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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평안도수복작전은 어떻게 되었느냐?”
황제는 두 사람이 접견실로 들어오자마자 전황부터 물어왔고 차준혁이 바로 대답했다.
“폐하의 성려덕분에 우리 국군이 무사히 승리를 거뒀다는 보고입니다.”
그러면서 차준혁은 간단하게 전황보고를 했다.
보고를 받은 황제의 용안이 크게 밝아졌다.
“다행이로고. 참으로 다행이로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있을 때 내관이 호외를 가져다 바쳤다. 황제가 호외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벌써 호외가 나왔더냐?”
“그렇사옵니다.”
“허허허! 이번에도 한성에 만세소리가 등천(登天 하늘로 오르다)하겠구나.”
황제가 크게 웃으며 기뻐하자 의친왕이 거들었다.
“그동안 일본의 수탈과 폭압에 웃음한 번 제대로 웃어보지 못한 백성들이었는데 얼마나 기쁘겠사옵니까.”
차준혁도 황제에게 고개 숙이며 축하했다.
“이 모두가 폐하의 황은(皇恩) 덕분이옵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짐이 무슨 은혜를 내렸다고 그러느냐. 이 모든 게 삼족오군 덕분 아니더냐. 만일 너희들이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우리가 이런 행복을 누릴 수가 있었겠느냐.”
역사대로라면 불과 두 달이 넘지 않는 11월17일 친일파들이 주동이 되어 강제로 늑약이 채결되면서 통감정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황제는 만감이 교차한 표정을 지었다.
의친왕과 민영환은 황제가 무엇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그들도 같은 심정이라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준혁은 세 사람이 감상에 젖는 모습에 구태여 끼어들 필요가 없었기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잠시 접견실이 조용해졌고 그러한 침묵을 깬 것은 내관이 고하는 소리였다.
“폐하. 박충식 사령관께서 드셨사옵니다.”
잠시 감상에 젖어있던 황제가 반색했다.
“오! 어서 뫼시어라.”
황제의 명에 접견실로 박충식 사령관이 참모장 송의식과 정훈참모 장주현을 대동하고 들어섰다.
박충식이 안으로 들어오자 황제를 제외한 의친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접견실 안으로 들어온 박충식은 두 팔을 들어 만세를 부르지 않고 쓰고 있는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는 적당히 허리를 숙여 황제에게 인사했다.
본래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절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황제는 마라도 함에서 돌아온 후 황명으로 이러한 허례허식을 제일먼저 철폐시켰다.
입을 먼저 연 것은 황제였다.
“어서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짐이 공(公)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하문하실 것이 있습니까?”
“평안도지역 전투가 무사히 끝났다는 말을 들었소. 고생하셨소이다.”
황제의 치하에 박충식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장병들이 합심하여 다행히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내일 함경도수복작전을 거행한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그곳은 거리가 멀어 이번에는 회전날틀이 투입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문제가 없겠소?”
“내일 원산·성진수복작전에서 비록 회전날틀이 투입되진 않겠지만 기계화 부대가 편제된 최정예병력 2개 대대가 참여할 것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박충식의 설명에도 황제가 걱정을 거두지 않았다.
“원산·성진에 동시작전을 전개한다던데 그 정도 병력으로 충분하겠소?”
“일본군이 원산에 1개 대대병력이 주둔해있고 성진은 러일전쟁이후 항구를 거의 폐쇄하다시피하고 있어서 소대규모의 경비 병력만 주둔하고 있고 해군의 지원을 해줄 것이니 크게 성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충식의 거듭되는 설명에 그제야 안심이 된 듯 고개를 끄덕인 후 황제가 말을 돌렸다.
“오늘 짐이 공을 기다린 것은 짐이 공에게 줄 것이 있어서요.”
황제는 그러면서 박충식의 반응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하명했다.
“승전색(承傳色)은 짐이 준비한 것을 가져오너라.”
황제의 명이 있자 왕명을 출납하는 내관인 승전색내관은 미리 준비한 황금색 비단에 쌓인 것을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옥좌로 올라가서는 공손히 무릎을 꿇은 뒤 두 손을 머리위로 높게 들어 바쳤다.
황제가 앉아있는 높은 옥좌는 일반관리는 올라갈 수 없고 좌우로 내관이 시종하며 황제의 왼쪽이 내관의 수장인 상선의 자리다.
황제가 상선에게 고개를 돌려 지시했다.
“상선은 이것을 반포(頒布왕이나 국가에 의해 널리 알리다)하라.”
“예, 폐하.”
황명을 받은 상선이 황금색비단을 젖히자 그곳에는 칙명이 적힌 두루마리와 함께 훈장과 휘장이 놓여있었다.
상선이 그 중 두루마리를 들었다.
“폐하의 칙명을 반포하겠소. 제신(諸臣)들은 모두 예를 표하시오.”
그러자 접견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허리가 일제히 굽혀졌다.
“칙명. 박충식을 대공(大公)위에 작위하며 내각총리대신에 제수(除授 왕이 벼슬을 내리는 일)한다. 대공의 지위는 황태자보다 높게 하여 짐의 바로 아래 둔다.”
대한제국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작위가 박충식에게 내려진 것이다. 그것도 대공으로 황태자보다 높게 지위를 규정해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한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지위를 내린 것이다.
“대공에게는 원수(元帥)의 지위를 내려 대한제국의 삼군을 통합통솔하게 하며 내각의 조각(組閣)에 대한 전권도 위임하노라.”
가히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이 박충식에게 집중된 것이다. 본래 칙명이 낭독되고 있을 때는 그것을 자르는 것은 안 되는 일이었으나 박충식은 생각지도 못한 작위와 권리가 주어지자 그런 예의는 무시하고 서둘러 입을 열려고 하였다.
그때 옆에 있던 송의식이 옷깃을 잡으며 박충식을 말렸고 그 사이 상선의 낭독은 계속되었다.
“대공은 스스로를 과인(寡人)이라 칭하며 제신들은 대공을 전하(殿下)로 높여야한다. 아울러 궁내부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에게 임시로 내주었던 저택을 다시 회수하여 대공부(大公府)로 삼아 대공에게 하사한다.········”
상선이 낭독하는 칙명에는 대공의 예우에 대한 세부규정을 비롯해 권한 등을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칙명낭독은 이후에도 꽤 오래 계속되었다.
차준혁은 황제의 칙명을 들으며 크게 놀랐지만 한 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황제께서 완전히 믿고 맡기시려는 것을 보니 마라도 함과 이곳에서 계속된 동영상시청이 효과만점이었는가 보네. 그런데 대공의 작위까지 생각하다니 이건 정말 예상외의 결과잖아. 대공이라면 황제와 형제라는 말인데 황제가 사령관님을 형제로 만드는 정말 절묘한 선택을 하셨군. 하지만 별 무리 없이 한반도에 안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삼족오군이 본토로 입성하려고 할 때 가장 걸림돌로 대두되었던 것이 바로 황제였다. 비록 제위동안 척신들과 외세에 눌린 힘없는 군주였지만 대한제국의 지주는 분명 황제였다. 삼족오군이 일본을 물리치고 나면 곧바로 국가부흥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국민들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그때 국민의 구심점으로서의 황제의 역할은 그 누가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삼족오군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삼족오군이 가장 경계한 것은 황제스스로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삼족오군과 반목하는 것과 대한제국출신 관리들이 황권파를 만들어 황제를 부추겨 사사건건 개혁에 발목을 잡는 경우였다.
이렇게 되는 경우 일본과 같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거나 황권파를 모조리 숙청해야 하는 최악의 경우가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랬기에 처음 삼족오군이 본토에 들어가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황제를 밀어내고 공화정을 실시하자는 과격한 의견도 꽤 나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제국은 황제를 무턱대고 밀어내면 그 뒤에 오는 혼란은 더 큰 문제였다.
그래서 고심 끝에 나온 계획이 대한제국을 입헌군주제로 체재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차준혁이 의친왕과 함께 한성에 입성하였을 때부터 황제에게 심리전을 벌이도록 한 것이다.
차준혁은 이 때문에 지난 몇 달 동안 한성에 머물며 황제에게 일본과 서양에 대한 주변 국제정세를 설명하면서 지금의 대한제국 혼자로서는 일본을 물리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황제도 이러한 상황은 알고 있어서 타국의 힘을 빌어서라도 일본을 몰아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는 여우를 피하려다 범을 만나게 되는 격이란 것을 황제에게 지속적으로 설득시켜 상당한 설득을 해 놓았다.
그 후 한성수복작전과 동시에 황제를 마라도 함으로 초빙하여 삼족오군의 무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면서 삼족오군에 무력에 대한 믿음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