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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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이 박요한의 말에 거들고 나섰다.

“박 상위의 말이 크게 틀리지 않소. 과인이 제주에서 일본이 남긴 이 시대의 기록물을 살펴보니 우리 대한제국을 아주 형편없이 기록해 두었더군요. 물론 국력이 약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일제에 의해 남겨진 기록처럼 한성이 더럽고 지저분하지만은 않습니다.”

의친왕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의친왕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물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자신들의 손에 의해 망하게 한 대한제국에 대해 좋게 기록할 리가 만무했겠지요.” 

그렇게 자조적(自嘲的, 스스로를 비웃는)인 말을 하던 의친왕이 눈빛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절대 그런 기록을 남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과인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결의를 다지는 의친왕의 어깨로 유월의 저녁노을이 넘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의친왕은 차준혁을 데리고 황제에게 귀국 인사를 하러 경운궁으로 입궐했다. 후일 고종이 퇴위되면서 덕수궁으로 불릴 경운궁은 아관파천 이후 1년 만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온 황제가 경복궁에서 황후가 살해당한 비극 때문에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머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의친왕이 황제가 머물고 있는 석조전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내관이 종종거리며 계단을 내려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부황께선 어디 계신가?”

“접견실에서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궁내부 고문과 함께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라.”

 내관이 차준혁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이분은 뉘신지, 처음 뵙는 분입니다.”

“이번에 과인이 상해에서 만난 분이라 부황께 인사를 올리려는 것이다.”

내관은 의친왕이 자연스럽게 공대하는 말을 듣자 고개를 갸웃하였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바로 허리를 숙였다.

“예~ 그럼, 소인이 안내하겠사옵니다.”

차준혁은 계단을 오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차준혁의 눈에 비친 경운궁은 황제가 인질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비록 경운궁 내는 경위원(警衛院, 1905년 1월 호위대가 해산되고 경찰로 조직된 황궁 경비 조직)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경무관 다섯 명에 실질적인 경비 인력이라 할 총순摠巡이 16명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했다.

그나마 황제를 근접 경호할 수 있는 시종무관부가 별도로 있었으나 소속관원 중 열 명은 문관으로 무관이라야 무관장을 포함한 아홉 명뿐인 그야말로 속빈강정이었다. 

더구나 경운궁 외곽은 황궁 수비를 한다는 핑계로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 일본군 중대 병력이 에워싸고 있었다. 거기에 황궁의 경비를 맡고 있는 경위원과 시종무관부의 무장은 황제를 근접 경호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화기 소지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칼 등의 냉병기만 소지한 빈약한 무장 수준이라 일본군이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황제를 제압하고 모든 상황을 종료할 수 있었다.

거기다 대한제국군의 근본이라 할 수 있었던 친위대마저 일본의 병력 감축계획에 따라 지난 4월 해산되어 버렸고 한성 방위를 담당하던 시위대 병력마저도 절반으로 병력이 감축되어 있었으니 한성 일대는 무장해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상태라면 완전히 포로나 다름없어서 황제의 심리가 극도로 불안하시겠어.’

차준혁이 이런 생각을 하며 접견실에 도착했다.

접견실의 양옆에는 화려한 제복을 입은 시종무관들이 양옆에 서 있었고, 그 앞에는 내관과 궁녀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내관이 의친왕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접견실 안에다 대고 크게 외쳤다.

“의친왕 전하께서 입시하였사옵니다.”

내관은 그러면서 미리 지시를 받았는지 실내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을 열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고맙네.”

그렇게 들어선 접견실은 의외로 넓지 않았다.

양식구조인 접견실은 중앙의 옥좌에 황제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시중을 드는 내관과 시종무관이 그리고 다른 옆으로 콧수염을 기르고 양복을 입은 궁내부 고문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황제의 다른 옆에 서 있었다. 

의친왕 일행은 접견실 중앙에 앉아 있는 황제 앞으로 가서는 궁중예법대로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차준혁은 아침에 배웠던 만세를 부르듯 두 손을 들고 춤을 추듯 절을 하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인사를 하고는 예법대로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조금 숙였다.

의친왕이 한 발 앞으로 나가 황제에게 정중하게 인사말을 했다. 

“오랜만에 찾아뵈었사옵니다.”

의친왕이 황실 예법대로 기체후일향만강 등등의 긴 인사말을 하였고 인사를 받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짐은 무탈하다. 그래, 상해는 잘 다녀왔느냐?”

“성려(聖慮, 임금이 하는 근심을 높인 말) 덕분에 소자 무탈하게 다녀왔사옵니다.”

황제의 시선이 의친왕의 뒤로 향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자는 누구냐?”

“이번에 상해에 가서 만난 자이옵니다.”

“허어! 그래? 의왕이 처음 사람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왔구나. 뭐하는 자이냐?”

“이번에 소자가 상해에서 작은 일을 추진한 것이 있사옵니다. 그때 큰 도움을 받아 이번에 소자의 비서로 삼았습니다.”

“그렇구나.”

고종은 이미 의친왕(실제는 차준혁)이 상해에서 벌인 일을 알고 있었으나 시치미를 떼었다.

“그런데 상해에서 무슨 일을 벌인 것이냐?”

황제의 물음에 의친왕은 황제 옆에 서 있는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가 의식이 되어 잠깐 머뭇거렸다.

“허허! 무슨 일이기에 네가 이렇게 머뭇거리는 것이냐?”

“그게 아니오라. 아바마마께 따로 말씀을 올리고 싶어 그렇사옵니다.”

황제는 의친왕이 가토 마스오를 의식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손을 저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런 줄은 모르지만 가토 고문은 믿어도 되는 사람이니 여기서 그냥 말을 해도 괜찮다.”

황제의 말에 가토 마스오의 신임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가토 마스오는 전임 일본 공사로 전문 외교관이다. 

그가 공사로 있을 때 고종이 칭제 건원을 하였으나 한성의 외국 외교관들은 모두 무시했었다. 하지만 고종이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던 가토 공사는 한국 책략의 일환으로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른 나라보다 먼저 본국의 승인을 얻어 칭제 건원을 인정받아 주었다.

그렇게 되자 청국 등 다른 외국도 따라서 대한제국의 칭제 건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고종은 이를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가토는 그 후에도 고종의 비위를 잘 맞추었기에 고종의 신임을 크게 얻었다.

고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으면 가토가 주한 공사에서 물러날 때도 명치일왕에게 가토가 공사직에서 물러나지 않도록 특별히 부탁할 정도였다. 

그런 가토였기에 고문정치가 시작되자마자 궁내부 고문으로 발탁되어 다시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부황이 가토 마스오를 크게 신임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의친왕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소자 이번에 상해에서 전 독일 영사인 바이페르트를 만났사옵니다.”

그러면서 차준혁이 상해에서 협상한 내용을 황제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의친왕의 설명을 다 들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상해에서 독일 영사를 만났다는 말을 여기 가토 고문에게 들었다.”

“그러셨사옵니까?”

“가토 고문의 말로는 제철소를 건설하는 데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다고 들었다.”

“그렇사옵니다.”

“제철소를 도입하자는 의도는 좋지만 지금 우리 대한제국의 열악한 재정으로는 어려울 것 같구나.”

“하오나 아바마마, 철은 모든 공업의 시작이라고 할 정도의 아주 중요한 국가 기간산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한제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제철소는 꼭 도입해야 하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나라 재정으론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번에 독일에 산업 연수생도 1,000명이나 받아 주겠다는 큰 특전도 받아 냈습니다.”

시큰둥하던 황제가 1,000명이나 되는 산업 연수생을 받아 준다고 하자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뭐라. 독일이 1,000명이나 되는 산업 연수생을 받아 준다 했다고?”

“그렇사옵니다.”

의친왕은 제주에서 듣고 배운 산업에 대한 논리를 가지고 황제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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