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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영의 긴급 전문은 상해로 즉각 통지되었다.
상해 주재 일본 주둔군 사령관 마쓰시마 기요시 대좌는 예상 밖의 전문 내용을 보고 의아해했다.
“대본영의 지휘 지침이 의외로군. 의친왕의 행보를 방해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 조선이 제철소 건설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니 말이야.”
“그렇습니다. 저도 그게 이상해서 다시 확인을 했지만 전문내용은 의친왕을 적극 도우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어쩔 수 없지. 대본영의 지침은 지상 명령인데 무조건 따라야지.”
“그렇습니다. 대본영에서 이런 전문을 보낸 것은 분명 우리가 모르는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보게, 부관.”
“하이!”
“애스터하우스호텔에 있는 의친왕에게 기별해서 면담 신청을 넣어라.”
“어젯밤에도 가서 만나셨는데 오늘 또 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그가 서양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할 때 도움을 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자네 말대로 대본영이 그를 적극 도우라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네는 빨리 통지를 보내 약속을 잡아라.”
“하이! 알겠습니다.”
차준혁은 상해 일본군 사령부의 부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내려놓으며 쾌재를 불렀다.
“잘 되었다.”
차준혁을 경호하기 위해 동행한 세 명의 경호팀의 팀장인 박요한 상위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무슨 전화인데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
“일본이 제가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차준혁은 상해로 오는 선상에서 자신의 생각을 박요한에게 숨김없이 말해 주었기에 박요한이 바로 알아들었다.
“아! 그럼 일본이 우리가 추진하는 제철소 건설을 적극 도와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마쓰시마 사령관이 바로 만나자는 전갈입니다. 대본영에서 제철소 건설에 적극 협력하라는 명령을 받았답니다.”
“어제 만찬에서 보니 마쓰시마의 인상이 만만치가 않아 걱정이었는데 그가 도와준다니 참으로 다행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자가 방해를 놓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하하, 이거 우리끼리 축하주라도 한잔해야 하는 것 아냐?”
“좋습니다. 일단 마쓰시마 사령관을 만나 보고 난 후 저녁 때 호텔 바에서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아이쿠, 의친왕 전하께서 한잔 사시겠다니 미관말직의 소인으로서는 이거 대단한 영광입니다.”
“하! 하! 상위님, 농담하지 마십시오.”
오른팔을 가슴에 대면서 허리를 숙이는 박요한을 보며 차준혁은 물론 2명의 경호 팀원들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상해 주재 독일 영사는 바이페르트였다.
바이페르트는 일본 주재 독일공사관의 통역 겸 서기관을 거쳐 한국에서도 몇 년간 영사로 근무한 사람으로 서양의 외교관 중에서도 비교적 아시아 전문가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 총영사로 근무하다 상해로 전근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한제국의 유력 황족인 의친왕이 영사관을 방문하겠다는 전언을 받았다.
바이페르트는 한국에 대한 호감이 많아 의친왕의 내방은 내심 반가웠으나 한국에서도 별다른 접촉이 없었던 의친왕의 영사관 방문 의사에 의아한 생각이 들어 일본 장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영사관 무관 슈미트 소령을 불렀다.
“슈미트 소령, 대한제국 의친왕이 무슨 일로 우리 영사관을 방문하겠다는 것인지 알고 있는 정보가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일본 조계 주둔군 사령관에게서 의친왕과 동행한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방문 이유는 아무것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에서 오래 근무한 덕분에 양국의 주요 인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이페르트 영사는 전혀 일면식도 없고 성향조차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영사관을 방문한다는 전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이상한 일이군. 한국의 의친왕이라면 일본에 대해 아주 비협조적인 것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데 어떻게 마쓰시마 사령관과 같이 방문을 하게 된 것인지 의문이군.”
“의례적인 방문일지도 모르니 일단 만나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흠! 그래야겠군. 그럼 방문 시간은 내일 오전 10시가 좋겠다고 통보를 하고 베이징에 있는 공사 각하께 상황 보고를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독일영사관에서 내일 오전 10시에 만나자는 전언을 받은 차준혁은 다음 날 아침 일찍 호텔에 도착한 마쓰시마 사령관과 함께 호텔에서 준비한 마차를 타고 프랑스 조계에 있는 독일영사관을 방문했다.
다가닥 다가닥.
프랑스 조계를 나온 마차는 곧 영국과 미국의 공동 조계입구에 도착했다. 조계 정문에서 차준혁은 어처구니없는 글이 적힌 간판을 목격했다. 중국어와 영어로 쓰여 있는 간판은 비록 오래되어 낡기는 했으나 보초를 서고 있는 영국군들 앞에 버젓이 서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과 개는 출입 금지’
‘아! 정말 저렇게 쓴 간판이 존재했구나. 어떻게 사람과 개를 똑같이 취급하는 간판이 이렇게 버젓이 중국 땅 한복판에 내걸려 있다는 말인가.’
차준혁은 말로만 듣던 간판을 직접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차준혁이 놀란 표정을 짓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마쓰시마 대좌가 물었다.
“저 간판을 보고 놀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중국인의 민족적 자존심이 아주 대단한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대로 한복판에 저런 간판이 걸려 있는 보고도 그대로 두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마쓰시마는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의친왕이 간판을 보고 의아해하자 ‘더럽고 무식한 중국인의 알량한 자존심은 개보다도 못하다’는 말을 해 주려다 그만두었다. 그것은 의친왕이 중국인이 아니라 대한제국 사람을 비하한다고 강력히 항의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침없는 성격의 그가 이렇게 말까지 조심하는 까닭은 대본영에서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지 의친왕이 무서운 것은 절대 아니었다.
마쓰시마가 자신이 알고 있던 간판에 대한 말을 해 주었다.
“그건 중국인들이 전란을 피하려고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인 상해 조계 지역으로 통제가 안 될 정도로 중국인들이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저런 간판을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도 중국인들 출입이 불가능합니까?”
“전부가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허가된 자에 한해서 출입이 가능합니다. 물론 대부분이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거나 하녀 등의 직업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지만 말입니다.”
“예, 그렇군요.”
차준혁은 갑자기 한반도의 인천과 부산 그리고 원산 등 개항지에 설치되어 있는 조계 지역에도 혹시 이런 치욕스러운 팻말이 붙여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저렇게 치욕적인 내용이 적힌 간판이 중국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대한제국 사람들도 똑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힘없는 나라의 국민들이 받아야 하는 민족적 수모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아주 불편해졌다.
1905년의 상해 조계는 각국 조계 중 어느 곳 할 것 없이 곳곳이 온통 공사 현장이었다. 1845년 아편전쟁 이후 60년이 넘는 조차 기간 동안 세워져 있던 이국적인 서양식 건물들 사이로 엄청난 규모의 건물들이 마치 경쟁을 하듯 대규모로 건설되고 있었다.
차준혁은 마치 대규모 계획도시 건설 현장 같은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정말 엄청나게 많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서양 각국은 물론 우리 대일본제국도 이 상해 조계 지역을 청국과는 완전히 별개의 도시국가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지금 엄청난 건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너의 일본도 서양과 같이 중국에 대해 시커먼 야욕을 품고 있는 것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렇게 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