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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서양인에 비해 차이가 별로 없는 큰 키와 서양인에 가까울 정도로 흰 피부,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나 친왕이라는 최고 지위의 귀족 계급. 그와 함께 100년을 앞선 멋진 매너까지 차준혁은 최고였다. 차준혁이 처음 파티에 참석했을 때 데면데면하던 주최측의 대우는 하루 만에 최고 귀빈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첫날 파티에 참석하고 난 다음 날부터 상해에서 열리는 모든 파티의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저녁 때 할 일이 크게 없었던 차준혁은 파티 순례를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여인들에게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차준혁의 파티 참석 여부로 파티성패가 좌우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차준혁보다 더 신이 난 사람은 박요한 상위와 두 명의 경호원들이었다. 처음 차준혁이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했을 때 경호 문제로 우려를 표시했던 이들은 파티 참여가 계속되자 여인들의 육탄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차준혁은 의친왕이란 신분이 있었기에 속만 태우며 쉽게 접근하지 못하던 여인들이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경호팀에 접근했던 것이다. 물론 경호팀들도 차준혁에 뒤지지 않는 매너와 오히려 더 탄탄한 육체를 가진 덕분에 수없이 많은 여인들의 육탄 공세에 시달렸다.
하지만 경호팀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있던 터라 여인들의 육탄 공세를 적절히 거절 또는 이용하면서 상황을 즐겼고(물론 경호팀의 이러한 행동은 차준혁과 박요한이 서로 상의한 덕분이었다.) 이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낮이라고 완전 냉탕만은 아니었다.
의친왕으로 분한 차준혁은 상해에 온 기회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외교관은 물론이고 상해 조계 건설을 전담하고 있는 영국 건설국과 프랑스 건설국의 기술자들과 관리들을 만나 깊은 교류를 맺는 등 장차 진행될 경제 발전에 필요한 준비도 차곡차곡 해 나갔다.
물론 이러한 교류에는 거의 상해 일본군이 대동했지만 나라 발전을 위해 사람을 만나겠다는 의친왕의 행보에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같이 앉아 다른 생각을 한다는 사자성어대로 차준혁은 실제로 나라 발전에 필요한 일을 하고 있었고 일본군 감시인들은 이런 것들이 다 합병이 되면 자신들에게 득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차준혁의 행보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차준혁이 이렇게 밤낮으로 상해를 휘어잡고 있었지만 바이페르트 영사의 적극적인 호응과는 달리 독일 본국의 반응이 상당히 늦게 나왔다.
5월도 중순이 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바이페르트가 방문을 요청하는 전갈을 보내 왔다.
그의 직접 요청으로 차준혁은 일본을 배제하고 세 명의 경호팀만을 대동하고 독일영사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렇게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영사께서 불러 주셨는데 불원천리 달려와야지요. 그래 본국에서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차준혁의 기대에 찬 물음에 바이페르트가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말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본국에서는 대한제국의 지불 능력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불 능력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니요?”
“이번 러일전쟁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이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어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난다면 솔직히 말씀드려 본국에서는 한국은 일본에게 완전 장악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말이 완전 장악이지 그 말은 식민지가 된다는 말과 다름없었기에 막상 말을 듣는 차준혁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바이페르트의 표정이 한층 신중해졌다.
“불편하시면 그만 말씀드릴까요?”
“아닙니다. 계속하십시오.”
“본국에서는 제철소 건설은 적어도 2~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 만일 일본이 한국을 완전 장악하게 된다면 대금 지급에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일본도 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영국과 미국에 막대한 국채를 발행하였기에 재정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닙니까.”
차준혁은 벌써부터 나라 간 신용평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차준혁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먼전 제안을 했다.
“귀국이 원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본국에서는 한국에 제철소를 건설하고 생산 기술 또한 넘겨주는 것에는 합의를 보았습니다. 문제는 대금 지급 문제입니다. 그래서 본국의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건 절대 본 영사 개인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본국에서는 한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의 지급 보증을 요구합니다.”
바이페르트가 일본을 거론할 때부터 내심 예상했던 일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흠!”
차준혁은 신음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지금의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으로 독일이 충분히 이렇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속으로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을 추스르느라 잠시 시간을 가진 차준혁이 입을 열었다.
“영사 각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저도 이 문제만큼은 혼자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루의 시간을 주시면 충분히 본국과 상의해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담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영사 각하께서 얼마나 우리를 위해 애쓰신다는 것은 과인이 더 잘 압니다.”
차준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빨리 돌아가서 본국과 협의를 한 후 내일 다시 방문을 하겠습니다. 내일 방문도 오늘같이 혼자 오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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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혁은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서는 상해에 올 때 가지고 온 무전기로 상해 앞바다에 떠 있던 탐라호로 상황 보고를 했다. 탐라호 선장 홍기수 소좌는 차준혁의 구두 보고를 받자마자 바로 제주로 전문을 보냈다.
제주 관아 연희각에는 삼족오군 주요 지휘관들과 의친왕이 급히 모여들었다.
자금 마련을 위한 회의였지만 회의는 의외로 쉽게 끝났다. 그것은 의친왕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의친왕은 그동안 마라도함에 있는 컴퓨터에 보관된 수많은 자료와 함께 주요 지휘관들에게 들은 지식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이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서 있었다.
박충식이 의친왕에게 다짐을 하듯 다시 물었다.
“전하께서 황제 폐하를 충분히 설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과인이 어떻게 하든 아바마마를 설득하겠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부국강병을 위해 제철소를 건설하는 일이니 부황께서도 반드시 비자금을 내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차 비서에게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해 주십시오.”
차준혁이 상해를 떠나기 전보다 의친왕의 개혁에 대한 의지가 훨씬 더 확고부동한 것을 확인한 박충식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차 비서에게 전하의 말씀 그대로 지시하겠습니다.”
제주에서의 회의 결과를 지시받은 차준혁은 다음 날 오후 다시 독일영사관을 방문했다.
차준혁의 파격적인 대금 지급 방법에 바이페르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이렇게 지급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계약과 동시에 계약 총액의 30%를 선지급하고 나머지도 금액도 일정에 맞춰 지급할 용의가 있습니다.”
바이페르트는 두말하지 않았다.
“이렇게만 지급된다면 대금 문제는 전혀 없겠습니다.”
차준혁이 제안한 대금 지급 방법은 계약과 동시에 30%, 제철소 건설 물자가 독일을 출발할 때 20% 그리고 도착했을 때 20%를 지급하고 나머지는 기성에 따라 30%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거의 선지급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호조건이었다.
“그러실 것입니다. 하지만 대금을 우리 대한제국이 선지급하는 방식이니 이번에는 귀국 정부가 직접 제철소 건설에 대한 책임 준공 보증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모든 거래를 여기 상해에 있는 덕화은행에서 처리하는데 그 정도는 충분히 해 드려야지요. 본관이 책임지고 본국 정부의 책임 준공 보증을 받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또 부탁이 있습니다.”
건설 대금을 선지급하겠다고 하자 바이페르트의 자세는 당연히 아주 협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