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회: 1권-30화 -->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참고로 저희 독일제국은 본국의 방침 상 어떠한 군사적인 도움도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하는 것은 미리 알아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과인도 군사적인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바이페르트 영사가 긴장이 조금 풀어진 채 물었다.
“그럼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대한제국이 귀국의 제철 기술을 도입하려고 하는데 영사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바이페르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철 기술을요?”
“그렇습니다. 우리 대한제국에서는 귀국의 기술로 최고 시설을 갖춘 제철소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바이페르트가 다시 한 번 더 되물었다.
“제철소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언가 말하려 하다 잠시 망설이던 바이페르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독일제국의 제철 기술이 유럽의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별 문제를 삼지 않는다면 수출에도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한국을 걱정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대한제국의 제철 기술력으로는 솔직히 제철소가 건설되었다고 해도 직접 제철소를 운영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준혁이 바이페르트의 지적에 바로 동의했다.
“바로 보셨습니다.”
항변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차준혁이 기술력이 부족하다고 순순히 시인하자 놀란 것은 오히려 바이페르트 자신이었다.
“예? 그걸 아시는 전하께서 어떻게 제철소를 건설할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까?”
“과인이 생각한 방법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제철소 건설은 하루 이틀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준비 과정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동의를 표시하듯 차준혁이 바이페르트를 바라보자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저도 제철소에 대해 자세한 부분은 잘 모르지만 발전소를 건설해야 하는 등 대규모 기반 시설이 동반되는 사업이라 준비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인이 세운 계획은 먼저 우리 대한제국이 사람을 파견하여 제철 기술을 익혀 기술력을 극복하고, 그동안 귀국에서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설비를 마련한 후 그들과 같이 들어오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낮은 기술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비용은 우리 대한제국이 부담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통역을 통해 두 사람이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것을 듣고만 있던 마쓰시마 대좌가 나섰다.
“제철소에 필요한 전문 기술 인력 수급은 문제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바이페르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술자 수급에 문제가 없다니요?”
마쓰시마 대좌는 마치 특혜를 베풀어 주는 표정으로 바이페르트 영사에게 설명했다.
“우리 대일본제국은 지난 1901년에 최신 기술로 지어진 제철소를 보유하고 있는 터라 한국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필요한 기술 인력을 지원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구태여 많은 사람을 유럽까지 보내 기술 전수를 받을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 그렇게 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차준혁은 산통을 깨며 거만한 표정을 짓는 마쓰시마 대좌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갈겨 주고 싶다는 생각이 울컥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꾹 참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놈아! 내가 네놈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대한제국이 막대한 돈을 들여 제철소를 건설하면 도와준다는 핑계로 기술자를 파견하여 주요 공정을 네놈들이 독점하려고 하겠지. 그렇게 주요 기술을 독점하고는 우리 기술자들은 단순 공정에만 투입시키려는 것이 네놈들이 생각한 수작일 것이다. 하지만 절대 어림도 없는 말이다. 네놈들 얄팍한 수작은 이미 충분한 학습되어 있다, 이놈아.’
이전 시대 역사에서 일본은 한국을 강점하고 있는 동안 한국인에 대해 철저한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고수했다. 일제는 강점 기간 동안 대륙 침략을 위해 한반도에 수많은 공장을 건설했으면서도 한국인에게는 공장을 가동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은 절대로 전수해 주지 않았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 기조는 심지어 인력 중심인 건축 현장에서조차도 적용시켰다.
이렇게 기초적인 기술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고 항상 그저 등짐이나 져 나르는 단순 노무자로만 부려 먹던 일제 때문에 해방이 되고 나서 한동안 제대로 된 건물을 지을 수 있는 한국인 기술자가 없어서 국가 재건에 엄청난 힘이 들었다는 사실을 차준혁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 지금은 잠시 네놈 말을 들어 주는 것은 원활한 협상 때문이라는 것만 알아라. 내가 이러는 것도 길어야 몇 달이면 끝이다, 이놈아.’
차준혁은 너무도 수가 빤히 보이는 마쓰시마 대좌의 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마쓰시마 사령관, 일본에서 우리 대한제국의 제철소 건설에 도움을 주겠다는 말이오?”
마쓰시마 대좌가 거만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물론 정확한 것은 본국에 보고를 드려봐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대본영에서 전하께서 도입하려는 제철소를 이미 적극적으로 도와 드리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봐서는 기술자 파견에 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고양이 쥐 생각하듯 말하고 있지만 마쓰시마의 내심을 알지 못하는 바이페르트로서는 대립각을 세울 것 같았던 처음의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의 대화가 의외로 상호 협조적으로 진행되자 크게 고무되었다.
“그렇다면 큰 문제가 없겠습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저희가 기술 교육을 시키고 그래도 부족하면 일본이 기술자를 파견시켜 도와준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지만 차준혁은 자신의 생각을 바이페르트에게 똑바로 전달했다.
“귀국에서 기술 연수를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제철소는 일본의 도움 없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을 위해 일본이 숙련된 기술자를 파견해 줄 수 있다면 인력 수급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차준혁은 일본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다며 마쓰시마 대좌의 제안을 거절하는 듯이 말한 것이다.
통역을 하고 있던 고진석은 상인 출신답게 들으면 불편해질 말은 살짝 포장해서 통역을 하고 있어서 마쓰시마 대좌는 차준혁의 그러한 의도를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한 바이페르트는 차준혁의 속내를 바로 읽으면서 역시 의친왕이 일본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라비카 커피로 이미 차준혁에게 마음을 연 바이페르트 영사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 사령관까지 나서서 한국의 제철소 도입을 지원하고 나서는 마당이었다.
“알겠습니다. 본국에 전하의 의사와 일본의 공식적인 반응을 최대한 빨리 보고드리겠습니다.”
차준혁이 바로 감사를 표시했다.
“이렇게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사 각하께서 오늘과 같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 대한제국이 꼭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커피 한 잔으로 경계 벽을 허물게 된 바이페르트의 적극적인 협조 태도로 독일영사관의 첫 방문을 무사히 마친 차준혁은 아라비카 원두는 물론 핸드 드립 기계와 커피를 내리는 도구 일체를 바이페르트에게 선물 받아서 호텔로 돌아왔다.
차준혁은 다음 날부터 오전에는 각국 영사관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오후에는 조계에서 열리는 파티에도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차준혁의 상해 생활은 냉탕과 온탕의 연속이었다.
낮에 방문하는 영국과 미국 등 서양 영사관에서는 서양 각국 영사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미적지근한 반응을 상대해야 했으며 저녁에 참석하는 파티에서는 파티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이끌 정도로 최고 인기를 구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