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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 회: 3권-27화 총칼 없는 전쟁 --> (9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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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열리고 있는 러시아와의 종전협상이 러시아의 무리한 항복요구로 인해 이 상태로는 아무래도 결론을 내기가 힘들 것 같소. 그렇다면 육군의 판단대로 러시아와 국가의 명운을 건 결전을 벌여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이오. 우리가 비록 전비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는 하나 러시아도 자국사정으로 쉽게 확전을 하지 못할 것이오. 양군의 결전에서 승산은 우리에게도 충분히 있으니 대본영은 이점을 염두에 두고 철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시오.”

일왕의 말에 어전회의 참석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숙여졌다.

“폐하의 명령을 명심하여 봉행 하겠습니다.”

러시아가 한반도를 침공한 것으로 결론을 낸 대본영어전회의는 앞으로 전개될 상황대책을 논의하느라 이후에도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밤이 아주 늦어서야 히로시마에 별도로 마련한 자택으로 돌아온 이토 히로부미를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배정자가 마중을 하며 웃옷을 받아들었다.

“아버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러시아의 각본에 의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배정자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 소녀가 본 것은 분명 조선 국기였습니다. 거기다 제가 탐문한 것을 종합해보면 조선군이 부산에 상륙한 것이 확실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다다미에 좌정했다.

“네가 보고 들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지만 네 생각에는 조선의 그렇게 많은 전함을 보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물음에 선뜻 대답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본 것은 분명 태극기였으나 그녀도 대본영까지 오면서 마음속에 계속 품고 있었던 의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물음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하던 배정자가 대답했다.

“솔직히 소녀 또한 조선의 국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입니다. 그러나 소녀가 본 것이 사실이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은 전시다. 물론 의문은 남겠지만 대본영이 결정을 내렸으니 무조건 그에 따라야 한다. 더구나 러시아는 영토가 넓어 동양족속들도 많이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 함대에 타고 있던 동양인들이 러시아의 동양족속들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이란 대본영의 결정에 나도 동의를 했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라.”

밀정은 정보수집이 임무이고 결정과 판단은 상부에서 하는 것이라서 설사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밀정교육을 받은 배정자였다.

배정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말에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조선반도가 러시아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네가 가장 먼저 가져왔느니 천황폐하께서 너에게 큰 포상을 하사하실 것이다.”

“아버님 덕분에 하해와 같은 황은을 받습니다.”

“앞으로도 대일본제국을 위해 노력을 다 해야 한다.”

“예, 아버님.”

이렇게 해서 배정자가 몸까지 바쳐가며 가져온 정보는 대본영이 나름의 각종근거를 붙여 러시아가 한반도를 점령한 것이란 오판을 내렸다. 이는 대한제국의 군사력이 그만큼 열악했다는 반증이었다.

배정자가 보고 들은 정확한 사실도 대본영이 믿지 않고 오판할 정도로 이때의 대한제국국력은 사실상 형편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오판한 대본영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전력을 확충할 너무도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배정자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질문을 했다.

“아버님, 조선반도가 막혔다면 만주로의 군수물자수송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지금으로서는 해상수송을 하는 수밖에 없다.”

“러시아함대가 바다를 장악한 형편이라 해상수송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만주주둔군을 반도로 내려 보내 조선을 우선 탈환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이토 히로부미가 고개를 저었다.

“대본영에서는 러시아군과의 대치상황에서 병력을 조선으로 돌리는 것은 치명타를 맞을 수 있다고 반대했다. 더구나 지금부터 겨울이라 병력이동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군수물자를 수송할 선박확보가 당면과제다.”

“수송선박이 많이 부족합니까?”

“그동안 극비에 붙이고 있었지만 조선반도를 돌아 요동반도로 물자를 해상 수송하던 수송선들이 계속해서 실종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본영에서는 조선반도를 이용한 육로수송에 전력을 기울였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산에 있던 대형선박을 러시아에 빼앗기는 바람에 지금 본국은 대형수송선이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그러시다면 아예 상해에 있는 외국수송선을 임차하는 방안은 어떻습니까?”

의외의 제안에 이토 히로부미의 눈이 커졌다.

“외국수송선을 임차한다고?”

“그렇습니다. 외국수송선을 임차한다면 비용은 들어가겠지만 러시아든 대한제국이든 서양국적 수송선을 격침시킬 수는 없을 것이니 물자수송도 안전해지지 않겠습니까?”

이토 히로부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거 참으로 좋은 방안이로구나. 내일 내가 대본영회의 때 제안을 해보마.”

다음날 배정자의 제안은 대본영에서 바로 채택되었다. 배정자는 부산소식을 전한 공적과 외국수송선임차계획입안의 공으로 일왕에게서 특별하사금과 함께 별도로 동경에 저택까지 하사 받는다.

그리고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외국수송선임차에 대한 전권을 쥔 협상대표로 선임되어 10여 명의 협상단을 이끌게 되었다.

#총칼 없는 전쟁

10월에 중순에 들어서자 박충식은 한성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공사를 광화문 앞 육조거리 삼군부 앞에 이번에 총리부청사가 된 구 의정부로 초청했다.

초청된 공사들은 청국공사 증광전(曾廣詮), 미국공사 모르간, 영국공사 조던, 독일공사 잘데른, 벨기에공사 방카르트, 프랑스공사 블랑시, 이탈리아공사 모나코 등 7명이었다.

러시아공사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과 국교가 단절되면서 강제로 한성을 떠났고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용산폭격 때 사망했다. 

그리고 남아있던 일본공사관직원들은 전원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어서 두 나라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공사들은 통역을 포함해 몇 명의 수행원을 대동했으나 총리부대접견실은 7명의 각국공사들과 통역관 1명만이 입장이 허가되었다. 공사들이 들어선 접견실 안에는 각국을 대표하는 공사들의 동등한 신분을 감안하여 원탁과 함께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고 공사의 자리 뒤에 통역이 앉을 별도의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20여 일 만에 만난 각국공사들이 서로 안부를 묻느라 대접견실 안이 잠시 소란스러웠다.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공사들이 자신의 지정된 자리에 모두 앉자 이현호가 능숙한 영어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총리비서실장 이현호입니다. 곧 있으면 대공 전하께서 드실 것이니 공사 분들께서는 잠시 환담을 나누시며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영국공사 조던이 그동안 연금 아닌 연금을 당했던 터라 불퉁한 목소리로 각국공사 중 가장 오래 한성에 주재하고 있는 프랑스공사 블랑시에게 질문했다. 

“블랑시 공사각하. 대한제국에 대공이란 귀족이 있었습니까?”

프랑스공사 블랑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대한제국에서도 작위제도를 새롭게 시행한다고 하던데 아마도 이번에 새로 만든 작위인가 봅니다.”

그동안 공사관이 강제 봉쇄당한 것에 기분이 좋지 않던 조던이 계속해서 비아냥거렸다. 

“흥! 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대공의 작위는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지만 블랑시가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각국공사관이 봉쇄된 보름동안 대한제국군이 일본을 완전히 몰아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영국공사 조던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래요?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서 들은 말씀입니까?”

“공사관을 출입하는 한국인직원에게서 들은 말이니 아마 틀림없을 것입니다.”

대한제국은 일본에 전비를 대준 미국과 영국공사관은 내외부인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으나 나머지 공사관들은 별도의 통지가 있을 때까지 자국에 한반도 상황을 알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외부인 출입은 상당부분 허용해 주고 있었다.

특히 산업연수생파견과 함께 수많은 공작기계를 도입하고 있는 독일공사의 경우는 황제가 몇 차례 황궁으로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총리대신 박충식이 만찬을 접대할 정도로 특별예우를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프랑스공사 블랑시가 한반도상황에 대해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말씀입니까?”

“며칠 전 러시아가 강제로 할양받으려던 용암포와 원산 등지까지도 완전히 수복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일본을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영국공사 조던이 프랑스공사의 설명에 크게 의문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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