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회: 2-20화 -->
“간교한 일본이 자신들이 해전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러시아와 종전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고 하겠군.”
“그렇습니다. 속은 다 썩어 나갈지라도 일본은 절대 자신들 입으로 연합함대가 사라졌다는 말은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절대 하지 않고 협상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연합함대 문제를 끝까지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 러시아의 입장에서도 불리한 협상은 절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양국 간의 종전 협상은 결코 한두 달 사이에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군. 그리고 이번에 제주에서 징병하는 병력을 전부 해군에 배속한다고 들었네.”
“제주가 섬이라 배를 다룰 수 있는 자원이 많아서 그런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알기로 징병 병력 전부가 해군에 배속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 징병된 장병 중 5,000명이 해군에 배속되고, 남은 3,000명은 제주대대와 같이 새로 창설되는 해병대로 배속시킨다고 들었습니다.”
의친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새로 징병된 장병들을 해군에 배속시켜 한 달만 훈련시키면 나포된 저 전함들을 운용시킬 수 있겠는가?”
“물론 그들만으로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삼족오군에서 함장님들과 지휘사관들이 대거 파견 될 것이니 한 달 정도면 일단 전함 기동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고 각종 전술 훈련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숙련시켜야 할 것입니다.”
“병력도 21척의 전함과 10척의 수송선을 운용하려면 지금보다 거의 배는 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포한 함정을 처음부터 전부 함대로 배속시키지 않고 일부 함정만 운용한다고 합니다.”
“아! 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겠군.”
이틀 후 탐라호가 인천에 도착했으나 인천 세관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의 눈을 속이기 위해 탐라호가 직접 내항으로 들어가지 않고 원항에서 의친왕 일행만이 보트로 하선해 인천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의친왕 일행을 내려 준 탐라호는 곧바로 배를 돌려 제주로 돌아갔다.
의친왕과 차준혁 일행이 인천항에 도착하자 일본 조계지에는 동해 해전의 승전을 기념하여 온통 만국기와 일장기가 내 걸려 있었다.
인천의 조계지는 일본 조계를 비롯해 청국 조계와 각국 조계 등 14만여 평에 이르렀다. 이 무렵 조계에는 일본인이 6,000여 명, 청국인은 1,000여 명이고 그 외 외국인은 200여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차준혁은 일본 조계의 모습에 예상대로 진행된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지만 빼곡히 세워져 있는 근대 건축물을 보자 마치 서양의 중국 침탈 교두보인 상해의 각국 조계지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해졌다.
“일본이 참으로 많이 진출해 있습니다.”
의친왕은 차준혁의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속내를 눈치채고는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대한제국의 현실이네.”
일본 조계지에는 영사관을 중심으로, 일본이 인천 항운업을 독점하기 위해 세운 일본우선주식회사와 자본 수탈을 위한 일본 제18은행, 일본 제58은행, 일본 제1은행 그리고 대마도 사람이 세운 해운회사인 군회조점 등이 100미터 정도의 거리에 근대식 건축물이 처마를 맞대고 늘어서 있어서 마치 수탈을 위한 온상으로 보였다.
그런 거리를 너무도 당당하게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돌아다니는 일본인들과 그 사이로 허름한 한복을 입고 허리까지 구부정하게 숙이며 마치 남의 땅에 온 듯 조심스럽게 돌아다니는 한국인 노무자들의 모습은이 너무도 대비되었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차준혁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후~! 하루빨리 저분들의 어깨를 펴 드려야겠습니다.”
의친왕의 입에서도 덩달아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이게 다 우리 황실이 용렬하고 부덕하여 저리된 것 아니겠나. 과인은 이번에 제주도를 다녀오면서 황실이 그동안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말 뼈저리게 통감했다네.”
“정말 많이 바뀌어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앞으로 과인은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계획이라네.”
대한제국을 개혁하고자 스스로 다짐을 하는 의친왕과 착잡한 심정의 차준혁 두 사람은 한동안 일본 조계를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청국 조계는 일본 조계 바로 옆에 있었다.
영사관인 변리청을 중심으로 그들 특유의 화려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일본인들같이 거만한 걸음걸이로 걸어 다니는 청국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차준혁은 일본 조계에 이어 청국 조계의 모습을 보자 그만 속이 끓어올라 더 이상 조계 지역을 바라볼 수 없었다.
“빨리 지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세.”
두 사람이 서두르자 다른 일행들도 불쾌한 기분을 털어 내려는 듯 발걸음을 바쁘게 서둘렀다.
의친왕과 함께하니 좋은 점이 있었다.
인천항에 내려 세관을 거치고 또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는 것 모두 의친왕 덕분에 단 한 번의 멈춤도 없이 그대로 무사통과였다. 이런 무사통과 끝에 차준혁이 의친왕과 함께 경인선특실에 앉자 기차가 바로 출발했다.
빠~앙~~~!
치~~익 덜컹.
칙~~폭 칙~폭…….
증기기관 특유의 소리를 내며 달리는 증기기관차는 생각보다 흔들림이 심했다.
차준혁이 증기기관차의 흔들림에 신경을 쓰느라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특실에 마주 앉아 있던 의친왕이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며 물었다.
“어째 차 비서는 기차를 처음 타는 사람 같아?”
“증기기관차라 그런지 생각보다 덜컹거림이 심합니다.”
“그래도 마차에 비하면 이정도 흔들림은 아무것도 아니야.”
“마차가 많이 흔들립니까? 상해에서 탄 마차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상해는 도로 사정이 좋은 가보네. 하지만 대한제국의 도로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 과인이 처음 마차를 탔을 때 하도 흔들려 멀미 때문에 아주 고생했었네.”
“그렇다면 흔들림을 방지하는 현가장치(懸架裝置, 서스펜션)라도 달아야 하지 않습니까?”
“과인은 그런 장치 이름은 모르겠고 본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미국에서 탑승했던 마차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는데도 흔들림이 크게 없었는데 아마 차 비서가 말하는 그 장치가 설치되어서 그랬었나 보네.”
“이제 막 현가장치가 상용화되기 시작하고 있는가 보군요. 그럼 미국에서는 자동차를 많이 타 보셨습니까?”
차준혁이 제주에서 의친왕이 자동차를 보고 아주 탐을 내던 생각이 나서 묻자 의친왕이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미국도 이제 막 자동차가 도입되고 있는 시기라서 그런지 차가 별로 없었네. 더구나 본국에는 지금 부황의 전용 어차 외에는 자동차가 없으니 탑승 기회가 없었다네.”
“사령관님께서 수복 후 전하께 최고급 자동차를 선물해 주신다고 하셨으니 앞으로 타실 기회가 많아지실 것입니다.”
의친왕이 기대감을 가득 담아 농담을 했다.
“그렇지. 맞아. 이거 삼족오군이 빨리 진군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하! 하! 하!”
의친왕이 조금 전의 어두운 분위기를 털어 내려는 듯 농담을 하자 두 사람은 일부러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즐거운 일이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즐거워진다고 하듯 그렇게 크게 웃고 나자 차준혁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인천에서 한성까지 기차로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차준혁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이게 인천에서 서울까지의 풍경이란 말인가. 이건 정말 역사 주변을 제외하고는 사진 속에서 보던 조선 시대와 거의 변화된 것이 없잖아. 그나마 한강을 지나고 나니 조금씩 근대 건물들이 서 있지만 대부분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것뿐이로군.’
기차가 용산역에 들어서자 의친왕이 차창 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는 차준혁을 보고 질문했다.
“무얼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가?”
차준혁은 마음속의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의친왕이 선선히 동조했다.
“하긴, 차 비서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해.”
“개항 이후 그동안 수없이 실시한 정부 개혁 정책이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한 것입니까?”
“개혁 효과는 둘째 치고 개항 이후 지금까지 대한제국이 한 것이라고는 당리당략이나 외세를 등에 업은 자들이 개혁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수없이 정부 조직을 바꾼 것뿐이라네. 그리고 범정부 차원에서 거국적인 개혁 운동을 벌이자는 생각을 한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당연히 국민 생활 개선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한 일투성이야.”
차준혁은 의친왕이 자신의 말에 동조뿐 아니라 자기반성 같은 자책까지 하자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