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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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수용소에 재수감되면 편하게 수형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의도제방공사는 물론 한성일대 정부공사 공사장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여의도와 한성일대에서의 노역은 도주의 우려 때문에 팔과 다리에 족쇄와 차꼬를 찬 채로 노역을 해야 했지만 문제는 이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일본인들에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힘과 수탈을 당했던 한성주민들은 죄수들이 노역을 하는 곳을 일부러 찾아와서 인분이나 돌을 던지고, 때로는 침을 뱉거나 욕설을 하면서 온갖 인격적수모를 가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가한 수모에 조금도 반발할 수도 없었다. 만일 이 일을 조금이라도 반발을 하면 그날은 대한제국출신 경비병들에게 온 몸이 자근자근 밟혔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참혹하게 구타를 당했다. 구타를 하지 못하도록 지도하는 신군 출신 간부들도 이런 일 만은 모른척했다. 이런 수모는 거의 매일 반복되었고 인격적 모욕을 견디다 못해 많은 죄수들이 한강에 투신자살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성주민들이 가하는 인격적 모독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고 경비병들은 그런 한성주민들을 일에 지장이 없는 선이라면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민간인접촉이 별로 없는 광산 같은 오지현장으로 나가는 지원자를 모집할 때는 일본인죄수들끼리 엄청난 경쟁이 생길 정도였다.

그동안 여의도에서 갖은 모욕을 경험한 죄수들은 구태희 대위가 재수감시킨다는 말에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떨었던 것이다. 

잠시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기회를 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니 여의도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으로 알겠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부터 감독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있다면 지금같이 말로 하지 않고 혹독한 처벌을 받은 후 바로 여의도로 이송된다는 것을 미리 경고해 두는 바이다.”

구태희의 무서운 경고가 있어서인지 이후부터 죄수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간혹 말을 안 듣는 죄수들에게 반장들의 구타가 심심치 않게 가해지면서 죄수들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한국인반장 몇 명이 죄수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하여튼 일본 놈들은 꼭 맞아야 돼. 말로하면 안되고 어떻게 맞아야 알아들을 수가 있지.”

“자네 말이 맞아. 하여튼 저 놈들은 제대로 대접해주면 안 돼.”

“그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일단 때리고 봐야해.”

구태희 대위는 반장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와 같이 일본사람을 인격적으로 폄하하는 말은 이전시대 일제가 한국인들의 민족적자부심을 없애서 보다 쉽게 부려먹기 위해 쓰던 말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시절 일본인들은 위와 같은 말은 물론 ‘이래서 엽전은 안 돼.’ ‘조선인들은 한 명은 잘 하는데 모이면 싸워.’ ‘그래 조센징이 뭘 할 수 있겠어.’라는 등 아주 교묘한 말로 한국인을 비하했다.

또 일본경찰의 앞잡이가 된 한국인들은 이러한 민족비하 말들을 일본인보다 더 많이 쓰면서 자신들은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면서 한국인들을 무자비 하게 다뤘다. 정말 무서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인 스스로 이런 말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비하하게 된 것이다.

해방 후에도 한 동안 우리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안되면 꼭 민족비하발언이 입에서 나왔고 정부에서는 이러한 민족비하발언을 쓰지 말도록 특별 계몽할 정도로 말의 세뇌는 정말 무서운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던 삼족오군출신 중 일부 간부들이 포로가 된 일본인을 대상으로 일본민족비하발언은 쓰기 시작했다. 이런 비하발언을 들은 한성주민들은 그동안 일본인들에게 당한 것을 마치 한풀이하듯 너도나도 쓰기시작하면서 삽시간에 한성에 퍼졌고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쓰면서 일본인들을 비하할 정도로 퍼져버렸다.

구태희 대위는 한국에서 가장 큰 은(銀)광산이었던 부평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일본인죄수들을 이끌고 부평에 온 것이다. 정부는 국가개발에 들어갈 재원마련을 위해 이전시대 알고 있던 전국의 금·은 광산의 관련 자료로 전국적인 조사와 함께 대대적인 채굴을 시작했다.

9만여 명의 일본인죄수와 친일파들이 전국각지의 광산과 각종 중노동현장에 배치되었다.

이와 더불어 한반도 전체가 공사현장으로 변했다. 

해주일대의 군수공장건설을 비롯해 송림제철소와 조선소건설, 해주와 문경의 시멘트공장건설 그리고 전국각지의 도로공사와 철도공사 등 수많은 공사들이 전국적으로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또한 징병 전에 자원입대한 장병들과 재소집한 대한제국장병들을 훈련시키느라 전국각지가 고함소리로 메아리쳐졌다.

이렇듯 한반도전역은 수복과 함께 쇳물이 끓어오르듯 온통 들끓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주민들 사이에서 ‘스스로 굳세어 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사자성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굳세게 갖자는 사자성어가 퍼지는 것을 오히려 권장하자 자강불식은 곧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고 있는 국가대개혁작업의 표어같이 되어버렸다.

대한제국이 이처럼 온 나라가 용광로와 같이 들끓고 있을 때 일본대본영은 다른 이유로 발칵 뒤집혀졌다.

그것은 배정자 때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의 양녀이지만 대본영지휘관들 앞에서 한반도 상황을 설명하는 배정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배정자가 말을 끝내자 이토 히로부미가 다시 확인했다.

“네 말이 정녕 사실이더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이토 히로부미 옆에 앉아 있던 가쓰라 다로 일본총리도 배정자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대의 말이 정녕 사실인가?”

총리까지 자신의 말을 불신하자 배정자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여기계신 아버님으로 인해 더러운 조선에서의 삶을 버리고 위대한 일본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제가 어찌 거짓을 고한단 말씀입니까? 분명한 사실입니다. 만일 한 치의 거짓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저를 총살하셔도 됩니다. 총리각하.”

배정자의 자르듯 하는 말에 명치일왕은 물론 회의실에 모이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누렇게 변했다.

본명이 배분남(裵粉男)인 배정자(裵貞子)는 1710년생으로 아버지가 흥선대원군일파란 죄에 연좌되어 3살의 어린나이에 관비가 된다. 이후 어린나이에 관기가 되었으나 곧 탈출하여 1882년 일본으로 밀항하였고 갑산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의 소개로 1887년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배정자는 사다코(貞子)란 일본이름을 얻으며 나라까지 버린다.

그 후 일본정부에 의해 철저한 밀정교육을 받은 배정자는 청일전쟁을 틈타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자격으로 조선에 귀국한다. 본래역사에서 그녀는 그 후 대한제국은 물로 일제 강점기 때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며 당대 최고의 여자밀정으로 활동하며 위안부를 모집하여 전장에 내보내는 등 최악의 친일파로 활동한다.

삼족오군이 부산을 공략할 당시 배정자는 지금의 영도인 부산의 절영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러일전쟁 직전 대한제국은 황제의 신변안전을 위해 극비리에 평양으로의 천도(遷都)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천도계획은 황제의 지극한 총애를 받던 배정자에 의해 사전에 정보가 누출되었다. 

급박하던 시기 갑작스런 천도계획에 놀란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가 황제에게 급히 밀서를 보내 천도를 못하도록 공갈협박하며 계획을 무산시킨다. 상심한 황제는 천도계획을 누설한 범인색출에 대대적으로 나섰고 1905년 초 드디어 자신이 그토록 총애하던 배정자가 누설범인 것을 안 황제는 대노하여 그녀를 절영도에 유배시켰던 것이다. 18살부터 일제에 의해 철저한 밀정교육을 받았던 배정자는 이때가 36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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