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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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황제는 제철소 도입을 바로 결정해 주지 않았다.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대한제국 재정 상황으로는 어려워 황제가 비자금을 내놓아야 했기에 의친왕과 차준혁은 며칠 동안 계속 입궐하여 황제를 설득했다. 

내각에서도 정식 논의가 있었으나 재정財政이 무너진 대한제국으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황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많은 비자금을 내놓아야 한 탓인지 황제는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설득의 시간이 계속 흐르던 어느 날 황제가 자신의 최측근으로 수년간 내장원경을 역임한 군부대신 이용익을 은밀히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용익의 이런 은밀한 입궐은 경운궁을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던 일본의 정보망에 곧바로 걸려들었다.

용산의 한국 주차군 사령부 회의실에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을 비롯해 가토 마사오 고문 등 한성에 주재하는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였다. 

회의실 중앙에 앉아 있던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조선 국왕이 결단을 내릴 모양이로군.”

하세가와의 말에 가토 마스오가 동의했다.

“조선 국왕이 집사나 다름없는 이용익을 부른 것을 보니 그렇게 될 공산이 큽니다.”

“가토 고문.”

“예, 각하.”

“가토 고문이 보기에 조선 국왕의 비자금이 얼마나 될 것으로 생각하시오?”

“조선은 개국 초부터 별도로 왕실에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국가 재정도 내각과 황실로 이원화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확실한 규모는 국왕 이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참모장 오타니 기쿠조 소장도 거들었다.

“조선 국왕은 내장원을 앞세워 백동화 주조는 물론 광산 개발과 홍삼 전매권 등 조선에서 돈 될 만한 모든 이권을 독점하고 있으니 아마도 막대한 비자금을 보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토 마스오가 오타니의 말에 다시 동조했다.

“맞습니다. 조선군을 육성하는 자금도 전부 국왕의 호주머니에서 나올 정도니 제철소 건설 자금 정도는 충분히 감당하고 남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듣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다시 가토 고문에게 질문했다.

“조선 국왕이 조선소 건설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조선 국왕이 전함 구입을 위해 지난 몇 년간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모두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일본의 간섭으로 겨우 상선을 개조한 전함과 몇백 톤짜리 전함 1척밖에 보유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철소 건설에 대한 말이 있자 전함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 건설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우리 대일본제국이 러시아 함대를 격멸한 것을 보고는 다시 또 그 병이 도진 듯합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비웃었다.

“전함 건조 기술이란 것이 하루 이틀에 축적되는 것이 아닌데 조선소만 짓는다면 함정을 곧바로 찍어 낼 수 있는지 아는가 보네. 참으로 어리석은 조선 국왕이구나.”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이 비웃자 가토 마스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어쨌든 우리 대일본제국으로서는 조선 국왕이 스스로 비자금을 털어 제철소를 세우고 조선소를 짓는 것이 더없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소. 그렇게 때문에 대본영에서 제철소는 물론 조선소 건설도 적극 지원하라고 명령이 떨어졌소. 가토 고문은 조선 국왕의 신임이 두터우니 기왕이면 두 시설의 규모를 크게 짓도록 황제를 잘 설득해 보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기왕이면 빨리 추진하도록 설득도 겸해 주시고.”

“알겠습니다, 각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대본영 특급 기밀 전문을 통해 연합함대가 실종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앞으로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 걱정이 되어 빨리 황제가 결정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런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바람이 통했는지 다음 날 황제는 사동궁으로 내관을 보내 의친왕과 차준혁에게 입궐하라는 칙명을 하달했다.

칙명을 받은 의친왕은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했다.

“대궐에서 일부러 사람이 나온 것을 보니 드디어 부황께서 마음을 결정하셨나보오.”

“참으로 다행입니다.”

“자, 차 비서도 서두릅니다.”

“알겠습니다.”

의친왕이 서둘러 양관을 나서자 차준혁은 늘 입는 연미복차림으로 의친왕의 뒤를 따랐다. 

이날 경운궁 접견실은 한일 양국에서 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대한제국에서는 수상격인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군부대신 이용익 그리고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육군 부장 복장을 하고 입궐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일본 주차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 대장과 참모장 오타니 기쿠조 소장, 그리고 궁내부 고문인 가토 마스오와 탁지부 제정 고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까지 들어와 있었다. 

이날 한국 강점의 가정 선봉에 서 있었던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 공사는 동해 해전 문제로 일본에 나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의친왕이 차준혁을 대동하고 접견실로 들어서자 황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시종무관장인 민영환이 가장 먼저 고개를 숙여 의친왕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반갑습니다. 그간 별고 없었습니까?”

“전하의 성려 덕분에 무탈하게 지내고 있사옵니다.”

민영환과 인사를 나눈 의친왕은 한규설과 이용익 그리고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비롯한 일본 측 인사들과도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차준혁은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실물은 처음 봤다.

화려한 일본제국 육군 정복에 온 가슴에 휘장과 훈장을 붙인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비록 체구는 작았으나 옆에서 말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냉혹한 표정으로 옆에서 찬바람이 불 정도였다.

‘저자가 하세가와로군. 그런데 사진보다 훨씬 날카롭게 생겼잖아. 정말 성격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게 생겼어. 저런 인물이니 이전 시대 일제 강점 시절 총독으로 있으면서 무자비하게 무단 통치를 했었겠지. 그나저나 이자들 정말 왜놈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키가 작구나. 어떻게 하나같이 키가 내 어깨 정도밖에 오지가 않아.’

차준혁이 그렇게 생각하며 일본인들을 둘러보다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움찔.

하세가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차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며 시선이 돌려졌다.

‘이야, 눈빛 한번 대단하구나. 사람이 기세에서 밀린다고 하더니 나도 어지간해서는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데 하세가와의 눈빛에 얼마나 센지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다 돌아가네. 빌어먹을, 이게 무슨 꼴이야.’

차준혁이 이렇게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대전 내관의 목소리가 접견실에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의 입장에 접견실 사람들의 태도가 극명하게 나눠졌다. 일본인들은 비록 모자는 벗었지만 고개를 숙이는 정도로 예를 끝냈지만 의친왕을 비롯한 대한제국 인물들은 황제가 들어서자 모두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 폐하를 배알합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가 자신의 자리에 앉자 손을 들자 옆에 있던 내관이 소리쳤다.

“모두 평신平身하시오.~.”

그러자 일본인들은 고개를 들었고 대한제국 사람들은 바닥에서 일어나 몸을 단정히 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자세를 가다듬자 황제가 총리대신 한규설을 불렀다.

“참정대신은 따로 짐에게 보고 할 것이 있는가?”

“오늘은 없사옵니다, 폐하.”

참정대신의 대답을 들은 황제가 접견실에 모인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짐이 경들을 부른 이유는 제철소 건설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함이오.”

한규설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폐하, 제철소를 세우는 것은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오나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는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재원 마련이 어렵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짐도 조정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러시다면 외국에서 차관을 도입하려고 하시옵니까?”

한규설의 말에 황제가 시선을 탁지부 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에게 돌리자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지금 대한제국의 신인도로는 외국에서 차관을 도입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연히 대일본제국에서는 신인도와 관계없이 차관을 공여해 줄 수가 있지만 지금 러시아와 전쟁 중에 있어 도와 드릴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메가타 고문의 말을 통역을 통해 들은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에 짐이 용단을 내렸소.”

황제가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바라봤다.

“하세가와 사령관, 짐은 이번에 제철소뿐 아니라 조선소도 같이 건설하려고 하는데, 귀국의 생각은 어떻소?”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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