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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서 PT를 하는 것을 크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제부터 하게 되는 말이 모든 사람들의 미래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긴장되었다.
“충성. 저는 화학지원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병장 차준혁입니다. 먼저 이 자리에 서서 말씀을 올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는 자신의 제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본 제안을 입안하면서 가장 먼저 지금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을 사는 대한제국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우리 스스로는 당연히 같은 민족이고 또 후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대한제국 사람들도 거리낌 없이 믿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과연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를 믿어주고 받아 줄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차준혁의 말에 참석자들 대부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참석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같은 민족인데 설마 어떻게 될까 하는 막연한 기대 심리에 갖고 있던 우려를 의도적으로 덮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차준혁이 감춰 두고 싶은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자 안색이 굳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대한제국은 정치가 아주 발달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는 관리가 곧 정치가였기 때문에 정치가 너무 발달한 나머지 당파가 갈리게 되었고 결국 당파 논리에 맞춰 국정이 전횡되면서 나라가 양란(왜란과 호란)을 당해 일본과 청국에 짓밟히기도 했고 또한 당파 싸움의 반동으로 생긴 세도정치는 오히려 국력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어 결국은 지금과 같이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차준혁이 잠시 숨을 고른 후 설명을 계속했다.
“지금 대한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근본 원인도 정치인들이 국익보다는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국정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한제국 스스로 국력을 신장시켜 외세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정치인 대부분은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것은 고사하고, 개인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친러파니 친일파니 또는 친청파니 하는 파벌을 형성하며 외세에 빌붙어 정치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우국충정의 기개를 가진 분들도 있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하며 아쉽게도 이분들 대부분은 외세를 등에 업은 정치인들 농간에 휘둘려 힘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지금의 대한제국 현실입니다.”
최준혁의 말에 참석자들 모두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물론 그의 시대 해석은 조금 일방적이기는 하였지만 자신들의 생각이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거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준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정치와 전혀 무관한 군인이고 또 일부 민간인들마저 군 조직과 같은 상명하복 체계에서 생활하고 있는 선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만일 뚜렷한 대응책 없이 대한제국에 들어간다면 어떻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노회한 대한제국 정치인들의 정치 놀음에 휘둘려 어떤 일이든 우리의 계획대로 추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 개혁은 둘째 치고 오히려 대한제국 정치인들의 농간에 놀아나다 우리들 서로가 반목하고 등을 돌리는 일도 허다하게 생길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우리들끼리 피를 보는 일까지도 생기게 되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말에 스스로 흥분된 최준혁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물을 마시기 위해 잠깐 말을 멈추었다. 박충식을 비롯한 참석자 대부분은 최준혁의 지적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분위기를 탄 최준혁의 말은 거침없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믿고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힘으로 누르거나 가지고 있는 미래의 지식을 과시하며 하찮은 우월감을 보인다면 이는 같은 민족이 우열로 나뉘어 분열되는 엄청난 파장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대한제국에 들어가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차준혁은 잠깐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러한 여러 문제점 때문에 우리가 대한제국에 들어간다면 그전에 우리 모두에게 철저한 정신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개개인의 욕심과 야망은 일단 내려놓고 일정 기간, 적어도 대한제국이 다른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기간까지는 우리 모두가 모든 일을 함께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차준혁이 동의를 구하는 듯 말을 멈추자 참석자들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을 합쳐 하나의 창구로 만들자는 말입니까?”
“그래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만일 우리들 스스로에게 강력한 제재 장치를 하지 않거나 확실한 보상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누가 힘을 합쳐 미래를 같이 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일이 잘못되어 우리가 각자 흩어진다면 흩어진 우리를 누가 다시 또 아우를 수 있겠습니까?”
질문을 한 사람이 심각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모두에게 재앙이 올 수도 있겠지요.”
“잘 보셨습니다. 흩어진 우리는 당장 일본은 물론이고 서양제국에게 아주 좋은 표적이 되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아들이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몇몇은 이름을 날리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남의 나라의 발전에 죽어라 이용되거나 그들에게 평생 쫒기면서 제대로 일도 못 하고 이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합니다.”
극단적인 말에 모두는 등골이 서늘해진 표정이었다.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갖고 있는 힘으로 이 시대에서 무언가 할 수 있고 미국은 물론이고 러시아 영국 등 누구와도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반드시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힘을 합친 우리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합니다. 확실한 보상이 있어야 모든 사람들이 욕심을 버리고 힘을 합치지 않겠습니까?”
차준혁의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질문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러한 일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이끌어줄 지도부 선출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우리 개개인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우리 모두에게 정부에서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해 주실 것을 다시 한 번 더 건의 드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상은 비록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같이 넘어온 사람들 모두에게 예외 없이 공평하게 적용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별도의 부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제가 말씀드린 국가적인 보상은 반드시 공평하게 추진되어야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헌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강력한 지도자와 확실한 보상 이 두 가지가 모든 일에 앞서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앞으로의 일을 대처하고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힘을 최대한 결집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짝! 짝! 짝! …….
차준혁의 긴 설명이 끝나자 누가 이끌지도 않았어도 참석자들 모두가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특히 개인의 희생을 정부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최고로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탓인지 참석자들의 박수 소리는 힘차게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짝! 짝! 짝! …….
그렇게 한동안 박수 소리가 계속되었고 차준혁은 생각지도 않게 박수를 받자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얼굴을 붉힌 채 박수를 받아야했다.
박수가 수그러들자 자리에 들어갔던 이종훈 박사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준혁 병장의 말을 모두 들으셨을 것입니다. 저희 100인위원회는 모든 일에 앞서 우리를 이끌 지도부를 선출하자는 제안을 먼저 드립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종훈의 제안이 있자 선장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제청이 터져 나왔다.
“제청합니다.”
“동의합니다.”
제청과 동의가 참석자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자 사회를 보던 이현호가 박충식에게 의견을 구했다.
“사령관님, 이 박사님의 제안에 제청이 나오고 동의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여러분들 의견에 따라야겠지.”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을 이끌어 주셨던 사령관님의 말씀도 있고 하니 그럼 여러분의 의견대로 우리 모두를 지휘할 정식 지도부 선출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박충식이 손을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먼저 며칠이나마 저의 말을 따라 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선출되는 지도부는 민간에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이종훈 박사가 즉각 발언 기회를 얻었다.
“그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들 지도자는 물론이고 앞으로 대한제국에서의 우리의 행보를 위해서라도 당연히 군을 장악할 분이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양 함대 사령관님이시고 최고 선임이신 박충식 제독님을 우리의 지도자로 추천합니다.”
그러자 오션프린스호의 선장 김기태가 제청을 하고 나섰고 원유 시추선의 선장 정하영이 동의하고 나섰다. 그렇게 되자 우습게 된 것은 박충식이었다.
자리를 사양하려고 나선 것이 오히려 자리를 차지하게 된 꼴이 된 것이다. 정하영의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이 또 찬성을 하려 하자 박충식이 손을 들어 제지한 후 원래 가지고 있던 고사 의사를 밝히려고 할 때였다. 그때까지 단상에 그대로 서 있던 차준혁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