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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회: 2-26화 한성 탈환漢城奪還 --> (61/268)

<-- 61 회: 2-26화 한성 탈환漢城奪還 -->

연수생을 감시하기 위해 동행한 일본 무관은 전부 공병 출신으로 한국에 들어와 있던 공병 장교들 중 공병 중좌 와타나베 세이이치渡邊誠一를 선임으로 공병 대위 이노우에 이로쿠井上亥六 등 다섯 명이었다. 

다음 날 인천항에서 열린 독일 연수생 환송식에는 황제는 물론 내각 대신 대부분이 참석했다. 인천항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황제까지 참석한 환송식은 특별히 궁내부에서 주관하였고 화려한 예식을 좋아하는 황제의 의향에 따라 그야말로 거창하게 진행되었다.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환송식을 마치고 노선호 박사를 단장으로 한 1,000명의 독일 연수생은 항구에 모인 환송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인천을 출발했다. 이렇게 독일 연수생이 인천을 떠난 날이 9월 1일이었다. 

연수생을 태운 독일 여객선은 사흘 후 상해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석탄을 충분히 보급 받고는 다시 출발했다.

독일 여객선이 석탄 보급을 마치고 상해를 출발한 그날 저녁, 와타나베 중좌를 비롯한 다섯 명의 일본 무관들은 특전대원들에 의해 모조리 바닷속으로 수장되었다.

*한성 탈환漢城奪還

용산의 불행하고 오욕적인 역사는 1882년 임오군란 때부터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조선에 진주한 청국군은 임오군란이 진압된 후에도 이런 저런 핑계로 한성과 가까운 용산에 계속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러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청국은 대규모 병력을 더 파견하여 용산 일대에 주둔시킨다. 그렇게 청군 주둔지가 되었던 용산은 청일전쟁 중 조선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에 의해 청군의 주둔 시대가 종식되고 그 자리를 일본군이 차지하면서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이 주둔하게 된다.

청일전쟁이 끝나고 다행히 일본군이 철수하여 주둔지가 반환되기는 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군에 의해 다시 무단 점령하면서부터 이번에는 일본의 강점 시대가 시작된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점령군이었던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는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터를 잡게 된다.

그 후 한국전쟁 전 잠시 철군했던 미군은 인천 상륙 작전과 동시에 다시 용산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둔군의 이름만 바뀐 채 지금까지 1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비록 우리 땅이지만 우리 땅이 아닌 남의 땅이 된 것이 오욕의 용산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일본은 1개 여단을 인천을 통해 한성에 무단으로 진주시켜 용산에 다시 터를 잡고는 이후 일본군 12사단을 추가 파병한 후 한국 주차 일본군 사령부란 부대를 만든다. 

무단으로 한국 주차군 사령부를 만든 일본은 한일의 정서 조항을 내세워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하고는 용산 일대 토지 380만 제곱미터를 강제 수용한다. 

엄청난 면적을 강제 수용한 일본은 그 후 대대적으로 공병대를 투입하여 영구 주둔 시설물을 건설하기 서둘러 건설한다. 그 뒤 1905년 9월경에는 2층으로 된 본관 건물은 물론 사령관 관사를 비롯해 서양식 병영 등을 대거 완공시켰다.

이후에도 일본군 공병대는 공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사령부 영내에 각종 시설물 공사를 계속해서 지어 나가고 있었다.

특전 부대 1대대 대대장 김영문 상좌는 다른 대대보다 먼저 한성에 침투한 후 이태원 방면에 매복지를 마련하고는 일본 사령부의 상황을 매일 망원경으로 정찰하고 있었다.

“민 대위, 수리온이 날아올 시간이 얼마 남았지?”

김영문 상좌는 초초한 듯 시계를 들여다보며 1대대 본부 중대장인 민정수 대위를 찾았다.

“지금 시간이 9시 1분이니 정확히 59분 남았습니다.”

“시간이 참으로 안 가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초초해 죽겠습니다.”

민정수 대위의 대답을 듣자 김영문 상좌가 망원경을 들어 일본군 사령부를 다시 정찰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망원경으로 일본군 사령부 연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연병장에는 일본군은 물론 많은 수의 일본 민간인들이 명절인 탓에 모두 일본 고유의 의상을 입고 모여 있었다.

“일본 민간인들도 저렇게 많이 용산으로 몰려온 것을 보니 한성에 있는 일본인들 대부분이 참석한 것 같지 않나?”

민정수 대위도 망원경으로 연병장을 정찰을 하며 대답했다. 

“역대 천왕을 제사 지내는 날이라니 아마 강제로라도 한성에 있는 일본인들을 전부 모이게 했을 것입니다. 저렇게 아이들까지도 전부 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거의 모두 모였을 것입니다.”

“차준혁 비서가 하여튼 대단해. 어떻게 이날을 D-day로 잡았는지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일부러 적들을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될 수 있겠습니다. 잘하면 큰 충돌 없이 오늘 한 방으로 끝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야 되면 얼마나 좋겠어. 일단 저렇게 일본인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앞으로 있을 한성 공략이 아주 쉬워지겠어.”

두 사람이 바라보는 한국 주차 일본군 사령부 연병장에는 경계 병력을 제외한 사령부에 주둔하고 있던 전 병력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병력 옆에는 공사관 직원을 비롯한 한성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 민간인들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연병장에 일본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까닭은 이날이 바로 추분秋分이기 때문이다.

추분은 대정봉환 이후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민들의 충성을 강요하는 신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명치일왕이 제정한(실제로는 일왕을 앞세운 일본 내각에 의해서 제정되었지만) 역대 일본 천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추계황령제秋季皇靈際라고 하는 국가지정 제일祭日이었다. 

잠시 일본 사령부 연병장 일대를 관측하던 김영문 상좌가 망원경을 내렸다.

“민 대위, 각 중대별 준비는 잘 끝냈지?”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대대장의 지시를 받은 민정수가 통신관에게 지시했다.

“최 하사, 부대 공용 주파수를 열어라.”

“알겠습니다.”

김영문이 지휘하는 특전 1대대는 용산 일대에 매복지를 만들고 포진해 있었다. 민정수 대위는 곧 공용 주파수로 각 중대별 상황을 점검하고는 김영문에게 보고했다.

“대대장님, 확인 결과 모든 중대가 작계 위치에서 차질 없이 매복 대기 중에 있습니다.”

“다행이로군.”

 보고를 받은 김영문이 다시 망원경을 들자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참모장 오타니 기쿠조 소장을 비롯해 주요 지휘관들이 사령부 건물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 적 지휘관들이 예상보다 일찍 건물에서 나온다. 민 대위, 빨리 지휘 본부로 교신 때려라.”

지시를 받은 민정수가 들고 있던 무전기로 바로 지휘 본부로 교신했다. 특전 부대 지휘 본부는 지금의 동작동 국립 현충원 인근 한강과 노량진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관악산 자락에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는 1대대, 여기는 1대대. 본부 나와라.”

무전기에서 지휘 본부 통신장교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흘러나왔다.

“여기는 본부, 1대대 누구십니까?”

“1대대 본부 중대장 민정수입니다.”

“충성, 박관준 중위입니다.”

“그런가. 지금 하세가와를 비롯한 일본군 지휘관들이 건물에서 나오고 있다.”

“우리도 송골매 영상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때 지휘 본부 무전기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나, 강명철 소장이다.”

“충성! 민정수 대위입니다.”

“고생이 많다. 대대장 옆에 있나?”

“예, 바꿔 드리겠습니다.”

민정수가 무전기를 바로 김영문에게 건넸다.

“충성, 김영문 상좌 입니다.”

“김 상좌, 매복하느라 고생 많지?”

“아닙니다. 저보다 대장님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여기는 그래도 관악산 줄기라 운신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은데 1대대가 매복하고 있는 곳이 사람들 왕래가 많은 이태원 근방 아닌가. 며칠 동안 매복해 있느라 많이 힘들었을 거야.”

“매복과 후방 교란이 우리 부대 주특기 아닙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구나 20여 분 후면 이런 매복도 끝이 아닙니까?”

“그래, 잠시 후면 우리 땅에서 이렇게 숨어 있는 것도 이제 끝이지. 아무튼 고생해라. 얼마 안 남았다.”

“알겠습니다, 충성.”

삼족오군은 추계 황령제가 열리는 추분을 본토 수복을 위한 결전의 날로 정해 놓고 지난 몇 달 동안 제주 진위대대와 새로 징병된 제주 병력은 물론 주력군인 삼족오군 전 병력이 강도 높은 훈련을 계속해 왔다. 그렇게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특전 부대가 한성 탈환 작전을 위해 한성으로 침투한 것이 결전을 며칠 앞둔 9월 20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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