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6 회: 3권-26화 --> (96/268)

<-- 96 회: 3권-26화 -->

배정자는 부산에 함포사격을 하던 2함대가 처음에는 러시아함대로 오인해 관전자의 입장이었었으나 곧 마스트에 걸린 태극기를 확인하고는 밀정의 촉각이 발동했다. 곧이어 은밀히 주변을 탐문한 결과 부산을 공략한 것이 대한제국군이란 것을 확신한다. 이에 배정자는 갖고 있던 돈과 패물은 물론 몸까지 제공하며 절영도의 어부를 매수하여 부산수복으로 어수선하던 10월 초 야밤을 틈타 대마도로 탈출에 성공한다. 

대마도에 도착한 배정자는 막부시절 대마도도주였던 종씨가문 종주의 도움으로 일본본토에 들어간 후 일본본토 중심부에 있는 히로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배장자의 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또 질문했다.

“정말 그 배들이 확실히 대한제국전함이더냐?”

배정자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분명 제 눈으로 조선국기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했고, 또 그 전함이 초량일대에 거주하던 본국동포들에게 무차별 포격을 감행한 것은 물론 부산에 정박해 있던 백여 척의 본국선박들을 격침시키고 나포하는 것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선에서 엄청난 일이 벌이지고 있는 것을 직감하여 목숨을 걸고 조선을 탈출한 것입니다.”

“그래 알았다. 그동안 고생했고 네 공이 아주 크구나. 고생했으니 그만 집에 가서 쉬고 있어라.”

“예 아버님.”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와 명치일왕에게 인사하고는 당당한 걸음으로 대본영회의실을 나갔다.

배정자가 회의실을 나가고 나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보고에 실내에 있던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동안 대한제국공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가 갑자기 십년은 훌쩍 늙어버린 얼굴이 되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 9월 23일부터 갑자기 조선과의 교신이 끊긴 것이 사다코(貞子)의 보고와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명치일왕이 누렇게 뜬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용암포와 의주를 함락한 것이 조선군이란 것이오?”

이토 히로부미는 배정자의 말을 몇 번 확인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뭔가 변수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신은조선은 절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해군력도 전혀 없던 조선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대규모함대를 보유할 수는 없습니다.”

역시 무거운 안색의 대본영참모총장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수도 의문을 표시했다.

“육군의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의 약해빠진 군세로 우리 대일본제국 정규 사단병력을 상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야마가타 원수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참모총장께서도 러시아군이 용암포와 의주를 점령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본관의 판단은 그렇습니다.”

“그럼 사다코가 보고 확인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후작각하의 영애인 사다코양이 부산에서 본 것은 러시아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조선 국기를 게양하고 부산주변의 소문을 낸 것일 뿐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조선은 우리의 간섭으로 전함이 단 한척도 없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어떻게 갑자기 상륙작전을 감행할 정도로 대규모 함대를 보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조선의 상황은 누구보다 후작각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본인도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잠깐사이에 반도전체가 적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대한제국 혼자벌인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소.” 

야마가타 원수의 나름대로 논리 정연한 설명에 이토 히로부미도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청일전쟁이후 한반도공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로서는 대한제국이 한반도를 장악할 군사력이 없다는 것을 거의 맹신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조선 혼자의 힘으로 불과 며칠 만에 조선반도전체를 장악할 군사력이 절대 없습니다. 더구나 반도에는 사단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수천에 불과한 오합지졸 조선군으로는 우리 대일본제국정규사단을 이길 수는 결코 없습니다.”

안색을 풀지 않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명치일왕이 야마가타 원수에게 질문했다.

“참모총장은 조선에서 일어난 일련의 상황이 모두 러시아군의 만행이라고 보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분명 러시아함대가 우리를 교란시키기 위해 조선 국기를 내걸었을 것입니다. 물론 육전에서는 조선군의 일부참전을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이는 러시아군의 보조역할에 불과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신은 확신합니다.”

야마가타의 대답에 육군대신 데라우치도 동의하고 나섰다.

“신도 총장각하의 의견과 같습니다. 단 한 척의 전함도 없던 조선이 갑자기 전함까지 편재된 대규모 함대를 보유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조선육군은 지난 4월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이 지휘하는 조선주차육군에 의해 대부분의 병력이 해산된 상태입니다. 더구나 대일본제국에 동조하는 장교들이 태반인 대한제국군이 우리의 눈을 속이고 비밀리에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러시아도 지난 쓰시마해전 때 발트함대가 격멸되었는데 그렇다면 어떤 함대가 부산을 공격했다는 것이오?”

“확인해 봐야겠지만 러시아의 다른 함대가 동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야마가타도 데라우치의 말에 적극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러시아가 보유한 다른 함대가 우리의 눈을 피해 부산을 공략했을 것입니다.”

육군을 대표하는 야마가타 참모총장과 데라우치 육군대신이 대한제국은 절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이 계속 제기되자 가뜩이나 배정자의 말을 믿지 않으려던 대본영분위기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상황이 러시아의 치밀한 각본에 의한 것이란 오판하게 된다. 

이렇게 한반도의 문제는 러시아의 침략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국민들을 오로지 다스릴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는 탓인지 십여만 명 가까이 한반도에 거주하던 자국국민들의 안전문제를 입에 올리는 참석자는 이상하게도 단 한 명도 없었다. 

명치일왕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만주에 진주해있는 병력을 돌려 우선적으로 조선을 정리해야 되지 않겠소?”

그 말에 야마가타 원수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폐하, 만주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병력을 돌리는 일은 제고되어야 합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오?”

“지금 만주에 있는 대일본제국군과 러시아군은 호각의 군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조선을 정리하려면 적어도 3개 사단이상의 병력을 빼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호각의 군세가 바로 무너져 적을 앞뒤로 맞이해야하는 최악의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본국은 추가병력도 파병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으니 조선은 일단 러시아군 주력인 하얼빈의 극동군을 상대하고 난 후 처리를 해야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야마가타의 전황설명에 명치일왕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한동안 생각을 하다 이토 스케유키 군령부총장에게 물었다.

“연합함대는 정말 찾지 못하는 것이오?”

일본해군을 대표하는 군령부총장 이토 스케유키 대장의 허리가 바로 굽혀졌다. 지난 5월 연합함대가 실종된 후 일본해군은 그야말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형편으로 조금 전 대한제국에 대한 격론에서도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지금까지 일본해를 샅샅이 훑고는 있으나 수병들의 시신과 부유물만을 계속 수습이 될 뿐 아직 뚜렷한 성과가 없습니다. 하지만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신다면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명치일왕은 지난 몇 개월간 의례적으로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대본영해군막료장인 이토 스케유키 군령부총장을 크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해군차관이며 선박건조를 담당하는 해군함정본부장(艦政本部長)인 사이토 마코토를 불렀다.

“사이토 중장.”

“예, 폐하.”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했다면 앞으로 모든 수송을 해상으로만 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소.”

“개전 초 이미 전국의 모든 선박에 총동원령을 내려놓았었기에 움직일 수 있는 배들은 지금 전부 수송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사세보에서 건조하고 있는 전함을 수송함으로 개조해서라도 수송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산과 인천에 나가 있던 100척이 넘는 수송선이 적에게 나포된 마당에 그 정도만으로는 부족할 것이오. 앞으로 당분간 해상수송이외에는 대안이 없으니 귀관은 선박확보에 최대한 주력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명치일왕이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