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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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의 내심은 아무도 몰랐으나 그가 이를 가는 소리는 접견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이현호는 그런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들고 있는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첫째,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친일(親日)적인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둘째, 극동의 전반적 평화유지에 있어서 일본·미국양국정부만의 상호 이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다. 

셋째,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極東)지역의 평화에 직접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 

웅성웅성

이현호의 낭독이 끝나자 접견실은 갑자기 의견을 나누는 공사들로 인해 웅성거렸다. 

영국공사 조던은 그동안 어느 나라보다 확실한 동맹을 유지하며 아시아를 함께 공략하던 미국이 결정적이 순간에 영국을 배제하고 일본과 밀약을 맺은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조던은 노련한 외교관답게 분을 삭이고 냉정한 표정으로 미국공사 모르간을 추궁했다.

“모르간 공사. 방금 비서실장이 읽은 문서가 사실이오?”

“····”

조던의 추궁에 모르간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도 필리핀과 한국을 미국과 일본 양국이 나눠 갖는다는 밀약을 맺었다는 비밀전문은 받았지만 극동문제를 미국과 일본 양국만이 공유한다는 내용은 전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르간이 즉답을 하지 못하자 조던은 밀약내용이 사실로 시인한 것으로 판단했다.

“앞으로 귀국과의 동맹을 심각하게 재검토하라는 건의를 본국에 정식 송부하겠소.”

조던의 강경발언이 있자 모르간이 그제야 변명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잠시 시간을 주시면 본국에 이 문제를 정식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비서실장의 문서가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오?”

“그, 그건···”

모르간이 다시 확실한 답변을 하지 못하자 조던은 더 이상 변명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양국공사들이 주고받는 말을 빠짐없이 듣던 다른 공사들의 안색이 아주 심각해졌다.

그 중 독일과 프랑스공사의 안색은 더 침중했다.

박충식이 무거운 목소리로 미국공사 모르간을 호명했다.

“모르간 공사님.”

모르간은 박충식이 무슨 추궁을 할지 알기에 목소리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예. 전하.”

“독립국인 우리 대한제국의 명운을 귀국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오?”

“·····”

“전임 알렌공사의 노고 때문에 본국은 미국에 아주 우호적으로 대우하고 있었는데 그런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미국은 아예 일본의 침략야욕에 편승해 대한제국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습니까?”

“····”

거듭된 추궁에도 모르간이 답변을 하지 못하자 박충식은 이번에는 잘데른 독일공사를 호명했다.

“독일공사님.”

“예, 전하.”

“독립국을 다른 나라에 넘기려는 행위는 적대적인 선전포고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잘데른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다른 공사님들께서는 본인의 말에 이의가 있으십니까?”

박충식이 일부러 다른 공사들에게 질문을 하자 누구도 나서서 미국을 두둔하지 않았다. 

“이 실장.”

“예, 전하.”

“지금 이시간부로 미국공사관을 폐쇄하라. 미국이 일본의 야욕에 손을 들어줬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게 되면 전국에 있는 미국인들의 안전이 크게 위협받을 수 있으니 한반도에 있는 미국인들을 모두 한성으로 불러들여 공사를 비롯한 공사관직원전원과 함께 미국과 우리가 별도의 협상이 있을 때까지 공사관에 거주하도록 조치하라. 그리고 모르간 공사도 지금 즉시 미국공사관으로 모셔라.”

“예, 전하.”

박충식의 초강경 대응에 모르간이 크게 반발했다.

“전쟁이 터지더라도 외교관은 면책특권이 있습니다. 더구나 무력을 갖고 있지 않는 본국국민들까지 연금을 시키다니 이럴 거라면 국제법의 의거 차라리 우리를 추방하십시오.”

모르간의 반발에 박충식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

“엄연한 독립국을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타국에 넘기는 행위를 한 미국이 무슨 국제법의 보호를 받겠다는 것입니까?”

“그건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공사는 미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인데 지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또한 만일 우리나라국민들이 귀국이 일본과 밀약을 맺어 나라를 일본에 넘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각지에 있는 미국인들이 과연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모르간은 순간적으로 한국인들에 의해 몰매를 맞고 죽어나갈 미국인을 생각하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히려 공사께서 우리정부에 귀국국민들의 경호를 요청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귀 정부에서 잠시 본 사안을 덮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르간의 말도 안 되는 부탁에 박충식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간 공사.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우리 대한제국을 들어서 일본에 넘긴다는 밀약을 한 귀국의 가증스런 행위를 숨겨달라고 했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순간 모르간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지만 지금은 자국민들 안전이 더 우선이었다.

“그래도 자칫 많은 인명피해가 날 수도 있는 일이니 제고해주십시오.”

박충식의 말은 더욱 격해졌다.

“귀국은 이천만이 넘는 대한제국국민들의 목숨을 일본에 넘기는 밀약을 채결했는데도 뻔뻔스럽게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들 안전을 위해 우리국민을 속이라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잠시 덮어 달라는 말씀입니다.”

“저 뒤에 취재를 하고 있는 기자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귀국에서는 언론통제가 가능한가봅니다.”

“····”

순간 공사들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접견실에는 각 신문사 기자들 10여 명이 취재를 나와 있는 것이 보였고 공사들이 놀라며 돌아서자 그 모습을 연신 사진기에 담기 바빴다. 

펑! 펑! 펑! ·····

박충식이 언론까지 들먹이고 나서야 모르간은 더 이상 변명과 억지를 부리지 못했다. 

모르간을 보고 박충식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지금 본국이 이렇게 모르간 공사와 미국국민들을 이정도로 예우하는 것은 전부 전임 알렌공사가 헌신적으로 대한제국을 도와준 덕분이란 것을 이 자리에 있는 각국공사 분들 앞에서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이 실장 뭐하는가? 모르간 공사를 미국공사관으로 모셔라.”

박충식의 지시를 받은 이현호가 손짓을 하자 실내에 들어와 있던 경비병 두 명이 모르간에게 다가갔다.

“같이 가주십시오. 공사님.”

경비병의 정중한말에 모르간은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통역 등 일행과 함께 접견실을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프랑스공사 블랑시가 외교관을 대표하여 박충식에게 부탁했다.

“모르간 공사는 외교관입니다. 비록 양국 간 불미한 일이 있었다고는 하나 외교관에 대한 최소한 예우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외부로 연락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르간 공사는 물론 모든 주한미국인들이 공사관 안에서의 생활은 절대 안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독일공사 잘데른이 질문을 했다.

“본국과의 교신이 언제까지 통제되는 것입니까?”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신다면 지금까지 약간의 제제가 가해졌던 것을 모두 풀어줄 용의가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당분간 여러분들의 이동을 한성성내로만 제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개항장에 있는 각국조계지는 어떻게 됩니까?”

“각국조계에 있는 주한외국인들은 역시 조계지내에서만 거주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지금과 똑같습니다.”

영국공사 조던이 물었다.

“일본조계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 대한제국과 전쟁상태인 일본조계지는 당연히 완전 폐쇄되었습니다.”

영국공사 조던이 반발했다. 

“조계지는 국제법에 의거 보호받는 외국인거주지역인데 그렇게 폐쇄한다면 앞으로 각국조계도 폐쇄할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불평등조약의 산물이 조계지 아닙니까? 앞으로 본국은 각국과 철저한 호혜평등에 입각한 새로운 국가 간 조약을 채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박충식은 각국공사들을 둘러봤다.

영국공사 조던은 동양소국에 불과한 한국의 신임총리가 서양과의 통상조약을 개정하겠다고 말하자 내심 가소롭다고 생각하다 박충식의 눈빛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조던은 평생 동양에서 거의 외교관으로 근무해 왔지만 박충식 같은 위풍당당한 동양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참으로 눈빛이 만만치가 않은 사람이군. 그런데 도대체 어디에 근무했던 사람이기에 나와 전혀 일면식이 없었던 것인지 정말 모르겠군.’

박충식의 시선이 조던에게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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