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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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튀어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한동안 눈물까지 맺히며 기침을 해야만 했다. 강명철 소장을 통해 이미 최루가스가 독하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독할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특수부대 본진이 진위대대와 제주목 관아를 제압하고 상당시간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최루가스의 영향은 상당하여 이 시대 사람들이 견디기에는 힘들 정도였다. 

의친왕이 입과 코를 가리고 관아로 다가가자 대기하고 있던 특수부대 1대대장 김영문 상좌가 그들을 맞이했다.

“충성,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강명철은 의친왕과 걸으면서 보고를 들었다.

“고생은 김 상좌와 부대원이 고생했지 우리야 이렇게 편하게 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래, 부대원들 피해 상황은 어떤가?”

“몇 명의 부대원이 타박상을 입은 것 외에는 피해가 전무합니다.”

“그거 참으로 다행이군. 잘했어.”

“저희가 잘한 것보다 대한제국군의 사기가 바닥이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예, 그렇습니다. 일본에 의해 부대가 대폭 축소되어서 그런지 기강이 형편없었습니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네.”

의친왕은 삼족오군이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말보다는 진위대대의 기강이 형편없다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부황父皇이 국력을 집중해 애써 키워 놓았던 병력이 한순간에 스러졌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김영문의 안내를 받으며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제주 관아의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지어진 관덕정觀德亭이었다. 그런 관덕정 앞 광장에는 지금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포박되어 바닥에 나란히 꿇려 있었다. 

관덕정은 제주에서 제일 큰 건물로 2층 기단위에 지어진 건물은 위풍당당했다. 의친왕은 이산해(李山海. 선조 때 영의정. 북인의 영수)가 쓴 관덕정 현판을 한번 쳐다보고는 정자 안에 마련해 놓은 좌석에 앉았다. 

의친왕이 자리에 앉자 강명철이 그 옆에 섰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자 최준혁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 고개를 드시오.”

최준혁의 말에 고개를 들던 제주목사 박진원은 의친왕이 눈앞에 보이자 깜짝 놀랐다.

“아니! 의친왕 전하가 아니시옵니까?”

“경은 과인을 아는가?”

“그렇사옵니다. 신이 몇 년 전 한성에서 전하의 용안을 뵌 적이 있사옵니다.”

웅성웅성.

관덕정 아래 무릎이 꿇려져 있던 사람들은 의친왕이 있다는 말에 갑자기 웅성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전하께서 왜 오랑캐들과 함께 있으시지?”

“그러게 말일세. 서양 오랑캐들이 쳐들어 왔는데 의친왕 전하께서 무슨 일로 양이들과 함께 있으신 것이지? 

“이보게. 혹시 전하께서도 저들에게 붙잡히신 것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안되겠다. 이거 우리가 이대로 붙잡히면 전하께서 큰 변고를 당하시겠어.”

“그렇지? 그럼 자네 이 포박 좀 풀어 보게. 우리가 이렇게 허무하게 앉아 있을 수만 없네.”

“그래, 잠깐만 기다리세.”

관덕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진위대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조금 전 어이없이 무너질 때와는 달리 의친왕을 보자 의친왕이 붙잡혀 있다는 착각에 갑자기 무언가라도 하려고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관덕정 앞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진위대대원들이 소란스러워지자 외곽에서 경계를 서던 특수부대원들은 작전이 끝나서 안전사고를 위해 잠가 두었던 소총의 안전장치를 서둘러 풀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강명철이 안되겠다는 표정으로 김영문에게 눈짓하였다. 강명철 소장을 10년 가까이 모시고 있는 김영문은 강명철의 눈짓을 보낸 의도를 바로 짐작하고는 자신의 소총이 아닌 방금 전 진위대대장 양근모에게 빼앗은 독일제 마우저 권총을 하늘로 추켜들었다. 

탕!

김영문은 마우저 권총의 생각보다 심한 묵직한 반동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약간 휘청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모두 조용하시오.”

총소리가 들리자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잦아들었고 강명철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의친왕에게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아무래도 한 말씀 하셔야겠습니다.”

당연한 말에 의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은 모두 들으라.”

의친왕의 말이 있자 총을 쏘며 조용히 하라는 김영문의 말에도 반발하기 위해 다시 조금씩 움직이려던 진위대원들은 일순간 숨을 죽였다.

“지금 그대들은 과인이 있는 앞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가?”

제주목사 박진원이 나섰다. 

“전하, 어떻게 전하께서 이곳을 침략한 서양 군대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까? 혹여 저들이 전하께 불손한 짓을 한 것은 아니옵니까?”

“그렇지 않소. 과인은 스스로 이분들과 함께 있는 것이오.”

“전하, 저들이 대체 누구관대 대한제국의 친왕께서 경칭을 쓰시는 것이옵니까?”

“아! 이분들은 우리 대한제국의 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다른 세상에서 오신 삼족오군이오.”

그때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참장 양근모가 나섰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세상에서 온 삼족오군이라니요?”

양근모가 나서자 방금 전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보고를 들으며 화가 나 있던 의친왕은 그가 입은 군복이 영관복장인 것으로 진위대대장인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하며 버럭 소리쳤다.

“그대는 누군가? 누군데 감히 과인이 말을 하는데 함부로 나서는가?”

양근모가 황급하게 머리를 땅에 찧었다.

“황공하옵니다. 소직은 제주 진위대대장인 참령 양근모라 하옵니다.”

의친왕은 양근모를 강하게 질책했다.

“그대는 패전지장은 유구무언이라는 말을 모르는가? 더구나 군막에서 대낮부터 술을 퍼먹다 방어조차 못하고 잡혀 온 자가 감히 과인의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말인가?”

“…….”

“만일 삼족오군이 적군이었다면 군중에서 술판이나 벌인 자네 같은 무능한 지휘관 때문에 모든 장졸들이 몰살당했다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런 자가 무슨 염치로 다시 입을 열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무너져 가는 대한제국의 친왕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기세가 대단하여 좌중을 완전 압도했다.

의친왕의 거친 질책에 양근모의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황공하옵니다. 며칠 전 제주도 진위대원 800명이 일본군의 농간에 아무 잘못도 없이 옷을 벗은 터라 소장이 울분을 참지 못해 잠시 본분을 망각했사옵니다. 소장 죄 값을 달게 받겠사옵니다.”

양근모가 머리까지 찧으면서 사죄를 하자 의친왕의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졌다.

“장수의 패전은 병가지상사라지만 장수의 무책임과 방만으로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신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그때 김영문 상좌에게 귓속말을 들은 후 강명철이 나섰다.

“군인에 대한 벌은 군인이 내릴 것이니 전하께서는 이제 그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서귀포는 물론이고 대정과 정의도 별다른 피해 없이 접수하여 제주남부지역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합니다.”

의친왕의 안색이 크게 밝아졌다.

“그래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예, 이제 제주도 내부만 정리하면 됩니다.”

“부대장님.”

“말씀하십시오.”

“혹시 장졸들을 훈련시키실 수 있습니까?”

강명철은 의친왕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

“물론입니다.”

의친왕은 양근모에게 말했다.

“양 참령은 들으라.”

“하교하십시오.”

“만일 삼족오군이 적군이었다면 그대를 포함한 200명의 장졸들은 전부 죽었다. 그렇지 않은가?”

양근모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지금 이 시간부터 새로 산 목숨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이왕 목숨을 구했다면 나라를 위해 그대들의 목숨을 내 놓지 않겠는가?”

“신 등은 이미 황상 폐하를 위해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사옵니다.”

양근모의 말에 의친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전까지는 부황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새로 목숨을 구한 지금부터는 대한제국과 대한제국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최준혁은 점입가경이 되어가는 두 사람의 대화가 흥미진진해졌다. 특히나 황제가 아닌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라는 의친왕의 말이 너무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물론 자신의 기획에 의해 의친왕을 데려와서 세뇌와도 같은 사상 주입을 받은 끝에 의친왕 자신도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말을 했지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양근모는 무슨 소리냐는 듯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곧 대한제국이온데 구태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하교는 받들기 황망하옵니다.”

“말 그대로 들으면 되오. 그대들은 지금부터 황실의 군대가 아닌 대한제국의 군대가 되라는 말이오. 다시 말해 지금 이 시간부터 그대들은 오로지 나라만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는 말이오.”

양근모는 의친왕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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