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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식은 이전에 마라도함의 통신 담당 부장이었지만 이제는 삼족오군의 통신단장이 된 노범찬 중좌에게 물었다.
“노 단장, 일본군의 무선 교신 내용 감청은 잘되고 있나?”
“그렇습니다.”
“일본 해군의 준비 상황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파악되고 있나?”
“지금 러시아와 일전을 결할 일본 연합함대는 전부 진해만 인근에 집결해서 연일 함포 사격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해군의 전력 상황은 파악되었어?”
“그렇습니다. 저들의 통신을 감청한 결과 정확한 연합함대의 전력 규모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흠. 그럼, 한번 보고해 보게.”
박충식의 지시에 노범찬은 정리된 차트를 들여다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노범찬 중좌의 설명이 시작되자 박충식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수십 장의 항공사진을 들여다봤다. 정찰을 나갔던 회전날틀(삼족오군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아 헬리콥터란 명칭이 생겨나지 않은 헬기를 회전날틀로 부르기 시작했다.)이 찍어온 사진에는 함정들이 하나하나 찍혀 있었고 진해만을 가득 메우고 포격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도 나와 있었다.
“우선 일본 해군의 기함은 배수량 1만 5,000톤의 미카사三笠입니다. 그리고 동급전함 시키시마敷島, 아사히朝日, 하츠세初瀬 등 4척의 전함이 참전을 하고 있고 순양함 8척과 구축함 21척 그리고 어뢰정 등 보조 함정을 포함한 총 60척입니다.”
박충식은 노범찬의 보고를 들으면서 항공사진을 보며 감탄했다.
“참으로 대단한 전력이군. 이게 1905년의 일본의 해군력이라니 정말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는군.”
옆에서 같이 사진을 넘겨보던 미르 부대장 김종석도 감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대단합니다. 이전에는 단지 기록 사진으로만 보고 그러려니 했었는데 이거 우리가 직접 촬영한 사진을 보니 정말 엄청난 규모입니다.”
“그래, 일본의 군사력이 이정도니 대한제국이 어떻게 운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병탄되고 말았겠지. 더구나 만주에 출전한 육군도 거의 연 인원이 거의 60만에 육박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그동안의 전투로 막대한 병력이 손실을 입어 만주에 남아 있는 병력은 겨우 20만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초기 파병된 정예병은 대부분 사상자로 낙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병력은 거의 예비병들로 구성된 보충 병력으로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병력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 만주에 참전했을 때는 훈련이 부실했다고는 해도 직접 삶과 죽음을 넘나든 전투를 치러 본 병력이라 그렇게 쉽게 볼 수많은 없지 않겠나. 더구나 20만 명을 겨우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을 것이네.”
“하하! 그렇기는 해도 앞으로 결전을 치를 일본군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문제지만 병력 숫자만으로 적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충식도 김종석의 말에는 동감했다.
“하긴 그렇기는 하네. 자, 그 문제는 나중에 별도로 생각하고 지금은 바다만 생각하기로 하세.”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의친왕이 우리의 의도에 잘 따라 주어야 할 텐데 걱정이로군.”
“우리가 건네준 자료를 읽어 본다면 궁금해서라도 접선 장소로 나와 볼 것입니다. 고민은 의친왕이 하라고 하고 사령관님께서는 밤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종석의 말에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2시를 훨씬 넘기고 있었다. 박충식은 피곤한 뒷목과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우리만 나라를 위하는 것은 아니지. 자네 말대로 고민은 의친왕이 하라 하고 난 들어가 쉬어야겠네. 자네도 들어가 쉬게.”
“저도 마지막 점검을 하고나서 곧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난 먼저 들어가겠네.”
박충식은 김종석을 비롯해 강명철과 김성태, 최경석 등 전군 지휘관들의 인사를 받으며 마라도함에 새로 마련한 회의실을 나갔다. 박충식이 이렇게 숙소로 들어가고도 이날 회의실의 불은 새벽이 다되도록 꺼지지 않았다.
의친왕 이강은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전날 마신 술이 비록 적은 양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 대궐에서부터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부황에게 문후를 드리던 것이 평생 습관이 되어 버린 의친왕이었기에 그의 기상시간은 늘 이른 새벽이었다.
“끄~음.”
눈을 뜬 의친왕은 숙취로 속이 조금 울렁이자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툭.
순간, 가슴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저게 뭐지?’
의친왕은 카펫 위에 떨어진 물체를 집어 들었다. 그가 집어든 것은 바로 모나미 볼펜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의친왕이 독백했다.
“특이하게 생긴 게, 꼭 붓같이 생겼군. 혹시 필기구인가? 근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딸깍.
처음 접한 것이었기에 의친왕은 무얼까 하며 아무생각 없이 위를 눌렀다. 그러자 밑으로 심이 빠져나왔고 의친왕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하! 위를 누르니 밑에 이게 튀어나오는 구나.”
그러면서 아무 생각 없이 빠져나온 심을 자신의 손바닥에 긋다 의친왕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정말 필기구네! 그런데 잉크도 찍지 않았는데도 써지는 것을 보니 만년필의 일종인가 보네. 그런데 외피를 이루는 이 재질은 뭐지? 상아인가?”
의친왕은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정신을 놓고 있다 문득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들자 방구석 저편에 누군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게 누구냐?”
하지만 누워 있는 인물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의친왕이 다가가보니 박 내관이었다.
“이런! 박 내관, 예서 뭐하고 있는 가?”
하늘같은 의친왕이 불렀지만 평상시와 달리 박 내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의친왕은 방 밖으로 나가서는 바로 사람을 불렀다.
“밖에 누구 없느냐?”
그렇게 몇 차례 소리치자 아래층에 있던 상궁이 황급히 올라왔다. 의친왕은 상궁이 자신의 앞에 다가서자마자 다그쳤다.
“자네는 빨리 가서 의원을 부르라. 지금 박 내관이 정신을 잃은 것 같구나.”
의친왕의 다그침에 상궁은 황급히 몸을 돌려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의원이 쫓아 올라왔고 이어서 박 내관을 정신 차리게 한다며 한동안 실내가 시끄러웠다.
‘이게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일까?’
얼마의 시간이 흘러 박 내관은 정신을 차렸고 어젯밤 일이 보고되었다. 의친왕은 박 내관의 보고를 받으며 창문을 바라보다 자신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서류 봉투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의친왕은 몸을 흠칫하며 긴장했다.
‘어젯밤 분명 누군가 침입하였다. 그런데 나를 해치지도 않았고 자신들과 조우한 박 내관도 충분히 살해할 수도 있었지만 힘들여 기절만 시켰다. 그리고 이 이상한 필기구와 서류 봉투만 두고 갔다고 하면 적의가 없다고 봐야 하는데, 왔다 간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무엇을 노리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인가. 그리고 봉투 속에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의친왕은 자신에게 무언가 알려 주기 위해 누군가가 보낸 듯한 서류 봉투를 열어 보려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망설였다.
그러면서 볼펜을 다시 손에 쥐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것을 두고 간 이유는 뭘까?”
볼펜으로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 글을 써 보았다.
글을 쓰던 의친왕에게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야, 이거 대단히 부드럽게 쓰여지는구나.”
그러면서 자신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선물 받은 최고급 만년필을 꺼내 분해하며 비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필기구는 모양으로 봐서 이 만년필보다 비싸지는 않을 것 같구나. 그런데 참으로 다루기 편하게 되어 있구나. 내용물도 단순하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작은 용수철을 만들 수 있지? 서양의 과학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보면 볼수록 신기한 것이 볼펜이었고 의친왕은 볼펜을 결국 서양에서 만든 것이라 판단했다.
“우리 대한제국에서 과연 이것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각이 져 있고 소재를 전혀 알 수 없는 하얀 외피는 물론, 작지만 먹물이 아주 탄성이 강한 용수철과 아주 가느다란 투명 봉에 내장되어 균일하게 나오는 심까지 몇 개 되지 않는 부품 하나하나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한제국의 기술력으로는 하나의 부품도 제대로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의친왕은 갑자기 자신에게 볼펜을 보내 준 의도를 생각해 냈다.
“그렇구나. 이것을 보내 준 의도를 이제야 알겠어. 나에게 이것을 만들 수 있는 서양의 기술력을 보여 주려고 했던 거였구나.”
그러면서 볼펜을 다시 보니 비록 작은 필기구에 불과하지만, 보면 볼수록 신기할 정도로 작동이 간단하면서도 또한 쉽게 만들기 어려운 필기구였다.
‘흠.’
의친왕은 볼펜을 보내 온 의도를 알아내자 서류를 열어 보기가 처음보다 더욱 부담이 되었다.
‘무엇 때문에 이 필기구로 나를 유인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서류를 보낸 자들은 과연 서양의 어느 나라일까?’
의친왕은 그가 돌아다녔던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의 각국과 일본 그리고 유학을 했던 미국까지 차례로 생각해 봤다. 하지만 서양의 어느 나라에서도 동양의 작은 나라 왕자에 불과한 자신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었다.
‘이상한 일이군. 서양의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지만 구태여 나하고 이런 방식으로 접근을 해 올 필요가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의친왕은 일단 내용이 뭔지나 확인해 보자는 판단을 하고는 봉투를 개봉했다. 봉투 안에는 수십 장의 서류와 사진들이 들어 있었고 의친왕은 차분하게 내용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뭐야!”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의친왕은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면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을 읽자 의친왕은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 이게 정말 사실이란 말인가?”
의친왕은 동봉해 있던 사진들을 살펴봤다. 그것은 자신의 빛바랜 사진과 나이든 초라한 모습, 부황의 사진, 형인 황태자의 사진, 그리고 부황이 승인하지 않고 간신배들의 수결만 되어 있는 을사늑약 서류 사진과 자신이 일본인 중 가장 미워하는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이 되는 사진 그리고 강제 양위와 부황의 국장 사진 등으로 너무도 엄청난 사건이 담긴 사진에 두 손이 떨려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잠시 서류를 내려놓은 의친왕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 크게 하고는 용기를 내어 서류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의 내용은 다름 아닌 대한제국의 역사, 곧 한민족의 역사였다. 그 시기는 지금부터 의친왕이 비참하게 죽기까지인 1955년까지 정확히 50년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수십 장의 사진들이었다.
너무도 암담한 내용에 몇 번을 읽고 또 읽고 부정하려고 해 봐도 거짓이고 허구라고 간단히 덮어 버릴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