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회: 1권-11화 의친왕義親王 -->
“사령관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잠시 어수선했던 회의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차준혁은 회의장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평상시 같았으면 일개 병장으로는 감히 나설 수 없는 자리였지만 차준혁은 죽었다 생각하고 겁 없이 손을 들었던 것이다.
박충식도 생각지도 않은 차준혁의 돌발 행동에 일순 당황했지만 내심으로는 그 배짱에 감탄하면서, 문제를 만든 발언당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자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래, 제안자인 차 병장의 생각이 어떤지 들어 보고 싶군. 말해 보게.”
이왕 내친걸음이었다. 차준혁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하기 시작했다.
“전시가 되면 당연히 계엄령이 선포되고 정국 전면에 나서서 국민을 보호하면서 외적을 물리쳐야 하는 것이 군의 의무이자 책무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은 전부 다 전쟁과 다름없는 일의 연속이라고 본다면 지금은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습니다. 더구나 앞으로는 군대가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산적해 있을 것인데 군을 장악하지 못한 민간인 출신으로서는 우리 조직을 통솔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이 시행착오로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합심 단결하여야 할 때입니다. 사령관님께서 거절하시는 것이 만일 군이 정치에 개입되는 것을 경계하셔서 그렇다고 하신다면 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서라도 사령관님이 저희를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보고 드린 지금의 시기는 남보다 내가 먼저 희생해야 한다는 말씀을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같은 일개 병장이 이런 말씀을 올려 정말 죄송합니다.”
차준혁이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이종훈 박사가 나섰다.
“차 병장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입니다. 더구나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주변은 강대국 일색입니다. 그런 적들을 상대하려면 우리는 온 힘을 결집시켜야 하고 최소한 저들과 같이 국민총무장國民總武裝의 각오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를 원만히 풀어 나갈 사람은 저희들 중 사령관님뿐입니다. 힘드시더라도 사령관께서 지도부를 맡아 수고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옆에서 성심으로 돕겠습니다.”
이종훈의 간곡한 당부가 있자 이번에는 입이 무겁기로 정평이 나 있던 미르 부대장이 김종석 장군이 나섰다.
“이 박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우리를 이끌어갈 지도자의 자리는 때로는 수십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해야 하는 어렵고도 힘든 자리입니다. 더구나 그 자리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고뇌하고 또 고뇌해야만 하는 고독한 자리입니다. 지금과 같이 사령관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미르 부대를 대표하여 정식으로 부탁드립니다.”
입이 무거운 김종석까지 정색을 하며 거들고 나섰다. 김종석이 발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모든 참석자들은 이제는 빨리 결정해 달라는 표정으로 박충식의 결단을 촉구하자 박충식은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후,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지도부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와~~.”
짝! 짝! 짝! 짝!
참석자들의 환호와 함께 정식으로 추대되자 박충식은 단상으로 나가 간단한 인사말로 취임사를 대신했다. 그동안 임시로 지휘권을 맡을 때와 달리 모든 사람의 만장일치로 추대되면서 정식으로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자 당연하게 그의 권위는 한층 강화되었고 말에는 무게가 실렸다.
박충식이 모두의 지도자로 정식 추대되자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회의는 세세하게 협의할 사안이 많아 이후 이틀 동안 계속 되었으며 회의 내용은 몇 시간마다 사안별로 취합되어 모든 내용이 공개되었다.
이러한 공개방침은 박충식의 지시에 의해 처음부터 시행되었고 이러한 회의 내용의 공개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회의 내용을 듣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확실한 보장을 해준다는 것에 특히 만족했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한다는 말에 더욱 더 기뻐했다.
박충식이 추대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모두를 대표할 이름을 정하는 것이었다. 갑론을박하였으나 이름은 차준혁 병장의 제안한 태양에서 산다는 삼족오三足烏를 수호 영물로 삼으며 삼족오군三足烏軍으로 결정되었다.
모두를 대표할 이름이 삼족오군으로 정해지자 박충식 사령관은 원활한 업무 수행을 위해 곧바로 군을 재편했다.
먼저 김종석을 상장(중장)으로 승진시켜 그대로 육군을 맡기고, 마라도함장 김성태를 제독으로 승진시켜 해군을 맡겼다. 공군은 마라도함 비행단장인 최경석을 장군으로 승진시켜 지휘권을 맡겼다.
그리고 미르 부대 특수 연대를 특전 부대로 분리하고는 강명철 대좌를 소장으로 승진시켜서 사령부 직할부대로 독립시켰다.
*의친왕義親王
의친왕(義親王,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둘째 아들) 이강李堈은 오늘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사동궁(寺洞宮, 의친왕 왕부)으로 불리었으며, 사동궁의 전각 중 그는 지금 2층짜리 사동궁 양관에 머물고 있었다. 이 양관은 고종이 특별하게 지어서 하사한 건물이었다.
몇 년 동안 의친왕은 주로 외국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유는 고종의 칙명을 받아 대한제국을 대표해 구미 각국을 방문하였고, 그 방문의 마지막으로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후 오하이오에 있는 웨슬리언대학교에서 유학하였기 때문이다.
의친왕이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났으나, 대한제국이 어떻게 손을 쓸 틈도 없이 파국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물론 황족이라 직접 정사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의친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며 귀국한 후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없는 사이 일어난 러일전쟁을 이용해 일본군은 한반도에 상륙해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먼저 한성의 경찰 치안력을 일본 헌병대에 의해 강제 장악하도록 조치했고, 고문 정치라는 미명하에 작년 말(1904년 11월)부터 내각의 각 부서에는 일본이 임명한 고문들에 의해 제정, 경무, 외교는 물론 가장 중요한 군무까지 모두 장악당했다.
더구나 이 달(4월)에 들어서부터 일본군은 부황이 온 힘을 다해 일궈 놓은 대한제국 육군을 본격적으로 축소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절이 이러니 해바라기 성향의 권력 지향적 관리들과 지조가 없는 정치인들은 급격하게 일본으로 기울면서 공공연하게 친일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의친왕은 귀국한 후 주요 관리들이 친일파로 변한 상황을 직접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특히 며칠 전부터 일본이 대한제국군을 감축시키는 것을 두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자 무력감을 참을 수 없었던 의친왕으로서는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고 느는 것은 술뿐이었다.
이날 밤도 의친왕은 자학하며 탄식을 연신해 댔다.
“아! 어떻게 나라가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난 그저 힘없는 황족에 불과할 뿐이란 말인가. 그냥 이렇게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두고 봐야만 하는 것인가. 아!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로구나. 내 비록 친왕의 지위에 있었지만 황족이 정국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금지하고 있던 탓에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도대체 이까짓 허울뿐인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의친왕 이강은 나라가 거의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던 의친왕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책상 위의 무언가를 벽에다 집어 던져 버렸다.
쨍그랑!
아마도 그것이 유리였는지 벽에 부딪쳐 깨지는 소리에 놀란 내관이 황급히 방문을 두드렸다.
“전하, 소인 박 내관이옵니다. 깨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아무 일 아니다.”
“전하~ 문을 열고 들어가겠사옵니다.”
의친왕은 그동안 부드럽다고 생각하던 박 내관의 채근하는 목소리조차 오늘은 이상하게 짜증스럽게 들려왔다. 의친왕이 대답을 하지 않자 내관의 목소리는 더욱 간드러졌다.
“전하~~.”
“어허! 아무 일 아니라는데도 그러는구나. 물러나라. 그리고 앞으로 내 방에 누구도 문을 두드리지 마라.”
의친왕이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박 내관의 목소리는 이내 잦아졌다. 평소에는 조용한 의친왕이 화가 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성격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박 내관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궁들도 서둘러 손짓으로 물러나게 했다.
그런 사동궁 양관을 언제부터인가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삼족오군 특수부대 침투팀이었다. 이미 사동궁 양관에는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내부 상황을 감청하던 이종경 상사가 팀장인 양광룡 대위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한 소리 했다.
“말 한마디에 아랫사람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걸 보니 의친왕의 성격이 대단한가 봅니다.”
“망해 가는 제국이라고 해도 명색이 친왕 아닌가. 더구나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궁에서 그의 기분을 누가 거스르겠나. 의친왕 주위에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오히려 다행한 일이니 좋게 생각하자고.”
특수전 부대원들은 대부분 북한 출신들이라 대장인 강명철 소장과 같이 사투리가 아주 강했다. 하지만 이들은 혹독할 정도로 가혹한 훈련을 수행하며 평상시에는 거의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이미 하루 전 한성에 잠입해서 의친왕의 침소가 있는 양관 이층에 미리 침투해 도청 장치를 설치해 놓았다.
양관을 감청을 하고 있던 이종경 상사가 팀장인 양광룡 대위에게 보고했다.
“아! 팀장님 의친왕이 술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하~ 그래? 그렇다면 수면 가스를 사용하는 것보다 그가 잠들 때까지 조금 기다리는 게 좋겠군.”
“팀원들에게 대기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그나저나 빨리 잠들어야 할 텐데 걱정이로군. 사동궁내에 군 병력이 없다고는 해도 은신이 길어지면 좋지 않은데 말이야.”
팀장의 지시를 받은 이종경 상사가 헤드셋을 켜고는 팀원들에게 지시했다.
“모든 팀원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현 위치를 고수한다.”
“1조 감지.”
“2조 감지.”
…….
미르 부대 침투팀은 2인 1조로 총 5개조 열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광룡은 이종경에게 감청을 전담시키고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딱! 딱!
대한제국에 몇 년 전부터 근대적인 경찰 제도가 도입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밤에는 야경꾼이 화제와 범죄 예방을 위해 나무를 두드려 경각심을 일깨우며 한성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의친왕의 가뜩이나 곤두서 있는 신경이 야경꾼이 내는 소리를 듣자 더 날카로워지면서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