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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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한국이 무슨 군사력이 있어서 일본을 몰아냈다는 말입니까?”

“듣기로는 하늘에서 신군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조던이 기가 막힌 듯 코웃음 쳤다.

“허참!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입니까? 그럼 하늘에서 제우스의 벼락이라도 떨어졌다는 말입니까?”

블랑시도 믿기 힘든 말이라 더 이상 답변을 하지 못하고 상당히 곤혹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하지만 지난 9월23일 이상한 것이 하늘을 날아다녔던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경운궁 바로 옆인 정동에 공사관이 있던 영국이었기에 조던은 당시 회전날틀의 직접 목격했으나 특전부대원이 하강하는 것은 직접 보지 못했다.

“본 공사도 그날 이상한 물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목격을 했지만 그 물체는 단지 지상에 있는 일본군의 눈을 현혹시키려고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조던의 억지스런 주장에 블랑시가 더 이상반박하지 않았다.

“하여튼 지난 보름 사이 엄청난 격변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합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미국공사 모르간(dwin V. Morgan)이 끼어들었다. 

모르간은 10년간 주한미국공사로 재직하며 한국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 왔던 알렌공사의 후임이다.

그동안 알렌미국공사를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던 일본이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고종황제의 요청을 미국정부에 수차례 전한 알렌을 비판하면서 강력하게 미국에 항의하였다. 친일파인 미국대통령 루즈벨트가 이런 일본의 항의를 받아들여 알렌을 해임하면서 지난 6월 한성에 부임한 친일파외교관이다.

“러시아군이 혹시 대한제국군과 연합한 것은 아닐까요?” 

모르간의 물음에 대한제국의 힘을 평가절하하기 바빴던 영국공사 조던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모르간 공사께서 잘 보셨습니다. 군사력이 형편없는 대한제국군의 독단으로는 일본과 절대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본 공사의 판단입니다. 아마도 지리를 잘 아는 대한제국군이 길잡이가 되어 러시아군대를 끌어들였기에 불과 보름 만에 러시아가 한반도를 장악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한성에도 러시아군이 진주해야 하고 러시아공사도 다시 입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던은 순간 말이 막혔으나 청산유수와 같은 달변으로 풀어갔다.

“그거야 러시아와 대한제국과의 협정에 따라 병력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이고 공사부임 또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러시아공사가 서둘러 부임했는데 일본군이 또 다시 한성을 점령해 공사가 또 다시 굴욕적으로 추방된다면 이는 부임하지 않은 것만 못하지 않겠습니까?”

조던이 이렇게 단정하듯 말을 하자 앉자있던 다른 공사들도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황을 대한제국군에게 직접 들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독일공사 잘데른은 내색도 하지 않고 이들의 작위적(作爲的)이기까지 한 대화를 못 들은 척했다. 

잠시 동안 각국공사들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고 있을 때 총리부직원의 외침이 들렸다.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공사들은 간단한 한국어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직원의 외침에 예의상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박충식이 총리부대접견실로 들어섰다. 

박충식은 대한제국군복차림으로 황태자와 동격의 원수계급장을 달고 대한제국최고훈장인 금척대훈장을 패용(佩用)한 당당한 모습이었다. 

각국공사들은 처음 보는 박충식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모두들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껏 그들이 봐온 대한제국사람들은 일본의 압박에 위축되어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거기다 몸집까지 작아 외국인들의 눈으로는 보잘 것 없다고 느껴질 정도의 사람들만 보아 왔었다.

그런데 각국공사들은 자신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체구와 무장특유의 형형한 눈빛을 한 박충식을 보자 은근히 압도되는 기분까지 들었다.

박충식이 중앙에 서자 이현호가 사회자로 나섰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참석자들이 자리에 앉느라 잠시 소란스러웠다. 

“지금부터 새로 총리대신에 취임하신 대공전하와 각국 외교사절과의 공식접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대공전하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과인은 대한제국대공위에 있으며 이번에 총리대신에 새로 취임한 박충식이라고 합니다.”

이현호의 영어통역으로 박충식의 인사말은 정중하고 간단했지만 오히려 절도가 있어 공사들에게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박충식의 인사가 있자 외교사절을 대표한 프랑스공사 블랑시가 각국공사들을 소개했고 소개가 끝나자 박충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사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직접 가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외교적으로는 파격이었지만 박충식의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공사들이 오히려 미안해 할 정도였다.

이렇게 서로간의 인사를 나누고 다시 자리에 앉자 박충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많이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세계최강국가의 외교관이란 자만심에 가득 차있어서 그만큼 불만도 가장 많았던 영국공사 조던의 입이 누구보다 먼저 열렸다.

“도대체 각국을 대표하는 공사를 이렇게 강제로 억류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이건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니 공사관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귀국의 경비 병력을 풀어 주시고 이전에 압류해간 무선 통신기를 돌려줄 것을 귀국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하지만 박충식은 느긋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공사님들의 항의가 많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러시다면 본 공사의 요청을 들어주시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은 일본과 전쟁을 치루고 있어서 곤란합니다. 잠시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일본과의 전쟁과 본국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당장 원상 복구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조던이 너무도 당당하게 요구하자 박충식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지만 조던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대영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인 본 공사는 다시 한 번 더 귀국에 정식 요청합니다. 모든 것을 원상복구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조던의 주장에 억지가 섞여 있기는 하나 외교공관을 통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박충식은 잘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보다 일본과의 전쟁이 더 중요했다.

“이보시오. 영국공사.”

박충식이 바로 옆자리에 앉은 조던을 노려보자 그 형형한 눈빛에 조던이 잠시 움찔 했다.

“우리 대한제국이 이렇게 주한외교사절들을 잠시 통제하는 것이 영국과 미국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박충식의 말에 조던과 모르간이 동시에 반발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때문이라니요?”

“우리 미국이 귀국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반발하는 두 명을 잠시 노려보던 박충식이 이현호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현호가 가지고 있던 문서를 들며 설명했다.

“지난 7월29일 일본의 동경에서 일본내각총리인 가쓰라 다로와 미국대통령의 전권을 위임받은 전 필리핀 총독 월리엄 태프트 육군 장관이 비밀 회담을 가진바가 있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모르간 미국공사님?”

이현호의 갑작스런 추궁에 미국공사 모르간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목소리까지 심하게 더듬었다.

“아, 아, 아니? 어떻게, 그걸 어떻게 알아낸 것이오?”

접견실에 있던 각국공사들은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했다는 촉각에 모두들 바짝 긴장하며 이현호를 주시했다.

“우리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미국과 일본 양국 간 비밀 회담이 있었느냐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참석자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미국공사 모르간은 10월 중순의 선선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그, 그건,··”

확답을 하지 않았지만 모르간의 당황해하는 모습은 이현호의 추궁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외교관으로서 실태(失態)를 한 모르간은 이제 와서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기에는 때가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후! 회담한 적이 있소.”

모르간의 시인에 놀란 것은 영국공사 조던이었다.

“아니 그런 중요한 회담을 어떻게 동맹국인 우리영국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오?”

이현호가 두 사람의 대화에 개입했다.

“그건 양국 간의 극비회동이라서 어느 나라에도 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건 영국이 비록 동맹국이라도 말입니다.”

조던은 이현호의 말에 놀아나는 것이 화가 났으나 이런 단초를 제공한 모르간이 더 화가나 내심 이를 갈았다.

‘미국이 일본과의 밀약을 맺고도 동맹국인 우리에게까지 숨기다니. 우두득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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