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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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개전과 동시에 인천항은 외국함정의 철수를 요구한 일본 때문에 모든 외국선박들의 입출항이 금지하다시피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지금 인천항에 떠 있는 수십 척의 증기선은 전부 일본선박이었다. 

마라도 함을 이륙한 20대의 회전날틀 중 10대는 월미도폭격에 동원되었지만 나머지 10대의 회전날틀은 인천항의 내·외항에 정박해 있는 일본선박에 하강작전을 실시하면서 모조리 나포하고 있었다.

미르부대가 인천지역을 접수하고 있을 때 인천역은 12시 용산역을 출발한 기차를 타고 온 특전부대병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처음 일본인들은 조선에 들어와서는 한반도 내륙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대부분 조계지가 있는 개항장 인근에 모여 살았다. 그러던 일본인들이 본격적 내륙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철도개통과 때를 같이하면서부터였다. 

경인선과 경부·경의선이 개통될 무렵 일본군의 힘은 한반도 전역에 미치기 시작해서 일본민간인의 내륙이동은 철도와 함께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경인선이 개통되고 4년이 지난 지금 경인선의 각 역 인근에는 일본인들 거주가 차츰 늘어나면서 각 역 주변 대부분의 상가와 여관을 일본인들이 운영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미리 파악한 삼족오군은 한성장악을 끝낸 특전부대병력일부를 열차에 탑승시켜 이동하면서 경인선철도역인근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속전속결로 모조리 제압한 것이다. 한성에 비해 작은 인천지역은 월미도폭격과 동시에 침투해 있던 병력을 투입 인명피해 하나 없이 장악할 수 있었다.  

조계지 장악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의 수륙양용장갑차가 도착했고 이어서 마라도에 탑재된 대형공기부양정이 전차를 비롯한 각종장비와 병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인천상륙부대는 1904년 일본군이 인천항에 상륙할 때 만들어 놓은 가설부교를 그대로 이용해 상륙했다. 이무렵 인천항은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선박접안시설은 한 곳이 있었다. 하지만 인천일대해안은 간척사업도 전혀 이뤄지지 않아서 썰물이 되어 물이 빠져 나가버리면 사방이 개펄천지가 되면서 접안시설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어쩔 수 없이 대양함대의 모든 함정은 외항에 닻을 내렸다. 이 대양함대 주변에 제물포해전에 자침한 6,600톤 급 러시아방호순양함 바라크(Varyag)와 포함인 코레츠(Koryeth)가 갯벌에 주저앉아 있었다. 

비록 자침을 했다고는 하지만 수심이 깊지 않은 곳에 가라앉은 방호순양함 바라크는 선체가 거의 온전히 들어나 있었고 포함 카레이츠는 피해가 컸는지 거의 절반 정도 눕혀진 상태였다.

황제에게 상륙작전의 성공을 알린 사람은 차준혁이었다. 아직 상호간의 입장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아서 삼족오군지휘관이 직접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이 뭔가 어색하고 이치에 맞지 않았다.

“폐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완료되어 이제 저희 삼족오군 대양함대가 인천앞바다에 무사히 닻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동안 차준혁의 설명을 마치 영화를 감상하듯 보고를 받고 있던 황제는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기뻐했다.

“장하도다. 정말 장하도다.”

황제의 치하의 말이 끝나자 민영환이 차준혁에게 질문했다.

“다른 곳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차준혁이 전면에 있는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상황판을 보고 설명했다.

“본토수복작전은 이단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먼저 1단계는 임진강이남 지역 수복으로 지금 우리가 장악한 곳은 한성과 이곳 인천 그리고 군산과 목포지역이 수복에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상황판에 그려져 있는 지도에는 한성과 인천지역일대와 전라도지역이 파랗게 칠해지고 있었다.

차준혁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내일 새벽 부산과 마산상륙작전이 제2함대와 해병대에 의해 전개됩니다. 이 상륙작전이 성공하면 경부선열차를 이용한 내륙수복작전이 한성과 부산에서 동시에 작전을 전개되며 이 경부선작전을 끝으로 1차 수복작전이 종료됩니다.”

설명을 듣던 민영환이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지금 삼족오군 병력이 얼마나 되는 것이오?”

“제주에서 징병한 병력을 포함해 약 이만 명 정도 됩니다.”

일제의 견제로 한직인 시종무관장이 되었지만 대한제국관리 중 가장 개혁적이고 두 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했던 민영환이 논리정연하게 질문했다. 

“삼족오군이 아무리 우수한 군사무기를 보유했다고는 하나 전쟁은 적과의 직접교전으로 끝나는 것이오. 지금 본국에 들어와 있는 일본군이 1개 사단뿐이라서 이만 명의 병력으로 이들을 물리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만주에 있는 일본군이 이십만 명이 넘게 진주해 있다고 하는데 병력숫자가 너무 적지 않소?” 

“그 문제는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민영환의 질문이 여기까지 이르자 비로소 송의식이 나섰다.

“대한제국군은 지난 4월 일본의 압박으로 대대적인 병력감축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병력을 다시 불러들일 계획입니다. 물론 이 병력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황제폐하의 칙명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렇게 되면 우리는 3만 명의 병력을 당장 추가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송의식이 황제를 바라보자 황제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도 주저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짐이 칙명을 내릴 것이오.” 

“고맙습니다. 이렇게 3만 명을 모집하고 지금 일본인들을 괴롭히고 있는 활빈당과 동학교도 등 의병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지원받는다면 1만 이상은 충분히 더 모을 수 있습니다.”

황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활빈당 같은 도적도 불러 모은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황제가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도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도적들을 불러들이면 만일 일본을 몰아낸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소? 더구나 동학교도들은 반역의 무리들이 아니오?”

“활빈당은 폐하께서 아는 것처럼 일반 도적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 이름대로 친일관료들과, 악덕지주 등만 공격해 재물을 약탈한 뒤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준 의적(義賊)입니다. 더구나 동학교도가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전부 탐관오리들의 학정 때문인데 일본을 등에 업은 친일관리들이 폐하께 그 실상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 그렇소.”

황제는 송의식의 말에 인정을 했으나 용안은 설마 하는 속마음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는 차준혁이 다시 나섰다.

“지금 마라도 함에는 폐하께서 대한제국상황은 물론 작금의 국제환경을 정확히 인식하실 수 있는 각종 영상자료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곳에 묵으시면서 이 영상자료들을 시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진은 좋아해 사진에 찍히기 위해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있는 것도 감수했던 황제는 영상이라는 말에 내용은 둘째 치고 흥미가 확 당기는 표정이었다.

“알겠다. 짐이 오늘 여기서 하루를 거하도록 하겠다.”

그러자 그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상선(尙膳 내시의 최고 직급)이 황급히 나섰다.

“폐하, 이곳은 배라 시중을 들어드릴 수 있는 아무것도 준비되어있지 않사옵니다. 자칫 수라라도 입에 맞지 않으시면 신은 그 불충을 감당하기 어렵사옵니다. 오늘은 환궁하시고 다음에 날을 잡으시어 다시 방문하는  것이 가한 줄 아뢰옵니다.”

충직한 상선의 말이었으나 황제는 바로 거부했다.

“아니다. 짐이 부덕하여 그동안 짐은 물론이고 대한의 모든 신민들이 일본에 얼마나 큰 곤욕을 치루고 있었느냐. 그런 우리를 구원해 주기위해 삼족오군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에 왔고 드디어 우리에게도 이제 일본을 몰아낼 희망이 생겼다. 짐은 일본잡배들에게 지어미까지 잃었다. 나라를 바로세우고 원흉을 몰아내는 일에 와신상담(臥薪嘗膽)도 시원찮을 판에 내 잠시 불편함이 무슨 큰일이더냐. 상선은 너무 심려치마라.”

가시덤불에서 자고 쓰디쓴 쓸개를 매일 핥으며 복수를 다짐했다는 와신상담의 중국고사까지 인용하며 속내를 비친 황제의 결정에 상선은 물론 누구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곧이어 상황실에서는 황제를 위한 영상자료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삼족오군 정훈참모부는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난 몇 개월 동안 상당한 준비를 했다. 

준비된 자료는 석조전 접견실에서 상영되었던 영상자료는 물론 부국강병에 관한 자료는 물론 삼족오군이 보유한 무기들의 화력시범영상자료와 각국의 정치구조까지도 망라되어 있었다.

이중 정훈부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입헌군주제에 관한 자료였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 영국을 선정했다. 이 당시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사례는 황제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충분할 정도로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황제가 영상자료를 시청하는 동안 마라도 함과 군수 지원함에 실린 장비들이 계속해서 인천항에 하역되고 있었다.  

한성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황제가 경운궁을 떠나자 특전부대지휘부는 황제의 칙명을 앞세워 관악산을 내려왔다. 한강철교를 도보로 건넌 지휘본부가 한성에 입성했을 때는 도성의 성문은 모두 특전부대와 시위연대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한성에 입성한 강명철은 육조거리에 있는 원수부가 자리했던 광화문 앞 구 삼군부건물에 지휘본부를 차렸다. 

이 일은 이근형 부령이 지휘하는 시위연대의 적극적으로 협조를 받아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황제의 칙명을 받아 모든 일이 진행되었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지휘본부가 차려지자 강명철의 지시와 함께 본격적인 친일파수색작전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수색작전에 시위연대의 활약은 정말 눈부셨다.

박승환 참령이 지휘하는 시위1대대는 가장 먼저 친일장교들의 온상인 육군무관학교를 접수했다.

그러나 황제의 칙명을 내걸고 시작된 육군무관학교접수는 한성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친일장교들 몇 명이 재빨리 도주하면서 반쪽 접수로 끝이 났다. 

무관학교를 탈출한 친일장교들은 은밀히 도성을 빠져 나가 일본군이 주둔해 있는 평양으로 가기위해 임진나루로 갔지만 이들은 아무도 임진강을 건너지 못했다. 임진강의 각 나루는 이미 전신선을 절단한 특전부대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친일장교들은 밤까지 기다려 임진강을 도강하려했으나 K-11의 주야간망원경에 포착되어 모조리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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