이 가져다 댄 뒤 받아마셨다. 사조는 음부가 갈라진 틈 말고도 오므라진 데에 관심을 가졌다. 혀가 빨대처럼 변해 쭉 빨아 마셨다. 때가 된 듯 손가락을 빼고 혀를 집어넣었을 때 나는 허리를 높이 들었다.

“으아, 읏!”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사조의 뺨을 만졌다가, 귀를 만졌다가, 기어코 그의 머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다리에 힘을 주고 말았다. 내 음부에 처박히고 만 사조는 주르륵 흐르는 물을 게걸스럽게 핥아먹었다. 아래로 무엇을 싸는 느낌은 처음이라서 눈물이 흘렀다. 그가 떨고 있는 음부에 혀를 박아 넣고 핥는 느낌이 끔찍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를 저리 가라며 밀치지 못했다. 몸이 달라진 것처럼 그의 손이 가슴 언덕만 스쳐도 비명 같은 신음이 나왔다. 감각이 폭죽 같이 터지는 전율은 몸에 맴돌았다. 사조는 그 여운이 남도는 시간까지 아까워 죽으려고 했다.

“사조…….”

사조의 손이 발목이 움켰다. 음부에 붙어서 나오지를 않던 사조는 잡은 발목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여운이 남아 오므라지지 않은 음부가 그의 눈앞에 버젓이 드러나고 말았다. 사조는 비난이건 애원이건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딴청 피우며 씩 웃는 사조가 손가락 세 개로 음부를 살짝 들춰보았다. 구멍을 가로막고 있는 아랫살을 검지로 살짝 치워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흐르고 있는 음부에 시선을 꽂았다.

“뭐 해…….”

“닦아 주려고.”

사조는 수건처럼 쓰라며 제 혀로 음부를 쓰윽 닦았다. 물을 막으려고 핥아 보았자 음부는 금세 다시 촉촉해졌다. 혀로 위아래를 오가며 음부에 진득하니 붙어 흡입했다. 양이 넘치는지 입가에 흐르기까지 했다. 발목을 들어 젖은 음부를 적나라하게 보인 사조가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나는 쉬지 않고 헛소리하는 사조에게 그만하자고 좋게 이야기했다.

“아까워 그래, 아까워서.”

“흐, 아깝, 다니?”

사조의 입은 바쁜 관계로 대답은 손이 했다. 굵직한 손가락 세 개가 찌르고 들어와 내벽을 휘고 돌았다. 음부를 희롱하던 그가 손가락을 빼자 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물방울 수준이 아니었다. 웃음기 없이 그걸 지켜보던 사조가 제 젖은 손가락을 혀로 남김없이 핥았다. 그것도 모자라 음부에 흐르는 물을 다 뺏을 기세로 한 모금, 한 모금을 신중히 마셨다. 끝이 오는 게 싫어 몸부림을 쳐도 이미 그의 손에 잡힌 발목은 빼낼 방법이 없었다. 이건 그의 코앞에 음부를 가져다 바치는 꼴이었다.

“흐, 아으, 흣.”

“하하, 좋아서 흔들기는.”

그의 입술을 피해서 그나마 자유로운 상체를 움직일 때마다 사조의 입술에 아랫살이 쓸렸다. 사조는 요령을 피웠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스스로 움직여 그의 입술에 물을 발라 주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정신이 나가 뒤늦게 알아차렸다. 사조가 메롱 하듯 혀를 대고만 있었다. 사조는 음부가 다가오면 혀를 집어넣어 내벽까지 쓱 핥고, 그게 아니면 가만히 입술만 대면서 울고 있는 아랫살을 자극했다.

“힘들, 힘들어.”

사조의 꾀에 넘어간 내가 항복하듯 힘을 뺐다. 그제야 사조는 발목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어찌나 세게 잡고 있었던지 그가 놓아준 발목에 손자국이라도 난 듯싶었다.

몇십 분째 애무만 당하자 울음이 가뭄처럼 말랐다. 축 늘어져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려고 돌아누웠다. 사조가 내 등 뒤로 와 눕는 게 느껴졌다. 끝내려면 빨리 끝낼 것이지, 이렇게 혼을 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그의 입술에 음부를 가져다 대고 허리를 흔들던 장면이 떠올라 혀를 깨물었다.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했는데 뼈가 삭는 기분이었다. 사조의 손이 불쑥 돌아누운 내 허리에 감겼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자는 건가 싶은 찰나에 사조의 손이 가슴에 포개졌다. 평상 위에서 종아리를 주무르는 것처럼 그가 가슴을 주물렀다. 검지로는 튀어나온 유두를 꾹 누른 다음 빙빙 돌렸다. 그 상냥한 애무도 반복되고 반복되니 아래에 물이 고였다.

호흡이 무너져 가는 것을 느꼈는지 사조가 내 허리를 자기 쪽으로 쓰으윽 끌어갔다. 둔부는 끌려가다가 그의 앞섶과 부딪히고 말았다. 맨들맨들한 무언가가 내 둔부 사이에 쑤욱 끼고 말았다. 크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에 기겁할 때 날갯죽지에 따듯한 입술이 닿았다.

“아, 커, 잠……. 읏!”

시작은 성기의 대가리를 아랫살에 대고 비비적, 비비적 들어올 준비를 하듯이 물 묻히는 것이었다. 뭉툭한 머리로 오므라진 아랫살을 벌려 넣고 들어왔다가 뒤로 빼는 작업을 하는 데 그의 흑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성기를 문지르는 것이 아니라 손목이나 다른 것을 댄 줄 알았다. 그러나 손 두 개가 각자 다른 자리에 있었다. 하나는 내 허리에, 하나는 내 가슴에 얹어져 있었다. 그가 유두를 꼬집듯이 잡아당기고 빙빙 돌리고를 반복하는 차였다. 고개를 훽 돌려 제대로 그를 보았다. 지금 삽입을 시작하면 죽도 밥도 안 됐다. 시간은 늦었고 체력은 다 썼다.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벌린 입에서 앓는 소리로 허덕였다.

“응, 아으!”

첫 경험을 했을 때도 이렇게 생생하고 부담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눈이 크게 뜨고 턱이 빠진 것처럼 다물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조가 만족한 듯 웃으며 허리를 퉁겼다. 아래가 빠질 것 같아 고개를 젓고 허리에 두른 손을 때렸다. 그러나 사조는 붉어진 눈두덩 위에 입을 맞춘 뒤 한 번 더 허리를 강하게 퉁길 뿐이었다.

“아, 윽!”

내벽을 채우는 느낌이 들어서 각오하고 숨을 내쉬면 무엇을 할까. 아직 더 들어올 게 남았다는 듯이 자리도 없는 곳에 밀고 들어왔다. 손가락보다 굵은 것이 들어와 축축 물을 흘리던 음부도 당황한 것처럼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가슴을 부드럽게 만지던 사조가 손을 올려 내 턱을 쥐었다. 그대로 턱을 돌려 제 입을 받아들이도록 뼈를 눌렀다. 입이 악 벌어지자마자 사조의 혀가 들어왔다. 불 꺼진 사이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그전에 다정한 키스는 꿈에서 했나 보다. 아래는 빈자리가 없는 데도 묵직한 것을 넣는다고 물로 적셨다. 다 들어왔나. 아직도 더? 이대로 기절하고 싶을 즈음에 사조의 성기가 억세게 처박혔다.

“읍!”

똑, 똑 물이 흐르던 음부를 제 성기로 틀어막았다. 담을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담은 느낌이었다. 그에게 입을 잡아먹히고 아래도 잡아먹히게 됐다. 더 받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 즈음에 사조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턱을 쥔 그의 손을 뜯어내려고 안간힘을 쓰자, 딱해 보였는지 그가 입맞춤 한 번에 놓아주었다. 푸아, 하면서 숨을 깊숙이 들이마실 때 그가 허리를 쳐올렸다.

“으, 흣!”

“왜 이리 흘려, 아깝게.”

턱에 흐르는 침을 비위 좋게 핥고는 혀를 입안으로 넣어 돌렸다. 쉬고 있던 나의 혀는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어 그가 하자는 대로 내주었다. 힘이 부족해 그의 혀에 맥을 못 추고 당했다. 아래는 더욱 상황이 처참하였다. 아랫살에 볼 일이 많은 그 성기는 다 빠져나오지도 않고서 다시 들어가는 악취미를 가졌다. 그리 큰 것이 안을 들쑤시고 푹푹 저으니 내벽이 울고 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사조는 그나 나나 똑같이 음란스럽다며 미운 웃음을 흘렸다.

“그래, 양껏, 하, 먹어 봐…….”

“으, 아, 아으!”

“또, 줄까. 정인아. 응?”

“아, 응!”

“정인이, 또……. 읏, 먹자. 또 줄게.”

내 뺨을 잡아 눌러서 입 맞추기를 시도했다. 어김없이 잡힌 얼굴은 이제 의지가 없어졌다. 그에게서 빠져나가리란 다짐 같은 것은 혼몽한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아래를 버르집는 그를 어떻게 할 줄 모르고 흔들리는 중이었다. 사조는 입을 맞추다가도 아래가 시원치 않으면 입을 떼고서 허릿짓에 온 힘을 실었다. 그가 열을 다해 푹, 푹, 푹 성기를 반쯤 빼었다가 넣으면 그 틈을 비집고 차마 막지 못한 물이 흘러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사조는 그것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아깝다며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우는 목소리에 흥분이라도 하는 건지, 더는 입맞춤으로 입을 막지 않고 알아서 살게 두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인데 곱다, 예쁘다, 말만 잘하면 껌뻑 죽을 줄 아나 보다. 흔들리고, 박히고, 그러다가 아래가 저리는 느낌에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잡았다. 전신이 울렁거렸다. 이동도 부담스러운 크기의 것이 가려운 데를 긁는 양 살이 아릴 때까지 찍어눌렀다.

소변이 마려운 것처럼 다리를 엑스자로 교차했다. 발로 그의 말뚝 같은 허벅지를 긁었다. 생리적으로 갈쌍갈쌍 고인 눈물이 가슴골로 떨어졌다. 무식하게 처박는 방향이 달라졌다. 꾹, 꾹 누르는 솜씨로 내벽을 후려친 뒤 끝에 다다르는 데까지 한 번에 치고 올라왔다.

“아! 아, 아읏, 싫!”

사방으로 물을 흘리면서 다리를 떨었다. 악, 소리를 내고 뒤로 자빠져 손을 맥없이 떨어트렸다. 무릎은 내 말을 듣지 않고 혼자서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빗소리를 꺼 달라는 말을 할 정도로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었다. 마라톤이라도 한 것만 같이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직 빼지 않은 사조가 다 쉬었냐고 물었다. 손쉽게 끌려간 나는 사조의 두꺼운 팔에 안겨 울먹거렸다.

“왜 아직, 안 했어…….”

사조는 여기도 쪽 하고 저기도 쪽 하느라 바빴다. 발음이 어눌해진 채로 쉬지 않고 웅얼거리자 사조가 낄낄거렸다.

“뭐라는 거지?”

“왜 넌 아직……. 안 했냐구.”

말끝이 땅으로 꺼져가는데도 사조는 알아들은 것처럼 제 아래를 봤다. 곧 사정할 것처럼 부풀었지만 사조의 얼굴엔 급한 기색이 없었다.

“아…….”

푹, 푹,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어지러이 찍어 대던 아까와 다르게 박아 둔 것을 요염히 돌렸다. 내벽을 찬찬히 맛보는 것처럼 내 허벅지 하나를 잡고 다리를 쫙 벌리게 만든 뒤 제 허리만을 쓰는 중이었다. 이만하면 끝이 나는 줄 알았던 사조의 허리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사조는 얼이 빠진 내 뺨에 입술을 박아 두고선 말했다.

“음, 달다, 달어.”

“뭐 하는……. 끝이, 응, 아니었어?”

“가당찮은 소리는 재미로 하는 것이지?”

하아, 사조의 만족스러운 신음이 빗소리보다 컸다. 그때 사조의 몸이 내 위로 올라탔다. 쓰윽, 성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소스라치게 싫었다. 사조는 제 미끈한 성기가 밖에 나와 있는 꼴을 못 봤다. 번드러운 속살에 넣어 두려고 성급히 쳐들어왔다.

“흐윽…….”

“너도 달다고, 해야지, 아…….”

고개를 젓자 사조가 내 뺨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쪽, 쪽, 쪽, 수시로 내 얼굴에 닿는 입술이 정신을 앗아 가는 데에 일조하고 있었다. 눈물로 호소하는 것은 먹히지 않는다. 나는 사조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언제든 그를 밀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몸이 밀릴 정도로 아랫살을 짓이기며 들어오는 성기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음부는 선을 한 번 넘으니 못할 것도 없다는 듯 그 큰 것을 꾸역꾸역 받아먹고 있었다. 심지어 달다는 그의 말처럼 아래가 달고 있었다. 달구어지고, 달아올라 내 사지와 머리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살 섞는 소리가 빗소리하고 섞여 구분이 가지 않았다.

더 버티다간 정신이 나갈 것 같아 침대 프레임을 잡고서 울부짖었다. 사조가 들이받을 기세로 아래에서 쳐올리기 시작했다. 푹, 푹 찌르는 힘이 그간 참아 왔다는 게 용할 정도로 매서웠다. 박아 넣는다는 말도 점잖게 느껴질 만큼 그는 억지로 쑤셔서 쿵쿵 찧고 있었다. 내벽이 항복의 의미로 물을 보내도 그는 만족이란 없는 듯 허리를 잡아채 올려 치받는 데에 거슬리는 것이 없게 했다. 버티고 버티던 정신이 끊긴 것도 그즈음이었다. 프레임을 놓쳤다. 그의 어깨에 손톱을 넣고 주욱 긁었다. 절정을 보면 머리가 하얘진다는 말이 과장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조가 쿵, 찧은 다음 허리를 얄밉게 돌렸을 때 내 턱을 타고 흐르는 게 눈물인지 침인지 관심 안 갈 정도였다.

여기가 어디라는 것도, 지금 나를 안고 있는 게 사조라는 것도 인식 못 할 만큼 넋이 나가 그의 어깨만 공기 쥔 주먹으로 때렸다. 사조의 몸이 내 위로 풀썩 쓰러졌다. 푹, 푹, 아까보다는 천천히 느끼며 들어오는 그가 긴 숨을 내뱉었다.

“하으…….”

사조는 느려 터지게 성기를 흔들어 음부 안에 하얀 씨물을 싸 댔다. 그를 책망할 기운도 정신도 없었다. 사조는 마지막까지 빼먹겠다는 듯이 입을 맞췄다. 혀끼리 섞이고 눈물까지 나누어 마시는 통에 마지막 말을 전할 기력마저 상납하고 말았다.

“아니야, 사조야…….”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기절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사실 이것은 기절이라기보다 잠에 빠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눈물샘이 마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배가 고팠다. 쉬어 빠진 목을 주무르며 라면이 먹고 싶단 생각이나 했다.

내가 만만히 봤다.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조의 말을 유념해서 들었어야 했다. 다시 나를 추어올려 안는 그의 팔을 보고 나는 이 섬에서 아마 가장 위험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닌 사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조는 자꾸 달다고 말했다. 무엇이 그리 달까. 단 것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잠자리하다가 입맛까지 바뀐 모양이다.

피부는 푸석해지고 눈이 푹 꺼졌다. 화색이 도는 사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나는 까물까물 잠에 빠져들었다. 아주 비겁하고,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다.

༺♥༻

섬에서는 장마가 지나고도 비가 많이 오는 탓에 여름을 여름답게 즐길 여유가 없었다. 만일 이곳이 관광지였고 사람이 해마다 바글대는 곳이었다면, 관광객들은 손가락만 빨다가 여름휴가를 망쳤을 터였다. 이곳에 와서 날짜 세는 것을 포기한 나도 이맘때쯤이면 해가 쨍쨍하게 떠올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사조가 카페고 짜장면 가게고 여러 곳을 만들어 두었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그런 것들은 죄 즐길 수가 없게 된다. 종종 즐기던 산책도 요원하고 말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집에 있다는 게 결국 이런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흑, 아으…….”

벽지를 잡아 뜯을 기세로 손톱을 벽에 박아 넣었으나 별다른 소득을 내지 못하고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4평 남짓한 방 안의 공기가 탁해졌다. 사조와 침대를 두고 바닥에서 이러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인지 세기가 무서워 어제부터일 거라고 나 자신을 속였다. 짐승처럼 밥만 먹고 아래를 접붙였다. 그저께도 눈을 뜨자마자 가슴을 옹골차게 빨아대는 통에 잠이 다 달아나 그때부터 일을 치렀다. 오늘은 밖으로 나가서 바람을 쐬려고 했더니 웬걸, 사조의 마음과 찰떡궁합인 비가 왔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이미 사조의 앞섶은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우리 둘의 첫 시작을 비 오는 날에 치루어서 그러한가. 사조는 비가 오면 유난히 기대하는 눈치로 달라붙었다. 혹시 스킨십의 끝을 본 후에 서로 질리면 어떡하냐는 나의 생각은 아주 우스운 호들갑이 돼버리고 말았다. 백일 간 마늘만 먹은 곰보다 지독하게 인내하더니 결국 이러기 위해서였나 싶었다. 수컷, 암컷 같은 말을 사람에게 쓰고 싶진 않지만 사조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발정 난 수컷밖에 없었다.

방금도 빗소리가 듣고 싶어 창문을 열어 두고 바닥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었을 뿐이었다. 산책을 끝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사조는 씻은 뒤로 깜깜무소식이기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건가 싶어 부르지 않았다.

샤워하고 들어와 빨래를 개고 있는데 방문이 열렸다. 놀러 온 사조는 씻고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엔 젤을 발랐다. 잘 보이겠다고 꾸미고 온 사조가 보기에 예뻐서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눈이 돌아 달려들어 나를 엎드리게 만든 것부터 화근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때려도 떼어지지 않는 지독한 입술이 음부에 달라붙어 혀를 두세 바퀴 돌리듯이 핥았다. 정사에 길든 몸이 허물어질 때를 기다린 사조가 뒤에서부터 성기를 욱여넣기 시작한 것이었다. 초반에만 빡빡했다뿐이지 금세 매끄럽게 들어가는 성기를 보고 천생연분이라며 웃었다. 그때부터 벌써 나는 기억이 흐릿했다.

“으, 윽, 응!”

잡을 데가 없어서 벽지를 긁거나 바닥을 움켰다. 엎드려 그를 받는데 사조가 쿵, 찧듯이 넣는 바람에 상체가 무너졌다. 둔부만 위로 들고 앞이 무너지자 오히려 사조는 기회라는 것처럼 허리를 가져다 붙이기 시작했다. 탁탁, 알고 싶지 않은 남성의 신체 부위가 내 뒷 허벅지에 때리듯 부딪쳤다. 실개울처럼 흘러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가 보였다. 사조의 성기는 심지어 한 번 사정을 한 후였다. 떨어지는 물속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섞인 듯 보일 때마다 눈에서 천불이 났다.

“흐, 아으, 읏!”

“하, 정인아…….”

“응, 으, 아아!”

또 오고 말았다. 허리가 저릿해져 뒤로 꺾어 넘어갔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얼얼했다. 자연스레 눈물이 고여 턱 끝을 향해 빠르게 떨어졌다. 사조는 절정을 느끼는지 허리를 빠르게 흔들며 음부에 씨물을 넣으려고 안달을 했다. 그러는 새에 뚝, 뚝, 장판으로 떨어지는 물은 그 색이 진해지고 있었다. 안에 미리 싸 둔 것도 함께 끌려 나와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양새였다. 사조의 허릿짓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느려졌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허리를 앞으로 당겼다. 성기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곧장 뒤로 돌았다. 아래를 수습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까부라져 있었다.

사조의 것은 사정을 한 후에도 그 위용이 대단했다. 한 손으로 제 것을 잡고 살살 흔드는 것으로 보아 한 번 더 애걸하다가 아랫살을 가를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얀 씨물이 한 가닥 그의 성기에 남아 흘렀다. 바닥에는 내가 흘린 것들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이럴 바엔 비를 맞으며 평상에 누워 있는 게 나았다.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잠든 척을 했다.

“정인이, 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코를 골았다. 머리를 꺼덕거리며 졸고 있을 때 손이 바닥을 짚는 소리가 났다. 불안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배꼽을 덮을 정도로 딱딱하게 선 사조의 것이 보였다. 성기가 수습도 되지 않은 채로 흰 액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자는데 왜 자는 척을 했어.”

“나는 몰라…….”

“다리 다 풀려 놓고 모르기는.”

한창때의 사춘기 소년처럼 정사에 눈을 뜬 사조는 들어도 못 들은 척하기 선수였다. 사조는 자신의 아래를 수습하듯이 부스럭거렸다. 이윽고 고개를 돌린 내 턱을 잡아 자기 쪽을 보도록 했다. 바지 속으로 사라져 그의 흉측한 성기가 더는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갈색 눈에는 풀지 못한 음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일도 비가 올까.”

사조가 허벅지를 안은 뒤 속옷과 바지를 차례대로 입혀 주었다. 그래도 이 남자가 양심은 있는 것인가 싶었는데 바지를 다 입힌 다음 하는 행동이 가관이었다. 제 씨물을 빼내지도 않은 음부를 바지 위에서 손가락으로 굴리며 자극시켰다. 커다란 성기가 드나들고 씨물까지 받아 낸 안타까운 그곳을 말이다. 바지까지 입혀 놓은 것은 새로운 그의 유희였다. 다음 날이면 입혀 놓고 장난질을 한 속옷은 어디에 꿍쳐 놓는지 당최 보이질 않았다.

“하지, 마…….”

“알았어, 알았어.”

내가 성질을 내며 눈물까지 보이자 손을 뗐지만 물러나는 손에서 미련이 새어 나왔다. 정체 모를 것이 묻은 손을 제 입에 넣었다 뺀다. 바지를 갤 힘도 남지 않은 나는 비슬비슬 걸어가 방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사조가 같이 일어났다. 나는 사조에게 앉아 있으라는 신호를 보낸 뒤 방문을 열었다. 습기와 더운 공기, 내게 목매는 수컷의 향이 옴팡져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복도만 나와도 숨통이 뚫렸다. 현관문을 열어 두고 자연에서 부는 바람을 쐬고 싶었다.

“씻으려고?”

“응.”

불안함을 감추고 그리 대답하자마자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공주님 안듯이 나를 안은 사조를 보며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천국으로 가는 입구 앞에서 총살당한 기분이었다. 사조가 좋았다. 사조가 좋은데, 요즘은 개인주의 시대이니 거리 두는 시간을 의무적으로 넣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막말로 신혼부부도 우리보단 덜 할 거다. 몸의 대화 말고는 이야기할 시간이 부족해서 전에 무슨 문제로 고민했는지 잊고 살았다. 그야 당연했다. 사조가 옆에 있으면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가 힘들었다. 하다못해 씻는 일에도 자유가 없었다. 사조는 바닥에 먼지가 많다며 나를 이렇게 제 품에 안아서 다녔다.

빗물 냄새 나는 욕실로 들어오자 눈에 습기가 찼다. 사조는 나를 욕실 한가운데에 조심조심 앉혀 두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커다란 나무통 같은 욕조가 그의 바람만큼 빨리 채워지지 않는지 물을 틀어 두고 내 쪽으로 왔다. 벽에 기대서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내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계속 건드려도 내가 반응이 없자, 사조가 내 뺨을 이로 앙 물었다.

“음, 달고 맛나다.”

“저리 좀 가…….”

“씻기고 저녁도 해 줘야지. 가긴 어디를 가라고 그래.”

사조가 저녁 한다는 말을 듣자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그의 요리는 새로운 맛의 지평을 열었다. 콩나물국에서 초코 우유 맛이 나는 비결은 어디 가서도 못 얻을 거다. 그가 어디서 무얼 먹고 컸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남몰래 얻어 오는 밑반찬이 맛은 더 나았다. 사조는 내 마음도 모르고 다리를 주무르거나 손바닥 크기를 재거나 하며 물이 채워지는 동안 시간을 때웠다.

“다 된 거 아니야?”

놀아주다가 지친 내가 한마디 했다. 욕조 통으로 간 사조가 물을 잠근 뒤 나를 데리러 왔다. 사조가 코알라처럼 뒤로 고꾸라지는 나를 일으켜 욕조로 데리고 갔다. 욕조 통에 나를 기대어 세워 두고 바지와 속옷을 함께 훅 끌어 내렸다. 말씨름할 기운이 없어 그가 벗기면 벗기는구나, 하면서 멀뚱멀뚱 욕실 타일을 쳐다봤다. 사조는 물 온도를 재는 시늉을 하고 나를 안아다가 욕조 안에 넣었다. 뜨거운 물이 다리에 닿자마자 근육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고개를 뒤로 젖히는데 코가 매웠다. 나는 옆으로 쓰러져 욕조 통 위에 머리를 기댔다.

“반신욕이 좋단다, 몸에.”

“응, 좋아.”

조금 살아나서 대답을 하자 사조가 헤벌쭉 웃으며 다가와 내 뺨에 뽀뽀를 사정없이 갈겼다. 세 번째까지는 참아 줄 만했는데 몸의 피로를 풀지도 못하고 네 번이 넘어가는 뽀뽀를 받으려니 힘이 달렸다. 간신히 찾은 기운을 다 뺏기는 느낌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자, 사조가 물에 손을 담그고 내 얼굴 쪽으로 픽 물을 쐈다. 졸지에 눈과 코에 물이 들어가 캑캑거렸다. 무심함이 과해도 병, 관심이 과해도 병이었다. 사조는 무심하면 너무 무심하고, 관심을 가지면 사람이 말라 죽을 때까지 쫓아다녔다. 요즘엔 내가 선인장 같다. 적당히 관심 가져야 하는 선인장에게 하루걸러 하루씩 물을 갈아 주는 기분이었다.

“유치하게 정말.”

“이것을 어째. 유치해도 나는 이미 네 것이라 못 물러.”

그의 말에 웃음이 나와 물에 불은 손으로 머리를 넘겼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알몸을 보여도 깩소리는커녕 잡아먹지 말라고 농담 따먹기를 하는 수준까지 왔다. 이만큼 서로의 몸을 물고 빨았으면 더는 질려서 못 먹는다고 할 때도 됐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아직 풋풋한 둘만의 감성이 존재했다. 손을 잡고 산책길 걸으며 오순도순할 때면 세상이 핑크빛이었다. 내 몸을 아닌 척하며 훔쳐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물을 맞아서 눈에 들어갔는지 한쪽 눈을 감았다 뜬 사조가 장난스레 웃었다. 수면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듯 빙빙 원을 그렸다. 달콤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사조가 부담스럽지만 물에 담겨 띵띵 분 얼굴을 저리 예쁘다고 봐 주는 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네가 좋아, 사조야.”

수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사조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 말이 뭐라고 목에 빨간색이 올라왔다. 잠자리를 할 때만 조금 말을 안 듣는다뿐이지, 평소에는 내가 말만 하면 다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사조를 만나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이제껏 받은 그 어떤 사랑도 그의 사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이었다. 사조만큼 나를 채워 주고 만족시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이 복 받은 상황에서도 왠지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연했다. 나는 사조의 부모가 누구인지, 형제는 몇인지, 나이는 나보다 얼마나 많은지, 사조라는 것이 별명인지, 성은 따로 없는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섬에 살며, 특별한 힘이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은 모든 들어주려 하며, 할아버지가 남긴 팔찌를 내 몸에서 떼어 놓고 싶어서 안달이 난 남자란 거였다. 특히 내 팔찌에 갖고 있는 그의 적대감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것을 요즘 들어 새삼스레 느끼고 있었다.

한번은 평상 위에서 낮잠을 잔 적이 있었다. 사조와 끝말잇기를 하다가 바람이 적당히 부는 게 좋아서 한 시간만 잔다고 얘기했다. 이따가 때 되면 깨워 주겠다던 사조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전날에도 시달린 터라 거의 무아지경으로 잠을 잤다. 노을이 질 즈음에 잠이 들었는데 얼핏 잠에서 깨 보니 밤하늘에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목이 말라서 부엌으로 가 물을 떠다 먹으려고 했다. 내가 깨어난 걸 모르는 사조가 사람 하나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자서 사조 닮은 헛것이 보이는 줄 알았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추하게 잤나, 발로 찼나, 고사이 싫증 난 건가. 그런데 가만 보니 사조의 눈이 얼굴 말고 팔목에 가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짤랑, 짤랑, 우는 방울을 쥐어뜯고 싶은 양 주먹을 떨었다.

도대체 죽음이 사조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칼 같은 것에 죽을 사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조의 힘은 죽은 자와 관련된 것일까. 혼자 생각을 하느니 사조에게 묻는 게 낫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답게 앉아 물어볼 틈이 없었다. 사조는 그쪽으로 말이 나오면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그럼 팔찌부터 풀자고 목소리를 깔았다. 내게 속 시원히 말하기엔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물 식는다.”

사조는 머리 꼭대기에 앉아 딴생각 그만하라고 나무랐다. 나의 정신이 허겁지겁 현실로 돌아왔다. 뿌연 김이 가득한 욕실, 욕조 통에 엎드려 있는 사조가 보였다. 나는 사조의 말에 끄덕거리며 아래 부위와 가슴을 닦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사조가 있으면 꼼꼼히 닦기란 어려웠다. 아무리 온갖 꼴을 보여 준 사조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씻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나가야 씻지.”

사조는 꿈쩍도 안 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도 않는다. 저 불리한 것이 있을 때는 말도 안 하는 놈이었다. 내가 기가 막혀 입에 침을 바르자 사조가 따라 하듯이 제 입에 침을 발랐다. 그때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 같았던 사조의 손이 물속으로 쑥 들어왔다. 그의 손을 피해서 달아날 만한 공간도 욕조 통에는 딱히 없었다. 그의 손이 부드러이 음부를 덮고서 손가락만 이용해 구멍으로 파고들었다. 쑥 들어온 손가락이 안에 고인 씨물을 빼내는 듯이 갈고리처럼 휘어져 안을 쑤셨다.

“흐, 으…….”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는 최선을 다해 신음을 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조의 음흉한 속내는 그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봐라. 내가 기습 공격에 당해 신음을 흘리자마자 사조는 옳다구나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뻔했다. 입맛을 다신 사조는 코끝을 내 뺨에 비볐다.

“하나 더 넣어 줄까?”

“나 씻겨 준다며.”

“네가 워낙 다디단 신음을 흘리기에……. 고픈가 싶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 차에 두 개가 쑤욱 집어넣어졌다. 애초에 이 짓을 하고 싶어서 욕실까지 따라 들어 온 남자였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도록 손가락을 휘어 넣었다. 밖으로 씨물을 빼내는 척하면서 실상은 달아오른 내벽을 건드리고 만지는 악취미가 생겼다. 아까까지 성기에 짓눌려 힘을 못 쓰던 아랫살도 달래 준다는 거창한 이유까지 붙여서 그의 손은 양심 없이 물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손목만 넣는다더니 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팔뚝까지 잠길 정도로 상체를 숙였다. 뭘 먹은 게 있어야 신음도 나오는 것이다. 백 미터 질주한 것처럼 숨이 턱에 닿은 내가 가여워야 정상이었다.

첨벙첨벙, 이미 아랫도리에 품은 게 없음에도 물소리는 징글징글하게 이 밤을 채웠다. 제 옷을 다 버린 사조가 욕조 안으로 기어이 상반신을 담구었다. 아, 이 밤도, 이 비 오는 밤도 그에게 남김없이 바쳐야겠구나.

욕실 작은 창으로 곤두박질하는 빗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 밤에 내가 제정신으로 들을 마지막 빗소리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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