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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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그때 만일 구국의 결단을 결행하지 않았다면 우리 대일본제국은 조선 왕비의 집중적인 견제로 조선을 이렇게 쉽게 장악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같은 격동의 시대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의 행보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우리 대일본제국만 보더라도 유신삼걸(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이끌어 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를 말함) 같은 당대의 영웅들의 걸출함 때문에 지금의 대일본제국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이지.”

두 사람은 10여 년 전 당시 주한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의 흉계로 일본 낭인들을 불러들여 일본의 조선 경영 전략에 최대 걸림돌이었던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두고 말도 안 되는 괴변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을미사변으로 자신들의 최대 걸림돌을 제거한 일본은 그 후 조선에서의 각국 입김을 하나하나 제거해 버리며 조선을 장악해 들어갔으며 이제 그 마지막으로 걸림돌이었던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하세가와는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후후! 조선 국왕이 지금도 정궁인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러시아 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얼마나 겁을 먹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아.”

“그렇습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누구나 절치부심 복수를 하려고 생각하지 비겁하게 무섭다고 살던 곳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설사 경복궁이 도산검림(刀山劍林, 칼산과 검의 숲,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대일본제국이라면 신하들이 절대 황제를 저렇게 보필하지는 않을 것이야.”

“조선의 관리들이야, 나라는 뒷전이고 그저 자신들 안위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위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관리들처럼 목숨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소인은 그런 관리들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조금 전에 만난 의친왕은 볼 때마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아.”

“의친왕은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조선은 본래부터 왕실 인사들의 정치 개입을 절대 못 하게 막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의친왕의 기개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조선 내각의 관리들 견제 때문에 정치 개입은 절대 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의친왕은 황태자의 후계 문제로 황제와 엄 귀비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각하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 눈초리가 영 마뜩치가 않아.”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우리가 조치를 취하기 전에 저들 스스로가 의친왕을 더 경계할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 이상하게 조선은 남이 잘되는 것을 옆에서 두고 보지 않아.”

“맞습니다. 남 잘되는 꼴은 절대 못 보는 것이 조선인들의 속성입니다.” 

참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푹신한 등받이에 등을 묻었다. 

한성은 황제의 지시로 몇 년 전에 벌인 거국적인 정비 사업으로 도로가 아주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하세가와도 처음 한성에 왔을 땐 동경보다 오히려 도로 사정이 더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한성을 벗어나자마자 도로사정이 급격하게 나빠져 심하게 흔들리는 몸 때문에 속까지 울렁이며 짜증이 다 날 지경이었다.

마부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마차를 몰아도 멀미가 날 정도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세가와는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늘어진 줄을 잡으며 짜증을 냈다.

“그나저나 이놈의 도로는 정말 적응이 안 되는군. 대본영大本營에서 주차군사령관의 위엄을 세우라고 말을 타지 말고 마차를 타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으면 내 절대 마차는 타고 싶지가 않아.”

“어쩔 수 없습니다. 조선은 본래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부러 도로를 뚫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도로가 넓어진 것은 감지덕지입니다.”

참모장의 설명에 하세가와는 웃음이 다 나왔다.

“하하! 그건 그래.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고 길을 일부러 뚫지 않은 나라는 아마 세상에서 조선뿐일 거야.”

“맞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받았으면 우리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절치부심 목숨을 내놓고라도 반드시 복수를 하려고 하는데 이들은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그저 외적의 침입을 어렵게 하려고 길을 뚫지 않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당당하게 점령군으로 조선의 수도 한복판에서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 가던 하세가와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생각하자 이마에 내천 자가 절로 그려졌다.

“각하,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아! 러시아와의 전쟁을 생각하니 갑자기 염려가 돼서 그렇다네. 이제 러시아만 이기면 조선은 바로 우리 대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 아닌가.”

“지난 3월에 벌어진 봉천 전투가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났으니 이제 승리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볼 사안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도 대본영 출신이라 잘 알겠지만 우리 제국의 경제 상황이 전황을 쉽게 낙관만 할 수 없지 않은가.”

하세가와의 우려가 틀리지 않았기에 참모장 오타니는 반론하지 못했다. 

1905년 3월. 2년간에 걸쳐 벌어지고 있는 러일전쟁은 양국이 만주의 패권을 놓고 벌인 마지막 전투라고 할 수 있던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 사령관 쿠로파트킨의 오판으로 일본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러시아군은 유격군 역할을 담당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육군 대장이 이끄는 3군 병력이 10만 명 이상이 되는 것으로 오판하여 결전을 벌이고 있던 봉천을 포기하고 하얼빈 방면으로 병력을 퇴각시킨 것이다.

이러한 퇴각 전술은 러시아군이 국토가 넓은 자국 지형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전법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퇴각하며 전열이 흐트러진 러시아군을 뒤쫓으면서 10만 명이 넘는 적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물론 봉천 함락에 일본군 총사령관 오야마 대장의 탁월한 지휘도 큰 몫을 했지만 일본군도 이 봉천 전투에서 7만 5,000명이 넘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비록 봉천을 함락시키며 만주 남부 일대에서 러시아를 완전히 몰아내는 승전을 했다고는 하지만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일본군도 발목을 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더구나 러시아는 아직 20만 명이 넘는 대군이 그들의 안방과도 같은 하얼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2년간의 전쟁에 온 국력을 집중시키며 연인원 6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참전시켜 만주 곳곳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들였다고 하지만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그야말로 상처뿐인 승리였다. 

물론 아직도 20만에 가까운 대군이 봉천 일대에 진주해 있지만 이 병력의 대부분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예비군들로 전쟁 초기 전투력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전쟁도 돈이 있어야 감당할 수 있었다. 더구나 전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전비가 들어가는,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다.

전쟁 초기 전비의 대부분을 미국과 영국에 국채를 발행해서 감당한 일본이었다. 하지만 전황이 의외로 쉽게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미국과 영국은 일본이 지금보다 더 이상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랬기에 양국은 초기의 태도를 바꿔 일본의 국채를 더 이상 사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태였기에 일본은 전비 고갈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스러운 것은 러시아도 피의 일요일에서 시작된 폭동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어서 외부로 눈을 돌릴 수 없는 지경이라 더 이상의 확전을 원하지 않고 있어서 하얼빈에 군대를 그대로 주저앉혀 놓고 있었다.

이러한 만주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흔들리는 마차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개전 초기 직접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도 참여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부족한 전비 문제만 생각하면 입이 바싹 타들어 갔다. 

“귀관도 알다시피 만주에서의 전투는 10년 전 청일전쟁과 달리 끝없는 소모전의 연속이네. 그런 전쟁에는 막대한 군수물자가 투입되어 전비가 끝도 없이 들어가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네.”

“그렇습니다, 각하.”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이대로 계속 가다간 우리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감당하기 힘들어져. 지금도 실탄과 포탄에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봉천에서 더 이상 진군을 하지 못하고 있는 바람에 러시아군을 만주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러시아도 지난 전투의 패전으로 알렉세이 쿠로파트킨 총사령관이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자국에서 일어난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바람에 그것을 수습하는 데도 힘이 들어 더 이상 전쟁을 계속 이끌어 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대본영의 판단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뭔가 돌파구가 있어야 해. 이대로 계속 가다간 우리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어.”

“위대한 황군이 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곧 벌어질 러시아 발트함대와 우리 연합함대와의 결전이 이번 전쟁의 명운이 걸려 있다고 보네. 러시아는 그렇다고 해도 우리 대일본제국은 반드시 이번 해전에서 승리해야만 이 난관을 스스로 극복해 낼 수가 있어.”

그렇게 말하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갑자기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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