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 회: 1권-29화 --> (29/268)

<-- 29 회: 1권-29화 -->

서양보다 나중에 상해로 진출한 일본은 마치 서양에 대한 열등감의 표출하는 것 같이 서양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계속해서 대규모 건축물을 지으며 일본 조계 지역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다.

다가닥 다가닥.

호텔에서 내준 마차는 마치 조계 지역을 관광시켜 주려는 듯 의친왕을 태운 채 천천히 이동을 한 끝에 황포강변에 있는 독일영사관에 도착했다. 

독일영사관의 청국인 시종이 열어 주는 마차 문을 통해 마차에서 내리자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이페르트 영사가 다가가서 반갑게 맞이했다. 

바이페르트 영사의 한국어는 마치 몇 년간의 한국 생활을 그대로 말해 주는 듯 충분히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능숙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상해 주재 독일제국 영사 바이페르트입니다.”

차준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대 서양 외교관들은 동양을 한 수 아래로 생각하는 경향에 사로잡혀 있어서 인종적인 우월감이 아주 대단했다.

그런 외교관들이었기에 동양에 주재를 하더라도 주재국 말을 배우지 않는 외교관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을 미리 숙지하고 있던 차준혁으로서는 독일 영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한국말이 나오자 그의 한국 주재 이력을 생각하면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반갑게 답변했다. 

“반갑습니다, 영사. 과인은 대한제국 의친왕입니다. 그런데 영사께서는 우리 한국어가 아주 유창하십니다.”

“주재국 말을 익히는 것은 외교관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하께서 좋게 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영사 각하께서 한국어를 배운 노력에 높은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움직인다고, 차준혁의 칭찬이 있자 바이페르트 영사는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그제야 아는 척을 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전에 한국에 있을 때 전하를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저를 기억하십니까?”

차준혁은 속으로 뜨끔했으나 담담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때 과인이 경황이 없어서인지 언제 뵈었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러실 겁니다. 몇 년 전 전하께서 유럽을 다녀오셨을 때 경운궁에서 잠깐 스치듯 인사를 나눴으니 말입니다.”

“그러셨군요.”

바이페르트는 몇 년 전과 많이 달라진 의친왕의 모습을 기억해 내며 인사말을 했다.

“그때 잠시 뵈어 전하의 모습을 확실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때 뵈었을 때보다 몸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차준혁은 확실치 않은 바이페르트 영사의 기억에 고마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하하! 과인이 외국에서 몇 년간 서양식으로 생활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 모습이 훨씬 좋아 보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영사 각하.”

바이페르트 영사는 그렇게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는 슈미트 소령을 차준혁에게 소개했다.

“인사드리게. 대한제국의 의친왕 전하시네.”

그러자 차준혁이 조금 전 능숙한 영어로 인사한 것을 본 슈미트 소령은 그 자신도 독일 악센트가 강하게 들어가기는 했지만 알아듣기에 충분할 정도로 유창한 영어로 인사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독일제국 육군 소령 헬무트 슈미트라고 합니다.”

차준혁도 능숙한 영어로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소령. 과인은 대한제국 의친왕이오.”

이어서 차준혁은 동행한 마쓰시마를 한국어로 소개했다.

“두 분 모두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마쓰시마 사령관이십니다.”

독일 영사와 무관은 당연히 친분이 있는 마쓰시마 대좌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지만 마차에 내려 의친왕을 두 사람에게 먼저 소개하려고 하던 마쓰시마 대좌는 바이페르트 영사가 먼저 의친왕에게 인사를 걸어 오는 바람에 소개해 줄 시기를 놓쳐 내심 은근히 불쾌했다.

더구나 일본어를 모른다고 통역을 대동한 의친왕이 능숙한 영어로 슈미트 소령과 대화를 하는 모습이 더 심히 못마땅했다. 그러한 감정을 가득 담은 말투로 바이페르트에게 비아냥거렸다.

“바이페르트 영사께서는 조선말도 아주 잘하십니다.”

바이페르트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능숙한 일본어로 답변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제 근무지였습니다. 외교관으로 주재국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능숙한 일본어로 지적을 당하자 마쓰시마의 얼굴일 벌개졌다.

“그, 그렇기는 합니다, 험 험!”

어색해하는 마쓰시마를 뒤로하고 바이페르트는 오늘의 주빈인 의친왕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전하,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안으로 들어서자 마쓰시마는 의친왕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제일이라는 사상이 골수에 박혀 있는 마쓰시마로서는 이것도 내심 못마땅했다.

독일영사관 안으로 들어가며 고진석에게 조금 전의 어색한 상황을 귓속말로 전해 들은 차준혁은 내심 고소했다. 그러나 상해에서 계속 외국과 접촉을 해야 하는 마당에 마쓰시마 대좌와 불편하게 지낼 수는 없었기에 앞으로 조심해서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준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차준혁에게 극진히 대한 것에 스스로 만족한 바이페르트는 접견실로 들어서서는 자리를 권했다.

“전하, 이리 앉으시지요.”

“고맙습니다.”

차준혁이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커피가 나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아주 향이 좋기에 차준혁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원두 이름으로 아는 척을 했다.

“커피향이 아주 좋습니다. 원두가 혹시 에티오피아의 아라비카입니까?”

원두가공이 취미일 정도 커피에 대해 남다른 지식을 갖고 있던 바이페르트 영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전하께서 커피에 대해 잘 알고 계시나 봅니다. 동양인들 중에서 이 커피의 원산지를 아는 사람은 제 주변에 단 한사람도 없었는데 전하의 식견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맞습니다. 이 커피의 원두는 에티오피아에서 직접 들여 온 아라비카 원두가 맞습니다.”

차준혁은 다시 또 짧은 지식으로 말을 건넸다.

“이 정도 좋은 맛이 나는 걸보니 영사께서 아라비카 원두를 생두부터 직접 블랜딩해서 로스팅하셨나 봅니다.”

차준혁의 말을 듣고 있던 바이페르트는 자신이 직접 생두부터 구입한 원두을 가공한 방법까지 설명했는데, 그런 그의 표정은 경탄을 넘어 거의 감동 수준이었다.

“어떻게 전하께서 커피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계시는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 정도 맛을 낼 정도라면 많은 정성이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과인이 알고 있던 짧은 지식이 맞았다는 게 더 반갑습니다.”

취미가 비슷한 사람은 바로 친구가 되듯 바이페르트 영사에게 차준혁은 십년지기를 만난 듯했다.

그렇게 커피를 놓고 두 사람이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자 다른 사람들은 이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페르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부탁했다.

“로스팅해 놓은 원두가 조금 있는데 전하께 그 원두를 선물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과인이 부탁할 일입니다. 직접 가공한 귀한 원두겠지만 영사께서 드시고 남은 것이 있으시다면 조금 나눠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하하, 본관으로서는 너무도 영광입니다.”

바이페르트는 그러면서 해박한 지식을 뽐내려는 듯 다양한 커피 가공 방법에 대해 설명했고, 차준혁이 자신이 아는 대로 말을 거들자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커피에 대해 말하던 바이페르트 영사는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차! 이거 저 혼자 떠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도 커피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 전하께서 어쩐 일로 저의 영사관을 방문하셨습니까?”

“영사께서 과인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러일전쟁 후의 대한제국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바이페르트 영사는 도와 달라는 말에 마쓰시마 대좌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