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회: 3권-7화 한반도수복 -->
사격을 마친 수리온이 다시 경고방송을 했다.
“다시 한 번 더 경고한다. 목숨이 아깝거든 무모한 반항을 더 이상 하지마라.”
그래도 몇 번의 반항이 더 나왔고 그 때마다 수리온의 기관총은 해당선박갑판을 걸레로 만들었다.
민간선박인 탓에 저항은 기관총난사로 끝이 났고 그 사이에도 계속 일본선박들은 백기가 내걸었다.
그러던 중 십여 척의 소형선박들이 사방으로 도주를 감행했지만 대기하고 있던 고속정들이 출동하여 기관총으로 그들을 모조리 수장시켜버렸다.
중소형 선박은 대부분 목선이라 기관총세례는 그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고 선체에 장갑을 두른 대형선박의 도주시도도 있었으나 역시 포위하고 있던 2전대의 표적지가 되면서 단 한 척도 부산만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물론 송도방면으로도 일부 중소형 선박들이 도주를 감행했으나 대기하고 있던 로미오의 기관총세례에 벌집이 되면서 그 자리에서 모조리 침몰되었다.
이렇게 사방이 막힌 일본선박은 조금 시간이 흐르자 모두 백기를 내걸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본선박에서 백기가 내걸리자 2함대는 고속정과 수리온을 이용하여 선박장악에 들어갔다.
나포한 선박은 수천 톤이 넘는 대형 수송선 수십 척을 포함하여 70여 척에 이르렀다. 이러한 민간수송선박의 손실은 일본의 수송체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게 된다.
2전대의 함포사격과 해병대에 의해 토끼몰이를 당한 일본인들이 초량일대로 다시 되돌아왔으나 수리온의 항복방송과 해병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한나절도 견디지 못하고 모두 항복을 하고 만다.
이렇게 부산이 손쉽게 함락된 것은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병력이 2개 중대 병력에 불과했고 이 병력조차도 함포포격으로 대부분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부산의 일본인들의 항복을 받아낸 2전대는 마산을 함락한 1전대와 부산에서 다시 합류했다. 합류한 2함대는 전함인 김충선 함과 순양함 4척 등 일본나포전함 5척을 이전의 대양함대였던 1함대와 합류시키기 위해 서해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기함 윤집과 흑벌무 그리고 잠수함전대 등 나머지 함정들은 동·남해 해상방어에 모두 투입되었다.
해상상황과는 별도로 해병대는 병력을 곧바로 수습하고는 일부 부산방어병력을 재외 한 전 병력이 기차를 이용하여 대구로 진격했다.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부산과 같이 2개 중대에 불과했다. 해병대는 3대의 수리온의 지원을 받아 이들도 별다른 피해 없이 제압할 수 있었다.
해병대는 대구에서 일본군잔적소탕을 하면서 하루를 묵으면서 일본민간인들도 전부 제압하여 포로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자 해병대는 드디어 증기기관차 앞에 태극기를 교차로 걸고는 위풍당당하게 대전을 향해 출발했다. 대구를 출발한 기차는 김천에 잠시 머물러 김천에 주둔하고 있던 소수의 일본군을 소탕하고 대구에서와 같이 일본인들을 모조리 포로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전으로 북상했다. 대전에 도착한 해병대는 한성에서 각 역에 있던 일본군과 일본인들을 소탕하며 내려온 미르부대와 역사적 상봉을 하게 된다.
대전역광장에서 이뤄진 양부대의 역사적상봉은 소문을 듣고 몰려나온 대전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양 부대는 대전 시내를 행진하며 주민들에게 수복의 기쁨을 알렸고 몰려나온 주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이렇게 대전을 위무하며 하루를 묵은 다음 날 두 부대의 귀경길은 그야말로 축제 길이었다.
한반도를 침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부선을 두 부대는 기관차 앞에 태극기를 내걸고는 몇 대의 기관차에 분승해서 각지의 주민들에게도 수복소식이 들어가라고 일부러 천천히 한성을 향해 북상했다.
말없는 발이 천리를 간다고 수복소식은 곧 하삼도 전역에 알려졌다. 그러자 귀경부대를 환영하기 위해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로 환영인파는 한성에 가까워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귀경열차가 한강철교를 건너면서 용산에서부터는 아예 기찻길 양옆이 환영인파로 뒤덮였고 종착역인 서대문정거장에 도착했을 때는 환영인파가 완전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정렬! 정렬.”
기차를 내린 선두부대는 정렬을 한 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어서 뒤를 이어 기차들이 속속 도착하자 지휘관들의 지시를 받은 양 병력은 오와 열을 맞춰 정렬을 했다.
이윽고 정렬을 마치자 공진규 해군사령관이 전 부대를 통솔했다.
“부대 차렷. 어깨 총.”
착! 착! 착!
병력이 마치 기계적으로 제식동작을 하자 환영인파들 사이에서는 감탄과 함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앞으로 가!”
정렬을 마친 부대는 공진규의 지시가 있자 한성을 향해 힘차게 전진을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는 부대를 보며 환영인파에서는 눈물과 함께 만세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러한 만세소리는 곧 모든 군중들의 거대한 합창으로 바뀌었다.
“만세!”
“만세!”
“대한제국 만만세!”
#한반도수복
9월23일 한성입성에 성공한 특전부대는 황제의 칙명을 앞세워 외세를 추종하던 무리들의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다. 외세추종세력은 친일파는 물론이고 친러파 등 외세를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려던 자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색출 체포되었다.
이완용 등 친일파관리들과 송병준을 비롯한 일진회원 등 거의 백여 명의 대표적 친일파들이 용산폭격 때 몰살당했지만 그보다 몇 배 많은 수의 친일파들이 일본을 등에 없고 한성일대에서 호가호위하며 활개치고 있었다.
개항이 된지 30년이 지난 1905년의 대한제국은 이런 친일파들이 완전히 자리 잡은 때였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과 개인적인 치부를 위해 공공연하게 친일파임을 앞세워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이 시기는 일본이 점점 강력한 힘을 발휘하자 친일파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던 때였다.
특이한 것은 군 장교 중 친일파의 숫자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일본은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나라답게 대한제국군을 무력화하고 친일화하기 위해 장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여기에 부화뇌동한 친일파들은 유능한 장교들을 선별해 마치 특혜를 주는 것처럼 일본육사로 유학을 보내 대부분의 장교를 친일파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특전과도 같은 일본유학은 대한제국군을 친일파로 천지로 만드는데 결정적 작용을 했다.
일본의 이러한 공작의 결과로 육군연성학교 교장 이기두를 포함 오유영, 윤명수, 윤석호, 피성호 유기성 등의 교관들은 물론 군법회의판사 보병부령 신재영(申載永)을 비롯한 대부분의 육군무관학교교관들 그리고 일선부대 지휘관 중 많은 숫자의 장교들이 친일파가 되었다.
한성을 수복한 삼족오군은 가장먼저 황제의 칙명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위원장에 대한제국 최초의 총리대신을 역임했던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겸 태의원도제조로 있던 심순택(1824)을 상징적으로 선임했다. 실무를 담당할 반민특위조사위원들은 지난 5월부터 제주에서 연수를 받으며 철저하게 민족의식이 배양된 애국지사들이 대거 임명되었다.
조사위원에 임명된 지사들은 민족자존감회복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기치로 시작된 대한제국최초의 숙정(肅正)작업에 조금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친일파들은 일본의 힘을 믿고 삼족오군이 한성을 수복한 것이 일시적일 것이란 생각에 반민특위조사에 어느 누구도 성실히 응하지 않았다. 이런 탓에 반민특위가 설치된 육조거리 삼군부 옆에 있는 구 사헌부건물에서는 연일 고성이 터져 나왔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군법회의판사 보병부령 신재영이 너무도 당당하게 조사위원 안창호에게 반박했다.
“아니?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나를 체포를 한단 말이오?”
“당신이 그동안 행한 친일행위를 한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것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자는 내 나름 우국충정의 발로였었소.”
“우국충정의 발로라고 했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당신이 실형을 선고했던 의병들이 전부 죄인이라는 말입니까?”
“나는 국가에서 정한 법률에 의거 국정을 문란하게 하는 폭도들의 죄를 물어 판결한 것이지 다른 사심이 있지는 않았소.”
안창호의 목소리가 격해지기 시작했다.
“의병이 폭도란 말입니까?”
“무리를 규합하여 관청을 습격하는 것이 폭도지 그럼 무어라 하오.”
너무도 당당하게 대답하는 신재영(申載永)의 말에 안창호는 너무도 기가 막혀 말을 잊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