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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이 지금 대한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과 너무도 일치하고 있었고 또한 자신이 생각하더라도 이렇게 계속 진행된다면 종내는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자신이었기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생각도 하기 싫지만 우리 제국은 이렇게 나간다면 결국 일본에 먹혀 버리고 만다. 그것을 내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개항 이래 수많은 좋은 기회를 정치 놀음에 날려 보낸 지금 우리의 힘만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가 없어. 후,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 아닌가.”
독백을 하던 의친왕은 서류의 끝에 적혀 있는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읽어 보았다.
“이것을 보낸 사람들이 정말 우리 대한제국을 돕기 위해 다른 세상에서 온 우리와 같은 민족일까? 이렇게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거짓은 아닐 것 같지만 과연 그들에게 일본을 몰아낼 힘이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내용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붉히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무리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망국의 친왕에게 열 명이 넘는 후궁이라니 참으로 앞으로의 내 인생이 정말 한심하군. 이건 내가 완전히 세상을 포기했다는 말이로군.”
의친왕은 새벽부터 정오가 넘는 한나절 동안 서류를 수십 번 읽고 또 읽었다.
“이들이 쓰는 언문이 우리가 쓰는 것과 조금 다르기는 해도 우리 민족과 밀접한 연관이 없다면 이렇게 쓸 수는 없는 일이겠지. 그렇다면 이들의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더군다나 나를 헤하려 했다면 구태여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자들의 목적이 여기 쓰여 있는 것과 다르다고 해도 일단은 목숨은 보장받은 셈인가?”
의친왕은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그래, 일단 해 보자. 이 서류대로라면 난 말년을 폐인으로 보내야 하지 않은가. 모르면 몰라도 황실과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폐인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이지.”
“박 내관 밖에 있느냐.”
마음을 굳힌 의친왕이 박 내관을 불렀다.
“부르셨사옵니까?”
“너는 가서 붉은색 천을 가져와 저 창문을 가려라.”
“예, 전하.”
“그리고 벽난로에 불을 지필 수 있도록 나무도 함께 가져오도록 해라.”
“예, 전하.”
대궐에서부터 의친왕과 함께 생활해 온 박 내관은 의친왕의 지시가 있자 두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양관의 2층 창문에는 붉은색 커튼이 내려졌고 굴뚝에는 나무와 함께 의친왕이 읽던 서류들이 전부 소각되어 불태워진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런 사동궁의 움직임은 한성 하늘에 떠있던 무인정찰기에게 그대로 잡혀 실시간으로 마라도함으로 전송되었다.
“사령관님, 송골매가 보내온 영상입니다. 사동궁 양관에 의친왕이 우리와 접선을 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붉은 커튼이 내려졌고 굴뚝에도 서류를 태우는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송골매가 보내오는 영상을 확인한 박충식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잘 되었다. 의친왕이 드디어 우리와 접선하기로 결심을 굳혔나 보군.”
“다행입니다. 이로써 한고비는 넘긴 셈입니다.”
“그렇지. 어쨌든 큰 결심을 한 분이니 잘 모시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황해에 나가 있는 임계윤집함에 지시해 놓겠습니다.”
늦은 오후가 되었지만 의친왕은 군복을 차려입고는 경운궁의 황제를 찾았다.
의친왕은 접견실을 들어서자마자 두 손을 높게 들며 예를 표시하며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평신平身하라.”
부황의 명에 따라 몸을 일으킨 의친왕은 접견실에 일본군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대장과 참모장 오타니 기쿠조大谷喜久藏 소장이 먼저 들어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의친왕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고개만 까딱하며 무례하고도 건방진 태도로 인사를 했다.
“의친왕 전하를 뵙습니다.”
“의친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것은 참모장 오타니 기쿠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의친왕은 그들이 자신은 둘째 치고 부황에게까지 늘 이렇게 건방진 인사를 해 오던 것을 늘 못마땅해 했다.
물론 하세가와 대장과 참모장 오타니는 그것을 알면서도 완전 무시해 버렸다. 의천왕은 속으로 부글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자신도 고개만 까딱하며 답례를 했다.
“하세가와 대장과 오타니 참모장께서도 오셨소이다.”
“예, 전하.”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두 사람에게 간략하게 인사를 마친 의친왕은 부황에게 몸을 돌렸다.
“폐하, 신 이강 폐하께 주청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아라.”
“신이 이번에 상해를 한번 다녀올까 하옵니다.”
“상해를 말이더냐?”
“그렇사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었다고 또 외국으로 나가려고 하느냐?”
“소자 답답한 한성에 머물고 있는 것보다 세계를 둘러보며 많은 신문물을 보고 듣는 것이 좋사옵니다. 부디 칙허하여 주시옵소서.”
“허! 한성이 그리 답답하더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황제(고종)는 허리를 숙이는 의친왕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봤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방황 아닌 방황을 하는 이유가 무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제국은 황태자가 혼인을 한 지 20년이 넘었으나 황통을 이을 후손을 보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황태자의 뒤를 이을 후계 구도가 본격 거론되었다.
정상이었다면 황태자의 바로 밑인 의친왕이 그 뒤를 이어야 순리지만 이를 막고 있는 것이 바로 황제 자신과 황제가 총애하는 엄 귀비였다.
황제는 강직한 성품의 의친왕이 부담스러웠고 엄 귀비는 자신의 소생인 영친왕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려고 수를 쓰고 있었다. 거기에 만만하지 않은 의친왕을 항상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일본까지 영친왕의 후계 책봉에 가세하면서 의친왕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황실의 미묘한 후계 문제가 의친왕의 외유에 큰 몫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의친왕이 몇 년간의 외유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상해로 나가겠다고 하니 황제로서는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꼭 나가야겠느냐?”
“신이 한성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번 기회에 상해는 물론 청국의 강남도 한번 둘러보고 돌아오겠사옵니다. 칙허하여 주시옵소서.”
“허허, 그거 참.”
황제는 나갈 결심을 굳힌 듯 말하는 의친왕을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의친왕이 지금 한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야 술 먹고 한숨을 내쉬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황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비는 있느냐?”
“이제 준비를 하려 하옵니다.”
“여봐라, 내장원경 들라하라.”
황제의 부름이 있자 잠시 후 내장원의 책임자인 내장원경 이용익이 들어왔다. 내장원은 조선 시대 왕실의 개인 재산을 관장하던 내수사이며 이때에 이르러서는 광산 개발권 등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훨씬 재산이 불어나 있었다.
“내장원경은 의친왕의 여비로 1만 원(지금의 2억 5,000만 원, 지금 시대 절대 평가 가치로 1:25,000)을 지급하도록 하라.”
“예, 폐하.”
“아바마마, 여비가 너무 많사옵니다.”
“그렇지 않다. 의왕은 우리 대한제국 황실의 친왕이 아니더냐. 상해는 서양 각국의 조계가 있는 곳이다.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여비는 있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용돈을 넉넉히 주겠다는데 싫어할 아들은 없다. 의친왕은 바로 허리를 숙였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가겠다고 하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황실의 위엄을 망각하지 말고 몸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명심 꼭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때 통역을 통해 부자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세가와 대장이 형식적인 말투로 질문했다.
“언제 떠나려고 하십니까?”
“몸만 가면 되는 것이니 간단하게 옷가지만 챙겨서 바로 떠날 생각이오.”
“제물포로 가실 것입니까?”
“이왕 나서는 여행길이니 본토도 조금 둘러보다 나갈 계획이오.”
“그럼, 당분간은 본국에 계시겠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마음먹고 있소이다.”
“네, 여행 잘 다녀오십시오.”
“고맙소이다.”
서로가 뻣뻣한 자세로 두 사람은 서로 물어볼 말과 대답할 말만 간단하게 주고받았다.
의친왕은 하세가와 일행이 보기 싫어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접견실을 나와 버렸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의친왕은 내장원경 이용익이 건네준 여비를 받아서는 바로 사동궁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의친왕은 집안 가솔에게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알리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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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이 접견실을 나가자 하세가와 일행도 황제에게 하직인사를 하고는 경운궁을 걸어 나와 대한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다가닥 다가닥.
주둔지인 용산으로 돌아가고 있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마차에는 참모장 오타니 기쿠조 소장이 합승해 있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10여 년 전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당시 공사 각하께서 거국적으로 일으키신 조선 왕비 제거 거사는 참으로 잘한 일이야.”
하세가와의 말에 참모장 오타니 참모장도 동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