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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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이며 1881년 신사유람단의 단장이었던 박정양의 추천으로 유길준 등과 함께 일본을 둘러보고 왔던 이상재가 지사들을 대표하여 의친왕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반갑습니다, 월남(月南, 이상재의 호). 오! 천민(天民, 유길준의 호)께서도 잘 지내고 있으십니까?”

“예, 전하.”

이상재는 물론 유길준과도 안면이 있는 의친왕은 두 사람을 보고 반갑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신 등은 요즘 일일신우일신하는 중입니다. 이게 모두 전하의 성은 덕분이옵니다.”

“하하, 매일 새로워지신다니 더없이 좋은 일입니다. 많이 보고 배우셔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써 주시기 바랍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밤을 낮 삼아서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있사옵니다.” 

인사를 나누고 있는 의친왕과 이상재를 바라보는 유길준은 벅찬 감동을 누르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아도 유길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고 그런 유길준의 모습을 보고 의친왕이 물었다.

“그래, 천민께서는 지내시기가 어떻습니까?”

“지난 보름 동안의 제주 생활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옵니다.”

“그래요? 개항 이후 신사유람단이 되어 서양 문물을 견학하고, 최초의 국비 유학생이 되어 외국에 유학했을 정도로 누구 못지않게 세계 정세에 밝은 천민께서 꿈을 꾸고 계실 정도란 말이지요?”

“그렇사옵니다.”

의친왕은 유길준의 속마음을 직접 듣고 싶었다.

“무엇이 천민을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게 합니까?”

“가장 큰 것은 삼족오군의 엄청난 무력입니다.”

“흠! 그러고요?”

“그리고 지금 제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징병제 같은 것들은 하나같이 신이 추진하고자 했던 일이라 더욱 마음에 드옵니다.”

“그렇습니까?”

유길준은 의친왕이 자꾸 자신의 생각을 말하라는 듯 계속해서 질문해 오자 당황했다. 하지만 지사들은 물론 삼족오군 지휘부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자 이왕 내친걸음이다 싶어 마음을 다잡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은 그동안 나라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혁을 하자는 실상實狀 개화사상으로 나라를 개혁시키려고 나름대로 애를 써 왔습니다. 그에 대한 일환으로 황제 폐하께 나라의 자주국방을 위해 수차에 걸쳐 징병제를 받아들이자고 강력히 주청 드렸지만 민중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폐하께서 불윤(허락하지 않음)하면서 아쉽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민중을 계몽시키기 위해 국문을 전용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 또한 구습을 벗어나지 못한 양반층의 반발로 졸저(자신이 지은 책을 낮춘 말)인 서유견문까지도 국한문을 혼용하여 책을 발간하는 등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혀야만 했습니다.”

유길준이 그동안 억눌린 심정을 토하듯 격하게 말을 하자 객사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개화를 위해 추진한 일들이 전부 벽에 부딪쳐 절망하고 있을 때 설상가상 러일전쟁을 빌미로 일본군까지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일본군이 나라를 갉아먹고 있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 자신을 그동안 얼마나 자학했는지 모릅니다.”

감정이 격해진 유길준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제주에 와 보니 그토록 신이 추진하고자 하던 모든 일들이 전부 진행형이었습니다. 과감한 행정개혁으로 부패한 관리들을 일소했음은 물론 기생충같이 나라를 좀먹던 일본인의 재산을 모조리 국고에 환수해 국고를 확충하고, 더 나아가 신이 그토록 원하던 징병제가 실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더 감격스러웠던 것은 민족의 자주 자립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국문 교육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추진하고 싶었던 신이 직접 실행되고 있는 현장을 눈으로 본 신은 참으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입니다. 거기에 일본을 물리치고도 남을 무력을 가진 삼족오군과 그분들이 보유하고 있는 신기술은 신에게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사옵니다.”

유길준은 격한 감정에 울컥 했는지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도 외세에 의지하지 않고, 외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우리만의 개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가 바라던 일입니까? 그리고 또 그 어느 나라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부국강병을 꿈꿀 수 있다는 사실이 신은 너무도 기쁩니다. 아니 이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신은 너무 너무 가슴이 벅차옵니다, 흑흑흑.”

유길준은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흐느꼈다. 

흐느끼는 사람은 유길준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나라가 힘이 없어 청국과 일본 등 외세에 당해 왔던 수모를 생각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유길준의 울먹임이 기폭제가 되어 그의 말이 끝날 쯤엔 객사에 있던 지사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벅차오르는 감격에 대성통곡하는 사람도 나왔다.

그들의 눈물은 이내 의친왕도 전염시켰다.

박창식은 옆에서 눈물을 터트리는 의친왕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돌리니 대부분의 지휘부들도 손으로 눈을 훔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박창식은 대 놓고 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모두 같은 심정이겠지. 비록 우리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는 해도 우리도 한민족인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이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가슴이 뛰겠지. 하지만 제대로 울 수도 없는 것이 우리들 처지인데 어쩌겠나.’

그 자신도 가슴 한구석에는 앞에 있는 우국지사들처럼 소리 내어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 있었지만 삼족오군을 믿고 통곡을 하는 사람들을 보자 울컥하는 감정보다 사람들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의 무게가 더 크게 다가왔다.

그렇게 한동안 눈물바다가 되어 속에 품고 있던 찌꺼기를 눈물과 함께 전부 쏟아내고 나자 모두들 후련해진 표정들을 지으며 장내가 진정되었다.

유길준도 격한 감정이 가라앉자 장내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신은 군주는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신봉하고 있사옵니다.”

쿵!

유길준의 열변에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유길준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상재가 당황해하며 급히 나섰다.

“이보시게, 천민. 전하의 앞이시네. 그 무슨 불충스러운 망발인가?”

하지만 유길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의친왕의 표정이 의외로 담담했다.

“아닙니다. 계속하세요. 과인은 천민의 품은 뜻을 가감 없이 듣고 싶습니다.”

이미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었기에 유길준은 의친왕의 재촉에 바로 대답했다.

“예, 그러시다면 신 계속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유길준은 대역죄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숨을 한 번 고른 후 말을 계속했다.

“지금 우리 대한제국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습니다. 솔직히 지금 상태가 계속된다면 종내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그것은 이곳에 와서 확인한 것이니 아마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식민지란 말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물론 같은 민족을 구해 주시기 위해 다른 세상에서 오신 삼족오군 여러분들이 있기에 지금 우리가 민족의 미래를 새롭게 열 희망에 부풀어 있지만 만일 이분들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순간적으로 객사는 조금 전보다 더욱 냉각되었다.

그때 이상재가 침중한 표정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결국 일제의 총칼에 무릎을 꿇게 되어 종내는 식민지가 되고 말았겠지.”

“그렇습니다. 분명 그렇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을 몰아내고 난 후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거야 당연히 대대적인 국정 개혁을 단행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말하는 소리에 유길준이 수긍하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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