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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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건 그분들이 고민할 몫이고 너는 지금부터라도 쓸데없는 상상 하지 말고 실현 가능성 있는 계획을 세워 봐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차 병장님은 만주에 일본군이 그렇게 많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차 병장님의 전공은 화학이잖습니까?”

차준혁은 고준일의 말에 잠시 회상에 젖었다. 군에 들어오기 전 헤어진 여자 친구를 만났던 것이 대학 동아리 모임에서였고 그 동아리가 바로 역사 연구 모임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잠시지만 떠나온 시간에 대한 회상을 하자 얼굴에는 당연히 아련함이 가득해졌다. 

차준혁이 그러다 정신을 차리자 자신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고준일을 보고는 걱정마라는 듯 그의 어깨를 한 번 치면서 대답해 주었다.

“대학에서 활동했던 동아리가 역사 연구 모임이라 남보다 조금 더 알고 있는 것뿐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그런데 아쉬운 게 있습니다.”

“뭐가 아쉬워?”

“기왕 과거로 올 바에야 한참 전으로 갔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임진왜란 직전이라면 지금 우리 전력으로도 일본 놈들을 모조리 수장시켜 버렸을 것 아닙니까.”

“그렇기는 해도 지금 시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아직은 우리 민족이 뭔가 할 수 있는 때잖아.”

“하긴 그렇습니다.”

차준혁과 고준일은 이날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이 두 사람과 같이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자신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물론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곳곳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토론도 하고 생각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박충식은 이 기간 동안 지휘관들에게 각 함정이 보유하고 있는 장비들의 재물 조사는 물론 민간 선박 선장들에게 자신들의 배에 선적되어 있는 물자와 인원을 철저하게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틀의 시간이 지나 각자의 의견이 제출되었다.

제출될 제안들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위해 100명의 인원이 추천 또는 선별되었다. 차준혁도 화학지원대장의 추천으로 100명에 포함되었다.

이 100명의 인원은 모두의 대표성을 가지기 위해 직급, 연령, 전공, 신분 등을 고려하여 최대한 공정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지휘관들 중에서도 10명 정도만이 참여할 정도로 신중하게 선정했다. 

박충식은 스스로 대표 선정에서 빠지고는 그 기간 동안 선단이 보유하고 있는 물자 조사를 직접 관리 감독했다. 물자 조사는 볼펜 하나, 종이한 장까지 철저하게 조사되었다. 개인사물이 거의 없는 군은 물론이고 민간 선박 선원들의 개인 사물도 일단은 전수 조사가 실시되었다. 

비록 선원들이 민간인들이기는 하지만 선상 생활이라는 것이 상명하복이 철저한 생활인 탓에 선원들이 조사에 성실히 따르면서 물자 조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3일의 시간이 흐르자 물자 조사는 물론이고 최종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이때가 박충식이 지휘하는 대양 함대와 수송 선단이 지금의 시간대로 온 지 8일째 되는 1905년 4월 20일이었다. 

마라도함의 식당에는 임시로 특별 회의실이 마련되었다. 제안을 정리하기 위해 선발된 인원 100명 중 다시 분야별로 선발된 20명의 대표들과 미르 대대장급 이상의 각급 부대 지휘관 그리고 대양 함대 함장과 사령부 참모진, 민간 선박 선장 등 대표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대책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는 박충식의 부관인 이현호 소좌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국민의례입니다. 참석자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일어나셔서 정면에 계양된 태극기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전시대 남북한이 통일로 가는 길에 명분상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국기 선정 문제였다.

남북한 양측이 거의 100여 년 가까이 사용하던 국기를 버리는 일은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년의 토의 끝에 결정된 것이 지금 대양 함대가 사용하는 태극기였다. 이 태극기는 남한이 그동안 사용하던 태극기가 아닌 상해임시정부가 사용하던 중앙의 태극 형태가 상하가 아닌 좌우로 돌려져 원을 그리며 말아 올라가게 표시된 형태로 공식적으로는 이번 항해에 나섰던 대양 함대와 미르 부대가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이현호의 안내로 모두 예의를 표시하자 장엄한 경례 음악이 울려 퍼지자 회의장은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다음으로 애국가 제창이 있겠습니다. 애국가는 4절까지 제창하겠습니다.”

이현호의 안내가 있자 애국가가 울려나왔다.

북한도 정식 국가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식 행사에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국가로 사용했었기에 별다른 이견이 없이 예전부터 불러왔던 애국가를 국가로 다시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제창하는 동안 민간참석자들 중에서 이제는 돌아갈 집도 가족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참지 못하고 울먹이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부터 시작된 울먹임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도 삽시간에 전염되어 애국가 4절이 끝날 무렵에 가서는 대부분의 민간인 참석자들은 물론이고 상당수 군 지휘관들도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할 정도로 회의장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애국가가 끝나고 사회자의 안내로 참석자들이 자리에 앉았지만 격해진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아 박충식은 분위기를 진정될 때까지 손짓으로 회의 진행을 지연시킬 정도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분위기가 진정되자 박충식의 지시를 받은 이현호가 다시 회의를 진행하였다.

“오늘의 회의는 먼저 사령관님의 인사 말씀을 시작으로 100인위원회의 결과 보고가 이어지며 그 뒤로 대양 함대 참모장님의 물자 조사 보고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2부에서는 결과 보고와 물자 조사 보고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논의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박충식 사령관님께서 인사 말씀을 하시겠습니다.”

호명을 받은 박충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에 섰다.

“박충식입니다. 먼저 며칠 동안 고생하신 여러분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박충식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조금 목소리를 높여서 인사했고 그 덕에 회의장 분위기는 빠르게 진정되었다. 

“지난 며칠간 우리는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우리 스스로가 앞길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오늘 여기 참석한 분들은 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리라 믿으며 부디 이번 회의에서 좋은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부디 좋은 의견을 많이 발표하셔서 우리 모두의 앞길에 도움의 되었으면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충식의 짧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한 인사말을 들은 참석자들은 나름대로 단단히 마음을 다잡는 표정들이었다.

“사령관님의 인사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이어서 다음으로 100인위원회를 대표하여 이종훈 박사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박사님 단상으로 나오십시오.”

이현호의 소개가 있자 이종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종훈은 울산대학교 화학산업연구소 소장으로 새로운 논문 연구를 위해 이번에 원유 시추선에 동승한 50대 후반의 학자였다. 이종훈 박사는 단상으로 나온 뒤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기분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00인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는 이종훈입니다.”

이종훈의 인사에 참석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먼저 지금까지 취합된 제안들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결과에 대한 보고를 드리겠으니 보고가 모두 끝나고 난 후 질문을 받겠습니다. 먼저 많은 의견들이 개진되었지만 그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제안한 것은 우리가 대한제국에 직접 관여하자는 방안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종훈의 보고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종훈의 보고가 끝이 나자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진 사람은 박충식이었다.

“박사님의 종합 보고에 보면 우리가 관여하자는 대한의견이 가장 많았다고 하던데 참여 방식이 논의된 것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많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관여 방식이 논의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였습니다. 자칫 다수의 힘으로 밀고 들어간다면 점령군의 이미지가 강하게 심어진다면 설령 지금 시대 사람들과 힘을 합쳐 외세를 몰아내고 난 후가 더 문제라는 결론입니다. 지금 시대 사람들에게 우리가 자신들을 지배할 점령군으로 보인다면 오히려 우리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동반자가 아닌 타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지금 대한제국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면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종훈 박사의 설명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박충식이 다시 물었다.

“그럼 위원회에서 합의된 접근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합의된 방식에 대한 설명은 저보다 그 방식을 최초 제안한 사람이 직접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제안자를 불러와야 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제안자는 바로 100인위원회 의원 중 한 명인 차준혁 병장입니다. 저는 제안의 배경과 이유 등에 대해서는 차 병장이 직접 설명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는데 어떻습니까, 사령관님?”

“제안 당사자가 직접 설명하면 오히려 직접 질문도 할 수 있으니 저는 찬성합니다.”

박충식이 찬성하자 이종훈 박사가 차준혁을 호명했다.

“차준혁 병장.”

이종훈의 호명에 차준혁이 바로 일어나 관등성명을 댔다.

“병장! 차준혁.”

“이리 나와서 본인이 직접 설명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차준혁은 단상으로 나와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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