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회: 2-21화 -->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의친왕은 거침이 없었다.
“지금 대한제국 관리 중 개혁이란 위가 바뀌는 것뿐이 아니라 아래까지 전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네. 하지만 그것을 직접 실천하려고 나선 정치인들은 정말 몇 명 되지 않는다네. 참으로 통탄스러운 것은 과인도 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고.”
차준혁은 정치인들은 어느 때나 다 비슷해서 이전 시대 대한민국에서도 오죽했으면 국회의원을 ‘국해의원’이라고 부를 정도였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차마 그 말만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대한제국에는 제주에 모셔져 있는 우국지사 같은 선각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금 당장 그들이 대한제국을 이끌어 나갈 수가 없지 않은가. 과인이 또다시 말하지만 만일 삼족오군이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하,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
의친왕이 말을 하고 고개를 저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빠~! 앙~~~!
덜컹, 치~~익~~~.
말하다 가슴이 답답해졌는지 의친왕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었으나 기차가 출발하는 진동에 깜짝 놀라서 깨어났다.
“아차! 이거 과인이 너무 흥분했나 보네. 미안하네, 차 비서.”
“아닙니다. 오죽 답답하셨으면 그러시겠습니까.”
“후~!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군.”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전하께서 그런 일로 속을 끓이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 정말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 위로하며 말을 주고받는 사이 기차는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정거장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대문정거장역南大門停車場驛의 역사驛舍는 불과 10평 남짓 목조로 지어져 있어서 조금 전 지나온 용산역보다도 훨씬 작은 규모였다.
마치 시골 간이역 규모의 역사가 종착역이란 사실이 너무도 생경하여 이리저리 역사를 둘러보는 차준혁을 보고 의친왕이 물었다.
“역사가 이상해서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건가?”
“그게 아니고 간이역같이 너무도 작아서 그렇습니다.”
“간이역이니 당연히 작을 수밖에.”
“예? 간이역이요? 이곳이 종착역 아닙니까?”
“하하! 우리나라 철도의 종착역은 용산역이라네. 이 역은 한성사람들 편의를 위해 구간 연장한 노선에 세운 간이역이고 경의선 경부선 등 모든 기차는 용산역에서 출발한다네.”
차준혁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래서 조금 전 지나온 용산역이 훨씬 규모가 컸던 것이군요.”
“그렇다네.”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역사를 나오자 역사 앞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사동궁의 사람들이 마차를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한 마차를 타고 의친왕과 함께 사동궁에 도착한 차준혁은 동행한 다섯 명과 함께 사동궁 양관의 응접실에 둘러앉았다.
차준혁과 동행한 다섯 명 중 세 명은 차준혁과 같이 상해를 다녀온 박요한 상위와 경호 팀이었고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독일 연수생을 담당할 울산대 화학산업연구소 부소장 출신의 노선호 박사와 대한제국군 간부들의 친일 성향 조사를 하기 위해 동행한 미르 부대 정훈참모인 장주현 중좌였다.
이들이 둘러앉은 탁자 위에는 오색의 황실 전통 한과와 함께 차준혁이 상해에서 독일 영사 바이페르트에게서 선물 받은 에티오피아 산 커피가 예쁜 찻잔에 담겨 있었다.
커피를 맛있게 한 모금 마신 의친왕이 가장 연장자인 노선호 박사에게 말을 높이며 질문했다.
“본토에 오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제주도보다 이곳에 오니 정말 우리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겠습니다.”
“보시면서 많이 실망하셨지요?”
“솔직히 기차를 타고 한성에 올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나 한성 안으로 들어오니 성내가 생각보다 훨씬 정비가 잘 되어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몇 년 전 부황께서 대대적으로 한성 도로 정비를 하셔서 그나마 이 정도라도 정비된 것입니다.”
“그래도 전차가 운행되고 가로등까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기가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제철 기술을 배우는데 있어서 구태여 군기시 출신 장인을 꼭 데려가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대한제국에서 군기시 장인만큼 철을 잘 다루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너무 노골적으로 군기시 장인을 선발한다면 일본이 연수생 선발을 노골적으로 방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저희 예상으로는 일본이 아마 적극적인 협조로 나올 것입니다.”
의친왕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래요? 일본이 정녕 그렇게 나오겠습니까?”
“전비 고갈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일본 정부, 특히 대본영으로서는 대한제국 황실이 직접 나서서 제철소를 건설하겠다는 것에 쌍수를 들어 반기고 있을 것입니다. 대한제국이 자신들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본이기에 제철소 운용 기술의 습득을 위해 군기시 장인을 연수에 참여시키겠다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인도 제주에서 그럴 것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걱정이군요.”
“일본은 지금 동해 해전의 승리자로 되어 있습니다. 친일파들은 일본의 승리를 믿고 앞으로 지금보다 더 날뛰게 될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와 더불어 고문정치로 모든 것이 일본에 장악된 지금 일본을 거스르고 일을 추진할 관리는 아마 단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일본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제철소 도입을 용인해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본으로서도 함부로 손 댈 수 없는 황제 폐하의 비자금이 투입된 독일기술의 제철소 건설에 대해선 그야말로 손도 안 대고 코 풀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긴 부황의 비자금은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노선호 박사의 말을 듣고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의친왕이 이번에는 장주현 중좌에게 질문했다.
“과인이 장 중좌를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소?”
“아직 제가 대한제국 내부 상황을 모르니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이다. 그러면 그 문제는 과인이 부황을 뵙고 난 뒤 다시 상의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하십시오.”
의친왕이 두 사람과 의견을 주고받을 때 박요한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창문을 살펴보던 박요한의 눈에 이전에 양관에 침투했던 특수부대원들이 남겨 두고 간 도청 장치가 눈에 띄었다.
‘이곳에 있었군.’
박요한은 도청 장치를 의친왕이 모르게 떼어 내서는 창문 옆에 꽃병이 놓여 있는 탁자 밑에 은밀히 다시 붙여 놓았다.
그러고는 시치미를 떼고 창밖의 한성을 둘러봤다.
2층 사동궁 양관의 앞은 넓은 공터로 되어 있었다.
그 바로 옆으로 민씨 일가가 살고 있는 죽동궁을 비롯해, 조금 위로 운현궁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뒤에 2층의 창덕궁 돈화문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동궁 일대(관훈동)가 고대광실高臺廣室이란 말로 표현될 정도의 거대한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박요한이 다시 고개를 돌리니 늘어서 있는 기와지붕 뒤로 경복궁, 광화문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도 한눈에 들어왔다.
박요한이 열심히 밖을 내다보자 무엇을 보는지 궁금해진 차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뭐를 그리 열심히 보십니까?”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가 이전에 봤던 한성 기록 사진은 거의 초가집과 허술한 집으로 뒤덮인 것만 봐 왔잖아. 근데 보게. 이건 완전히 기와지붕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
“이 일대가 그래도 권문세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꼭 그렇지도 않을 거야. 난 이전에 봤던 초가집 천지의 한성 사진들은 거의 대부분 일본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사진일거라고 봐.”
“의도적인 연출이요?”
“그래. 일본이 강점 시절 한민족의 기를 누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무의식적으로도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도록 정신교육까지 실시하고 문화 말살 정책도 폈다고 알고 있어. 아마 그래서 남겨진 기록 사진조차도 한성의 이런 멎진 모습들은 의도적으로 빼 버렸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하긴, 일제 강점 시절 도시 개발이라는 핑계로 한성에 산재해 있던 문화재나 다름없는 오래된 건축물들을 마구잡이로 헐어 버린 것들이 헤아릴 수조차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 차 비서가 대학 때 역사 연구를 많이 해서 잘 알겠네.”
“수박 겉핥기 수준 정도입니다.”
“그래도 우리 같이 총만 쏴 대던 군바리보다는 훨씬 낳지.”
두 사람이 이렇게 말을 주고받을 때 의친왕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창 쪽으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